파리 여행기

chungeunsil 2020.05.05 20:08 조회 수 : 51

프로로그

파리는 한마디로 열린 박물관이다처음 일주일 파리여행을 계획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아니무슨 파리를 일주일씩이나 머무냐고이 말은 그만큼 파리가 일주일씩이나 머물 정도로 큰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맞는 말이다가로로나 세로로나 파리 전체를 차로 다녀 봐도 한시간 조금 넘고 사실 서울의 육분의 일 밖에 안되는 면적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그러나 실제로 파리를 접해보면 이 생각이 맞지 않는다는 걸 금새 깨닫는다문만 열면 보이는 허름한 상가의 기둥이며 심지어는 우리가 머물던 숙소의 문 손잡이나 창틀조차도 허투로 만들지 않고 일일이 조각을 해 넣었다.  하루종일 보고 느끼고 만지고 음미해도 모자라는 파리의 하루하루가 때로는 벅찬 감동이요 때로는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루브르박물관이 있는 곳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달팽이모양을 만들면서 1구역 부터 20 구역아롱디스망으로 나뉘어져 있다물론 각 구역마다 그 구역이 가지는 특색이 있고 최소한 어느 구역이 쇼핑하기에 좋고 또 어느구역이 좀 더 학구적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강남과 강북처럼 확연한 명암의 차이는 안 보인다심지어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하는 멀리 동북부쪽에는 한국사람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몽마르트 언덕이 있고 노틀담사원 근처에서 서성대는 집시들이 조심의 대상이 될 지언정 어느 구역이나 크고 작은 박물관과 조각상과 카페와 정원이 존재하는 곳이 파리이다세느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파리는 원래는 분지였다.  유럽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수많은 작고 큰 전쟁으로 침략당하고 침략하는 수탈의 역사 가운데 파리는 많이 아팠을 게다.  현재도 에콜밀리터리나 전쟁박물관을 가 보면 그 흔적이 역력하다오랜역사와 유럽식문화그리고 금세기의 패션을 선점하는 파리의 뒤안 길엔 다툼과 수난으로 점철된 질곡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마리 앙뜨와네뜨와 베르사이유궁전

최신패션은 물론이요 문학음악미술음식등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금세기 최고의 장소로 손 꼽히는 파리,  그런데 파리의 거리를 걷다보면 겉에 비춰진 화려함의 뒷면에는 많은 아픔을 겪었던 유렵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파리근교에 위치한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 보면 좀 더 확실히 느낄수 있다.  루이 14세때 건축한 베르사이유 궁전과 마리 앙뜨와네뜨에 얽힌 사연은 너무도 유명하다.  루이 15세가 일찌기 병으로 죽고 연이어 루이 16세가 즉위하고 13살의 어린나이에 타국의 왕비가 된 마리 앙뜨와네뜨그녀는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왕 프란츠1세와 오스트리아의 왕후 마리아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그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프랑스역시 신생국인 프로이센의 견제를 위해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이 필요했던 차에 이를 위해서 마리 앙뜨와네뜨와 루이 오퀴스트(훗날 루이16)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독일어는 물론이요이태리어,프랑스어등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음악,댄스,미술 심지어는 패션등 예술 전반에 걸쳐서 특출함을 보이는 마리 앙뜨와네뜨의 자유분방한 화려함은 그 시절 재정궁핍에 시달리던 프랑스정부에 눈엣가시로 보였음이 분명했을 것이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로 짜여진 베르사이유궁전을 보면 넉넉히 그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특히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거울로 된 길이 73m의 방으로 제1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었던 베르사유 조약 1919 6 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과 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1871년에 빌헤름 1세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도 역시 이곳이고 왕비의 침실과 귀족의 방공식만찬실 ,경호원들의 방을 보면 그 화려함의 극치가 보인다.  특히 뒷뜰의 베르사이유 정원이나 마리 앙뜨와네뜨 마을에 가보면 그 시절의 화려함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이미 그 이전 루이14, 15세때의 국가재정결핍으로 프랑스정부의 재정이 힘들어질 대로 힘들어진 상태에서 마리 앙뜨와네뜨의 귀족적인 호화스러움은 많은 평민들의 공분을 샀음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38세의 생일을 2주 앞두고 마리 앙뜨와네뜨는 남편 루이 16세에 이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로 인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바로 연이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어느 누구도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마리 앙뜨와네뜨의 죽음은 그렇게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으로 만인에게 각인되어 갔다그런데 파리를 가서 보고 느끼고 조금은 그 분위기에 젖어 보면 약간 생각의 각도가 달라진다.  그 시대에 누구 하나는 본보기로 잡아야하는 마녀사냥이었다는 생각과 현재까지도 파리가 패션과 문화의 선두를 달리는 것이 그 시절 마리 앙뜨와네뜨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발상을 한다면 필자를 지독한 페미니스트라고 욕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듬도 부정할 수 없다

