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진 않았지요?

웹관리자 2023.03.10 15:48 조회 수 : 26

단편소설

 

“ 너무 늦진 않았지요? ”

 

 이주일 전, 딸 셋 중 가운데 동생이 뇌수술 후유증으로 나이 많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95세 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아버지께 가장 다정다감한 동생이었는데, 차마 아버지께 말씀 못드리고 남은 자매가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화가 입원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아시기까지 시간문제겠지. 이주일동안 홀로 계신 아버지를 뵈러가면서 도로상에서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그래도 아버지 얼굴을 보면 빙긋 웃으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안부를 묻는다.

 셋 중에 둘만 남은 우리 자매는 언제 말씀 드릴지 긴장의 연속이다. 게다가 극단적 선택이었기에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다. 아버지에겐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지만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니 눈만 뜨면 이를 어쩌나 싶어 줄줄 눈물이 흐른다.

 시계가 두 주일만 거꾸로 돌아가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그렇게나 소통이 잘되는 세 자매라고, 이렇게 사이가 좋은 자매가 어디 있어 하던 자만감이 내 가슴을 친다. 살아있는 고통이 죽은 고통보다 더 했을까? 고통 없는 세상으로 무사히 건너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동생을 잊지도 않고 잊고 싶지도 않다. 아마 이 상실의 고통이 내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가리라. 지난주에 한라산 영실에 올랐다. 선작지왓에 동생 사진 한 장을 가지고 가서 진달래 뿌리 근처에 살짝 심어두고 왔다. 한라산 선작지왓에 진달래 피면 미쳐버리고 싶다는 시인이 있었는데... 

 그 짧은 생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는 한 번도 못하고, 가져보지도 못한 채 가버린 내 동생. 한라산 남벽 아래 바다가 멀리 보이는 선작지왓 진달래 밭에 살아 못 본 비경, 사계절의 풍광을 두루 두루 지켜보라고 사진 한 장 묻어두고 왔다. 

  

 한밤중에 “까똑”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떠 침대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 수영으로부터 이런 메시지가 와있다. 

 수영의 동생, 수화, 공부 잘하는 언니 수영이 대학에 가자 어려운 가정형편을 생각하여 자신은 여상을 졸업하면 바로 취직을 하여 집안에 도움을 주겠다던 그녀다. 치매로 10년을 고생하다가 죽은 어머니, 혼자된 아버지를 자신이 모시겠다고 했지만 아파트에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자매 셋 중 가장 많이 만나러 다녔다던 그녀다.

 뉴욕에 있는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저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모쪼록 너무 마음 상하지 말라고 했다. 착하고 순한 동생이니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걱정이 되지만 어른이시니 견디실 것이라 했다.

 나의 답신에 수영은 다시 카톡을 보내왔다.

 

 이번 주말에는 남은 자매가 아버지에게 병으로 둘째가 생을 마감했노라고 말씀드리려 한다. 아직 모든 판단능력이 생생하시니 더 이상 거짓말로 끌고 나갈 수가 없다. 집안에 119를 부를 각오로 말하려니 너무 두렵다. 애달프다, 피를 말린다. 참담하다. 아버지, 부디 이겨주소서. 간절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받쳐 올랐다.

 그리고 나와 막내동생이 돌아가며 아버지 곁에 있을 예정이다. 12층에서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갔다. 수화의 가는 길 마지막 기억이 두고두고 처절하고 무참할까봐 확인하려느냐는데 할 수가 없었다. 남은 우리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고통 없는 세상으로 무사히 건너가기를 빌었다 “

 

‘극단적 선택!’

