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덕 가는 길
이경애
새벽 일찍 출발한 덕분에 충북 금왕인 시댁 마을에 도착한 것은 아침
아홉시도 채 안 되어서였다. 우리는 곧장 마을 앞 선산에 있는 시부모님 산소에
들러 성묘부터 하였다.
작년 이맘 때 연세는 많으셨지만 건강하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져 말
한마디 남겨 주시지 못하고 열흘을 혼수상태로 계시다 돌아 가셨다.
남편은 추석 연휴가 다가오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더 나는 듯 이번
추석엔 어머님의 친정이 있는 주덕으로 외삼촌 내외를 뵈러 가자고 했다.
서둘러 뵙지 않으면 연세 많으신 외삼촌과 외숙모도 언제 황망히 떠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릴 때 그리도 귀이해 주시던 분들을
오래 찾아 뵙지 못했었다.
성묘를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가에서 만난 들국화 한 무리가 아침
이슬에 젖어 더욱 청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생전에 어머님의 하얀 얼굴과 닮아 보였다. 아이들은 폴짝 폴짝 풀섶으로
달아나는 풀벌레를 쫓아 뛰어 다녔다.
큰 댁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 나왔다.
“이게 누구여? 이게 서울 막내댁이라고?” 하며 치매로 사람도 잘 못 알아보는
큰 동서의 손을 떼어내고 나온것이 못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주덕은 금왕읍이 있는 음성군과 인접한 중원군에 속해 있는데 충주쪽에
가깝다. 주덕으로 가는 국도는 잘 닦여져 있었다. 남편은 너무나 변해있는
길이 낯선 듯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옛날 어머니와 외갓집에 가곤하던
일을 추억하며 내게 그 때를 들려 주었다.
어머님은 가끔 아버님과 크게 다투신 다음날은 막내아들만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 시절은 지금같이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
꼭두 새벽에 출발해야만 했단다. 산길을 따라 지름길로 꼬박 종일을 걸어서
날이 다 저물어서야 외갓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이를 낳다가 부인이 죽은, 평생 밥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다는
부잣집에 후처로 들어가야 했던 어머니.
진달래가 온 산에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흔들리는 꽃가마 속에서
열 여섯 새 색시는 얼마나 울었을까? 시집 온지 며칠이 안돼, 새 색시에겐 어미
잃은 아기가 안기워 지게 됐고, 그 아기 말고도 열 두살 큰 아들부터 내리 세
명이나 더 있었단다. 애가 둘이라던 중신 애비를 원망한들 무엇하랴. 밥을
끓여 미음으로 아기를 키우고, 당신에게서도 아이는 생겨났다. 막내아들인
나의 남편을 가질 즈음엔 그 많던 땅도, 재산도, 서둘러 짝 지워 분가시킨
자식들에게 다 떼어줘 거의 없어 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잉태된 아이를
지우려 뒷 산 뫼동 위에서 구르기도 하고 독한 약초도 구해 먹어 보았지만 질긴
뱃 속의 생명은 꺼지지 않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단다.
어느 덧 차는 주덕 읍내를 지나 포장되지 않은 좁은 농로에 들어 섰다.
덜컹거리며 산골짝을 따라 돌아 나오면 또 산이 가로 막고, 그렇게 산을 몇구비
더 돌아 외갓집에 닿게 되었다.
외삼촌은 뜻밖에 찾아온 누이의 아들 가족을 반가이 맞아 주셨다.
어스름 저녁 아이의 손을 잡고 대문을 들어서는 지친 시누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외숙모님은 치마폭을 잡아당겨 연신 눈물을 훔쳐내셨다.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멀었는대도 외숙모님은 당신 며느리를 재촉해 우리의 저녁을
준비하시느라 아궁이엔 불이 활 활 타오르고 있었다.
툇 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 보았다. 저 쪽 산 밑으로 서너 채의 집이
보일 뿐 눈이 가는 곳 마다 산이 막아선다. 어디서 이름 모를 산 새가
울고있었다. 어머님의 기구한 일생을 아파하는 내 마음처럼….
산 등이 닿아 있는 뒤 꼍으로 가 보았다. 가지런히 장독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그 한켠에 앉아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수줍은 처녀,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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