 

라비크와 조앙마듀의 개선문

모든 명품들이 모여있는 생제리제 거리 초입에 위치한 문으로 우리나라 독립문모양의 개선문은 사실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 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죽은 후 그의 유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서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 성당 아래에 매장되었다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졌고아부키르 전쟁터키에서의 승리오스텔리츠 전쟁 등 나폴레옹의 승전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대학시절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을 몇번이나 읽으면서 언젠가 파리를 가면 꼭 처음으로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소설의 내용은 제 2차대전시망명한 독일인 외과의사 라비크와 무명의 프랑스 여배우 조앙마듀와의 암울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그 당시 라비크가 항상 수술이 끝나면 조양마듀와 함께 마셨던 독한 사과주 칼바도스’ 가 꽤 유명했었다.  필자도 친구와 함께 칼바도스를 찿아 다녔던 기억이 아련한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술을 찿아 다녔다기보다는 암울한 사회에 잃어버린 우리의 꿈을 찿아 다닌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앙마듀가 세느강의 어디쯤에서 자살할려고 했었나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고 또 그들이 자주 다녔던 개선문 근처의 주점을 둘러보기도 했다.  물론 개선문은 허구를 중심으로 한 소설이고 장소도 다 바뀌었겠지만 아마 암울했던 그 시절 우리네 사회분위기와 소설 속의 우울함이 동질감을 준 탓인지 그만큼 필자에게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다.

 

몽마르뜨와 수잔 발라통

이번 파리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또 다시 파리를 가고 싶게 만드는 곳은 단연 몽마르뜨 언덕이다.  르느와르와 에릭사티와 유트릴로로 대표되는 몽마르트언덕과 사원은 꼬불꼬불하고 좁은 언덕배기의 길들이다.  이곳은 파리여행시 주로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오픈투어버스 라인중에서 가장 멀다고 느껴지는 곳으로 20 구역중 18구역에 속하는 동북부의 고지대이다.  맨 꼭대기의 사원까지 올라가면 파리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층계하나씩 밟고 올라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탁 트인는 곳이다.  여타의 다른 구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이 길들은 모두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을 내려오다보면 많은 무명화가들이 서로 앞다투어 초상화 그리기를 권하는 모습에서 물씬 시장경제의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한번쯤 눈 감고 모델이 되어주고 약간의 보탬도 되어주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곳에 가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한참을 내려오다보면 분홍색의 집이 눈에 띈다.  ‘La Maison Rose’ 라고 쓰여진 그 집 벽에 자세히 달아 놓은 설명을 보니 바로 인상주의 음악가 에릭사티의 연인이요 많은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통이 살았던 집이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나 서커스단원으로 일하다 허리를 다치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일을 못하고 카바레의 종업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피에르사반느 라는 화가의 눈에 띄면서 많은 화가들의 모델로 일을 하게 된다.  그 유명한 인상주의 음악가 에릭사티를 만난 때도 이때 쯤이고 에릭사티가 Je Te Veux(나는 너를 원해)를 작곡한 때도 이때였다.  사티의 곡짐노페디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다분히 아방가르드풍의 괴짜같은 성격을 가진 사티의 영원한 연인이 수잔 발라통이었다는 것도 훗날 그가 남긴 편지에서 발견되었다.  사티는 수잔발라통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이후로 더 이상의 관계는 발전되지 못하고 수잔을 떠나게 되지만 오직 한 여인인수잔발라통만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그 후 수잔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게 되는데 이 아이가 훗날 몽마르뜨에서 나서 몽마르뜨에서 자란 몽마르뜨의 영원한 화가모리스 유트릴로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생아를 낳기까지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억척같이 싦과 사투했던 여인마치 생의 한가운데서 울부짖는 니나의 모습처럼 세상의 쓴맛 단맛을 이른 나이에 겪은 탓에 모델로서의 어떠한 표정이나 표현도 풍부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잔발라통의 집 앞에서 그녀가 훗날 함께 살았던 아들 유트릴로와 아들의 친구이면서 수잔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앙드레 우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혹자는 기구한 삶이었다불쌍한 여인이었다고 말한런지 모르나 필자가 생각하기엔 자기에게 맡겨진 기시밭같은 삶을 씩씩하게 헤쳐나간 불굴의 여인이요 예술혼을 태운 열정의 여인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을 내려오다 우연히 만난 카페에서 잠깐 목을 축이고 있다보니 바로 그곳이 그 옛날 피카소와 고갱과 고호가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잠시 쉬어 갔던 곳 이라고 적혀있다.  파리 전체가 사실 그러한 곳이 많으리라.  어느 곳어느 자리에 앉아도 당대에는 무명이었던 사람들이었지만 훗날 이름이 알려져 현재 우리 기억의 한 귀퉁이서 숨쉬고 있는 예술가들그들이 머물렀던 곳그들의 혼이 살아있는 곳그리고 그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 파리 곳곳에는 너무나 많다