 나는 새벽에 눈을 뜬 이후 하루 온 종일 그 단어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수화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적이 좋은 언니는 대학에 갔지만 자신은 대학 갈 자신이 없고 갈 의욕도 흥미도 없다면서 작은 사무실 경리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이 30여년, 결혼도 못하고 겨우 먹고 살만한 돈을 벌다가 끝나버린 인생, 평생 남녀관계를 알지도 못한 채 일만 하다가 끝나버린 인생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새벽, 수영의 카톡이 단 세 줄 태평양을 건너왔다,

 

 오늘 

 급작히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 

 

 나는 이후 계속 하여 수영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수화의 뇌수술이후 둘째를 위한 기도만 하면 울음이 복받친다고 사무쳐 하던 아버지였다는데. 딸의 극단적 선택을 아신 걸까? 고령의 나이에도 씩씩하게 걸어 다니고 식사도 혼자 챙겨 드시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던 분인데. 딸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인가?

 수화의 소식을 들은 지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가면서 우울의 늪에서 헤어져 나올 수가 없다.

 삶은 무엇인지.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인지.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앞으로 남은 나의 삶은 얼마나 될 까? 좋은 날, 좋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을 것인지.

 30년 동안의 미국에서의 삶, 이곳에서 나의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그런 것이 있기나 했던가.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면서 먹고 살았지만 일상이 송두리 채 흔들린 것은 코로나19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란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하게 한 코로나19 팬데믹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2020년 3월부터 시작되어 찬란한 꽃이 피는 봄날, 뉴욕은 코로나19의 진앙지가 되었다. 매일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 때, 새벽에 눈을 뜰 때 앵앵 거리는 앰뷸런스 소리가 몸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잠을 자다가도 도로를 달려가는 앰뷸런스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눈을 뜰 때가 있었다.

 병원 시신안치실이 넘쳐서 병원 근처 길거리에 시신 수십 구를 실은 냉동트럭이 임시영안실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이 코로나19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을 들은 후 찾아볼 사이도 없이 죽었다는 소식이 곧장 날아왔다.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가족도 면회사절이다 보니 화장된 유골을 받아들었다고도 했다. 여러 말이 떠돌아다녔고 실제가 되었다,   

 브롱스 동쪽 인근의 하트섬에서는 무연고자 관들이 무더기로 묻혔다. 방호복을 입은 인부들이 긴 구덩이를 파고 소나무관 수십 개를 2열로 나란히 쌓아 매장하는 모습이 뉴스를 탔다. 차곡차곡 수십 개가 나란히 쌓여진 채 저승 동반자가 되었다. 소나무 관위에는 망자의 이름을 크게 갈겨 써놓았다. 나중에 유족이 나타나 이장을 할 경우를 대비해서라고 했다.

 인간 문명의 첫 번째는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매장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고 매장을 했던 최초의 흔적은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발견된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가까운 종인 네안데르탈인은 불을 이용하고 석기 제작기술을 지녔다고 한다. 약 2만8,000년 전 마지막으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은 스페인 남부 해안 동굴에서인데 인공적으로 판 구덩이 옆에 꽃가루 잔여물이 보였다는 것이다. 이 꽃가루 잔여물!

그런데 21세기, 눈부시게 발전한 문명사회 속에서 꽃 한송이 바치는 사람 한 명 없이 섬 한복판 구덩이에 떼로 묻히면서 세상과 쓸쓸히 하직했다. 이들도 태어날 때는 부모가 있었겠지만 죽을 때는 혼자였다. 

 장례업계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 골목, 저 골목, 서너 집 건너마다 가족이, 인척이, 친구가 코로나19로 병원에 실려가 죽으니 장례식장으로, 화장장으로 모셔가는 인력이 부족해 난리가 났다.

 “업소 직원이 밤낮없이 일해도 감당이 안 돼. 길거리 인력시장에서 데리고 온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지. 코로나19로 죽은 시신은 커다란 비닐 가방에 넣고 밀봉하여 싣고 오는데 장례식장 1, 2층은 물론 복도와 화장실 입구까지 그득 그득 차있어. 화장 날짜를 기다리는데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타주 화장장에라도 자리가 나면 가고 있어. 이제는 전화가 와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시신 접수를 거절하고 있어. ”

 장례업에 종사하는 이는 눈물 흘리고 슬퍼하고 하는 것은 감정상 사치일뿐 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은 냉혹했다. 삶과 죽음의 갈래는 평생 같이 살아온 가족관계도 단절시켰다. 

  코로나19로 죽은 이들은 부고장은커녕 직계가족만 모여 장례식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것이다. 너싱홈에 들어가 코로나19에 감염된 이들은 손 한번 못 잡아 보고 그나마 운이 좋으면 유리창너머로 보다가 세상과 작별 했다.

 “잘 있어요. 그동안 고마왔소.”

 “이제 편히 쉬시오, 고생했소."

 이러한 이별의 인사도 없이 황망히 떠나고 보내는 이것은 현실이었다.

 뉴욕한인사회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뉴욕과 뉴저지 한인상조회원들이 5월이 되면서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이 생명을 다했다. 코로나19가 확산세를 보이면서 3월21일부터 4월20일까지 한 달동안 무려 125명이 사망했다. 매달 평균 23명이 사망한 것보다 4~5배로 급증한 것이다.

 30여년 전 한인사회가 발전하고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노인상조회가 만들어졌었다. 고령의 노인들은 월회비를 내어 유사시 자신의 장례비를 유가족에게 남겨주었다. 뉴욕한인노인상조회는 회원 7,000명이 가입되어 월 40~45달러의 회비를 내었고 회원이 사망하면 유족들에게 상조금 1만5,000달러를 지급해왔다. 코로나19는 이 기금을 고갈 시켰다.  뉴저지상조회도 마찬가지였다. 한달 평균 5명이 사망했던 것이 22명이 사망할 정도로 4배나 늘어났다. 상조회마다 은행 대출을 받고 회비를 인상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일부 회원 유족들은 사정을 이해하고 약속된 상조금의 반인 7,000달러만 받기도 했다.

 한인노인들의 잇다른 죽음 가운데 활발하게 활동해오던 현역 시의원이 별세 소식을 전했다. 100여년간 아일랜드계가 독점한 지역인 저지시티의 한 지역구는 한인 유권자가 단 6명.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그는 화려한 의정활동을 펼쳐왔었다. 

  “우선 나를 알리기 위해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매기 시작했지. 나비넥타이가 120개, 날씨와 분위기, 모임의 성격에 따라 바꿔달아. 나는 말이야, 일부러 오렌지색이나 빨간색 물병을 들지, 시의회 모임에서 80%는 내가 말하고 본회의 안건 80~90%는 내가 말해. 깨끗한 거리, 부동산세 감면, 대중교통 개선, 낮은 범죄율에 대한 안건을 말하면서 오렌지빛 물병에 든 물을 마시지. 그때 좌르르 TV 카메라 방향이 나한테 쏠리거든, 일단 화려한 물병이 눈에 띄잖아.”

 그는 통 큰 배포에 의욕이 넘쳤고 시원시원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권자로 하여금 계속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게 하였다. 빨간 색 나비넥타이를 자주 매던 그는 하고자 했던 수많은 일들을 버려둔 채 이승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말이 있다.

 “권력이나 권한이 자기만을 위해서 쓰이면 독약이 되지만 많은 이를 위해 쓰이면 그 행복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삶의 에너지가 넘쳐나지.”

코로나19 초창기인 4월초에 그는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다. 백신도 치료약도 아득하던 때였다. 

 나의 오랜 지인도 코로나의 습격을 무방비 상태로 맞고 쓰러졌다. 불교신자인 그는 장례식을 하지 말고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이며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화장하여 허드슨 강변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의 부고는 알음알음으로 전해졌을 뿐, 장례식에 멀리 산다는 아들딸은 참석한 것인지, 병원에서 바로 화장장으로 가고 만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한줌의 재가 되어 40년 이민생활을 해온 뉴욕 하늘아래 바람의 한 줄기가 되어 흩어졌다고 한다.

 나는 그의 손맛을 기억한다.

 30년 전 처음 이민을 와서 한달에 한 번 만나는 시 동우회 모임에 한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10여명의 회원들이 써온 작품들을 발표하는 낭독회 후에는 다같이 점심을 먹었다. 회원들은 1년에 한번 정도 돌아가면서 점심 반찬을 준비해왔다. 