 

노틀담사원과 세느강변

겉으로는 최고의 윤리를 지향하면서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육욕에 번민하는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고결한 마음과 순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에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꼽추 카지모도아름답고 순결하지만 낮은 신분으로 인해 어처구니없이 인간 악의 희생이 되고 마는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 등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비극적 사랑…..’   여기까지의 스토리가 전개되면 벌써 책을 좀 읽은 사람들은 감을 잡는다.  아아빅토르위고의 노틀담의 곱추이구나 라고.  노틀담성당은 세느 강의 시테섬 동쪽에 위치해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노틀담의 곱추인 카지모도가 하루도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고 평생을 숨어서 지냈던 곳빅토르위고의 곱추는 몸은 비록 불구였지만 그의 정신만은 흠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그래서 오히려 몸이 정상인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 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까지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  세느 강은 한강이나 허드슨강처럼 폭이 넓거나 물살이 세어 보이지 않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이다.  또한 강주변에 크고 작은 고딕식로코코식로마네스크식의 건축물들이 작고 크게 발달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도 무척 예술적으로 보인다.  파리 시내를 둥글게 관통하는 세느 강의 길이는 776 킬로미터라고 하니 그리 짧은 길이의 강은 아니고 이 강을 건너는 작고 큰 다리만 해도 무려 37개나 된다.  그중에 우리에게 알려진 다리는 노틀담성당 근처의 노틀담 다리사실은 가장 오래되었지만 이름만은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다리,  퐁네프와 함께 가장 오래된 다리중의 하나인 로얄 다리,  루이 15세때 만들어진 콩코드광장 옆의 콩코드다리루브르궁전과 프랑스학사원을 연결하는 예술의 다리알렉상드르 3세 다리 그리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로 유명한 미라보다리등이 있다.  

 

에필로그

파리에서 택시운전사나 과일가게를 하는 상인들그리고 박물관이나 유명 명소마다 있는 거리의 상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동계나 아프리칸동남아인들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1830년 프랑스 샤를10세의 알제리 침공을 시작으로 식민지 확장을 하기 시작한 프랑스는 그 후 모로코,튀니지등의 북아프리카와 서남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1887년의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동의 경우 오스만제국의 붕괴후 영국.러시아와 함께 사이코프-피코조약으로 레바논과 시리아를 식민지화 했다.  즉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베트남인도네시아나 중동의 레바논시리아 그리고 알제리튀니지모로코등의 나라로부터  수많은 인적자원을 데려다가 프랑스는 그들의 산업인력으로 이용했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탈식민지가 되었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이미 프랑스 땅에 뿌리를 내리고 3,4대에 걸쳐 살고 있다다시말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의 고향이 프랑스가 된 셈이다.  이미 오랜 세월 프랑스 문화가 그들의 몸과 뇌리에 각인되어버려 얼굴색만 다를 뿐 그들은 프랑스인이다.  물론 필자처럼 잠시 일주일을 묶고 가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깊은 속내를 잘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필자 자신도 이민자 1세로 살면서 더러는 이민자들의 외로움와 고충 그리고 회한을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했다.  더우기 프랑스같이 이미 오랫동안 자국의 국민들이 잘 살고 있는 땅에 외지사람들이 뿌리를 내린다는 건 썩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그들이 프랑스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좀 더 교육을 받고 좀 더 나은 잡(job)을 찿았으면 하는 바램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금새 그런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는 그래수고했다이만큼이라도 잘 살아주었음이 감사하다 라는 말을 마음속에 되뇌이고 있었다

 

마지막 날 샤를르 드골 공항으로 오는 택시안에서 30대의 젊은 모로코 청년 운전사가 필자에게 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나는 당연히 프랑스인이고 파리지엥이다.  여기는 내 나라다나는 내 나라 프랑스가 너무 좋다,  모로코는 가끔 휴가 때나 놀러 가는 곳이다.”  프랑스파리룩셈부르크가든.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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