 처음 들어갔다고 하여 나는 일년동안 반찬 만들어오는 당번에서 빠졌다. 늘 내가 만드는 반찬을 먹다가 남이 만들어오는 반찬은 다 맛있었다. 반찬은 박초이 무침, 콩나물 시금치나물, 겉절이, 불고기볶음, 닭튀김 등으로 다양했는데 그녀가 만들어 온 것은 고등어조림이었다. 

 대형 은박 트레이 가득 넘치도록 담겨있던 고등어조림, 새파란 고등어들이 온갖 양념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데 어찌나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자신이 태어난  전라도 향토식으로 만들어 온 고등어조림은 두툼하고 단단한 육질에 칼칼하고 짤쪼름한 맛이 아직 내 혀 밑에 살아있다.  

 그렇게 많은 조림을 하자면 얼마나 오랫동안 고등어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손질하고 천천히 졸여내야 했을까. 아마도 온 집안에 비린내와 조림장 냄새가 배었을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반찬을 만들어 온 그녀, 그날의 고등어조림 모양은 눈앞에 선하건만 그녀는 세상을 유람하는 영혼이 되어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학교가 문을 닫고 재택근무를 하고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가 되면서 손 세정제, 모자, 마스크, 비닐장갑이 필수용품이 되었다. 뉴스 시간마다 매일의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긴장과 공포의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사람들은 서서히 숨이 막혀갔다.

 “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미칠 것 같아,”

 “ 우울해서 죽을 것 같아. ”

 “ 기분이 저조해. 살 의욕이 없어.”

 주위사람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봄이 지나고 붉은 장미가 요염하게 피어난 여름도 지났다. ‘ 가을 찬바람이 불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코로나 팬데믹 은 겨울이 오자 더욱 거세졌다.

 백신이 나오기 전에 코로나에 걸려서 죽은 사람도 있지만 회복된 사람도 많았다. 나의 학교 선배는 병원에 입원한 친지 문병을 가서 침대보를 잠시 정돈해 주었을 뿐인데 집에 돌아온 지 며칠 후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다. 병원에서는 코로나 환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길바닥에서 쓰러진 다음에야 응급실로 실려 가서 일주일동안 산소마스크를 써야 했다.

 아메리칸 대륙의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대형 트레일러 운전수인 후배는 마스크 세 겹, 장갑 세 겹을 해도 소용없었다고 한다. 코로나19에 걸려서 반 죽었다가 살아났다. 

 더 고약한 것은 코로나 발병지 운운하면서 아시안 이민자에게 그 화가 몰렸고 이에 이민자들의 들꽃 같은 삶들이 이지러지고 밟히면서 구박덩이가 되었다.

 2021년 2월부터 뉴욕주민들도 백신접종을 받기 시작했다. 의료관계자, 기저질환자, 고령자들 순으로 주사를 맞으러 갔다.   

 그런데, 일상이 흔들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사라졌다. 바로 두 살짜리 손자가 통통거리며 달려오던 발걸음 소리였다.

 우리 부부는 맨하탄 일터가 가까운 퀸즈 우드사이드 지역에 살고 결혼한 딸은 시댁 가까운 베이사이드 지역에 산다. 딸 역시 맞벌이 부부라서 평일에는 시댁에서 두살된 손자를 봐주고 주말에는 부부가 아이를 본다. 

 토요일 이른 아침, 딸의 집에 들어서면 현관문 소리만 듣고도 어린 손자가 온 마루가 울리도록 쿵쿵 뛰어와서는 와락 안겼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소소하면서도 살면서 가장 기쁜 이것마저 앗아갔다.

 주말 베비시터를 하러 가면 와락 달려드는 아기로부터 얼른 도망가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 노, 노, 할비, 할미 손부터 씻어야해. 옷 갈아입고 안아줄게. ”

 처음에 아이는 왜 예전처럼 자신을 안아주지 않는 지 어리둥절해 했다. 화장실 문앞까지 따라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계속 반복되자 달려오는 일을 포기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도 멀뚱멀뚱 할아버지 할머니를 쳐다볼 뿐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잠자코 장난감만 갖고 놀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얼른 손을 씻고 가서 이리 와 하면 마지못해 다가와 안겼다. 

 또한 그 당시 TV를 틀면 하루종일 주정부와 보건국 관계자가 나와 “집에 머물라”고 방송을 했다. 여행도 외출도 금지, 필수업종 외에는 집에서 일하라고 했고 먹거리를 사러 식품점에는 마스크에 모자, 장갑을 끼고 갈 것을 독려했다.

 유아원, 놀이공원 그 어디에도 못나가고 종일 집에 있는 손자는 주말에 우리 부부와 놀고 먹고 낮잠을 자곤 했다. 처음 집에 들어설 때 와락 안기는 재미는 없어졌지만 레고를 같이 만들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업어서 잠도 재우다보면 나날이 정이 새록새록 들었다.

 저녁이 되어 딸 부부가 집에 오면 옷을 갈아입는 우리에게 매달렸다.

 “할미, 스테이 홈!, 스테이 홈! ” 하면서 울었다. 

 종일 TV에서 집에 머물라고 떠들어대니 아직 영어도 한국말도 서툴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지 말고 자신과 같이 있으라고 울었다. 

 딸은 ‘엄마, 아빠 피곤하니 얼른 집에 가서 쉬라.’고 등을 떠밀었다. 우는 아이를 두고 오는 마음은 언짢았다. 앞뜰과 길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붙어선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울었다. 때로 집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아이가 통곡을 하며 우리를 붙잡던 그 시기. 2년 전 그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 하룻밤 함께 자면서 아이를 달래고 싶었다. 

 

 이제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바이!’ 하고 손을 흔들 뿐 장난감을 갖고 놀기 바쁠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결코 자신과 함께 잠을 자지 않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가끔 그 날이 생각나서 후회가 되었다. 

 ‘피곤하면 얼마나 피곤하다고, 다음날 아침 좀 늦게 일어나면 어때? 교회 좀 안가면 어때? 일터에 좀 늦게 가면 어때? 꼭 그 밤에 우는 아이를 두고 집에 갔어야 했을 까? 옆에서 같이 자면서 잠드는 것을 보고 마음도 달래 줄 것을... ’ 

 그러나 그런 순간은 다신 오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커버렸다. 자기와 놀아주던 할머니가 집에 간다고 대성통곡하며 울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 부부는 맨하탄 업타운에 있는 100세대가 사는 아파트 안에서 작은 드랍숍을 운영하고 있다. 세탁물을 받으면 드라이할 곳과 물빨래 할 곳으로 각각 보내어 드라이와 세탁이 되어온 옷을 다시 손님에게 돌려준다. 사교활동은 물론 결혼식, 장례식, 동창회, 생일잔치 등의 모임이 모두 취소되면서 양복 입을 일도, 외출복 드라이 할 일도 거의 없어졌다. 당연히 우리의 일거리도 대폭 줄었다. 

 매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부터 오후 6시까지 하던 영업시간도 줄여야 했다. 월수금 3일에 시간도 오전8시부터 오후4시까지만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입주자들을 위한 세탁소인 지라 관리사무소는 코로나19 초창기인 6개월동안  렌트비를 무료로 했고 그다음부터는 3분의 1로 깎아주었다. 이는 가게 문을 닫지 않도록 숨통을 트이게 했다.

 입주민들이 뉴욕 근교 집으로 피신 가기도 했고 출근을 않고 새옷을 사지 않으니 옷을 줄이거나 고칠 일이 없었다. 물빨래만 늘고 봉제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세탁은 필수업종에 들어가니 시간을 줄여 문을 열고 있지만 인건비도 안 나왔다. 매일 오던 히스패닉 종업원을 오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이 없어서 하루종일 한국 드라마만 보다가 집에 오는 날도 있었다. 

  대중교통은 위험해서 탈 수가 없었고 우리는 차를 갖고 맨하탄으로 갔다. 그 복잡한 거리에 힘들게 주차를 하면서 생업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살아남기 위한 전투이자 전쟁이었다. 

 재택근무와 집콕 시대를 보내고 봄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왔지만 여전히 수그러지지 않는 질병에 사람들은 점점 지쳐갔다. 코로나 블루에 코로나 블랙까지 정신상담 하는 전화만 불똥이 튀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코로나가 약해져도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한다고 해도 과거처럼 사람들이 모이지도 않고, 초청하지도 않았다. 스몰 웨딩, 가족장이 대세가 되었다. 델타 변이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 코로나 등 코로나 바이러스는 몸을 여러 번 바꾸면서 완전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탁소에 오는 손님들의 인종은 다양했다. 맨하탄 지역인 지라 백인이 대부분이고 아시안이 거의 없는데 정장을 드라이 하러 오는 30대 한인여성이 한 명 있었다. 자연히 그녀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예시바 대학 심리학 박사 5년차라고 했다.

 “코로나 기간동안 상담 엄청 했어요. 환자도 있고 가족도 있고, 다들 너무 힘들어 해요.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죠. ”

 그녀는 원래 메디칼 스쿨에 다녔다고 한다.

 “ 어렵게 들어간 아이비리그에서 의대 공부를 시작한 지 2년 째 바로 일년 위 선배가 제눈앞에서 떨어져 내렸죠. 둘이서 8층 휴게실에서 의대 공부에 대한 부담감, 성적이 떨어진 것에 대한 자책감, 이런 대화흘 나누고 있었어요. 선배가 갑자기, 난 못살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소리를 지르더니 창가로 달려갔어요. 늘 잠겨있던 유리문이 왜 그날은 열려있었는지. 순식간에 화단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사람 얼굴이 어떻게 두부처럼 납작해지죠? “

 방금 따끈따끈한 대화를 나누던 이가 차가운 시신이 된 장면을 목격한 이후 다시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의대를 포기했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녀. 심리학 교수인 아빠, 엄마 옆에서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은 퀸즈 지역 병원에서 심장 이식이나 간 이식을 앞둔 사람들의 심리 상담을 하고 있어요. 환자의 마음 상태부터 시작하여 수술 시와 수술 후 돌볼 사람이 있는 지, 가족 관계는 어떤지, 등등 모든 환자 주변에 관한 것을 물어보고 들어주는 일이지요. ”

 “ 그 일도 만만찮겠네."

 나는 은근 걱정이 되어 슬쩍 물어보았다.

 “ 어린 딸을 둔 29살짜리 심장병 환자가 있어요. ”

 “ 수술 하면 살 수 있지?”

 “ 석 달 후면 죽을 거예요. 가망 없어요.”

  ‘스트레스가 굉장하겠네. 어떻게 풀어?“

 살짝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나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심장전문의 남자친구가 있어요. 힘든 날은 그를 만나러 가지요. 코로나 팬데믹동안에 코로나 환자를 직접 치료했고 인턴, 레지던트 시절 응급실에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 그에게 물어봤어요? 어떻게 견뎌냈어 하고,”

 “ 남자친구가 뭐라고 했어?”

 “ 저더러 잊어버리래요. 죽음을 보고 나오면서 잊어버려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대요.”

 “ 같은 의료계통이라서 도움이 되겠네. .”

 “ 그래도,  나와 이야기하면서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빛, 딸을 쳐다보던 젊은 엄마인 그녀의 눈빛이 자꾸 생각나요. 잊어야겠지요. ”

 “그래, 그래야지.”

 무어든지 깊이 들어가면 안된다. 죽음에의 두려움, 공포,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다.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그때마다 세상이 바뀌었다. 바꿔진 세상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 변화가 두려웠다. 업무와 생활변화에 따라 통신, 화상 기술을 배워야 하고 언택트 경제에 능숙해져야 했다.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아날로그 세대라 모든 것이 서툴렀다.

 나는 세탁소에서도 재봉질 보다 손바느질이 더 편했다. 드르륵 기계로 박는 것보다 손에 바늘을 쥐고 뜯어진 옷가지를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매는 순간이 더 좋았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힘든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고 있고 어둡고 축축하던, 두려움과 위협의 긴 터널을 지나고 환한 햇살아래 나서려는 순간. 수화는 스스로 삶을 끝내버렸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대학시절, 수영을 만나러 가면 나를 쳐다보며 수줍게 웃던 수화, 상냥하고 예뻤던 그녀, 얌전하기 짝이 없던 그녀. 언니를 누구보다 좋아해 언니 친구인 내게도 다정하기 짝이 없던 수화. 내 동생이기도 한 수화.  

 수술 후유증이 남은 식구에게 부담이 될 까봐 그런 것인지, 조울증으로 그런 것인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수화의 소식에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쉬기 어려웠다. 평생 해온 브래지어를 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감, 바로 죽음에의 공포였다. 이러다가 제풀에 숨막혀 죽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코로나19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고 사는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드디어, 수영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아버지 삼우제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어 이제 소식 전한다. 동생 가고 그 참담함에 숨을 잘못 쉬었는데 15일 만에 아버지마저 황망하게 급작히 길고 긴 이별을 했다.

 아버지가 가신 날 이틀 후 자매가 모여 가운데 동생의 소식을 알리려고 만반의 시나리오를 준비했었는데, 그 전에 사우나 가셨다가 거기서 심정지로 쓰러지셔서 가셨다.

 애틋하던 둘째의 비극을 듣지 못하고 가신 게 불행 중 다행일지. 아직 애통함이 지극하지만 애써 정리하지 않으려 한다. 혈육간에 충만했던 사랑을 눈물로라도 오래 오래 간직하려 한다.

 멀리서 보내준 위로의 마음 고맙다, 지난 번 동생을 생각하며 올랐던 한라산 영실의 단풍은 불타듯 곱구나. 너무 고와서 서럽다.

 

 수영의 카톡을 읽은 나도 한라산의 넓은 고산 평원 선작지왓에 가보고 싶다. 한라산 해발 1,700미터 고지인 선작지왓 일대에 5월이면 절정에 이른다는 털진달래 꽃밭, 한라산 최고봉 백록담 남벽이 한눈에 보이는 그곳에 진분홍 꽃들이 출렁이면 신선들의 정원 같다지. 

 그곳에는 몸을 흔들어대는 바람과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산야, 새하얀 설원에 날리는 눈가루,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사시사철이 아름답겠지. 키 작은 관목류부터 다양한 들꽃들이 피었다 지는 그곳 어디에 동생을 생각하는 수영의 마음이 묻혔을 까?

 

 나는 언제 죽을까? 좀더 나이가 들어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허름한 오두막에서 혼자 살며 혼자 잠들고 최소한의 음식물을 섭취하며 살다가 어느 날, 기력이 다하면, 혼자 이 세상에 왔듯이 혼자 떠나고 싶다. 미련없이, 조용하게...한 가지 아쉬운 것은 수십년 동안 시를 쓰고 싶었지만 못 쓴 것이지. 이민자로 살아온 내 삶이 시로 될 수 있을까, 평생 망설이고 헤매다가 제대로 된 시를 단 한편도 쓸 수 없었어. 힘든 노동에서 돌아온 저녁이면 시를 쓰고 싶었지만, 단 한편의 나의 시를 쓰지 못했어. 다른 이들의 시만 읽었지.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나희덕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별 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마광수 ‘별 것도 아닌 인생이’ )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고영민 ‘끼니’ )

 이러한 시들을 쓰고 싶었다. 

 늘 한걸음 뒤처져서 뒤따라가는 삶, 이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에 지치고 수화 소식에 한참 우울증 무드에 빠져있는 와중에 딸이 둘째 아기를 낳았다. 코로나 기간동안 한 생명을 탄생시킨 딸이 대단하기도 하고 용하기도 하고 신통하기도 했다. 갓난아기가 2개월이 된 어느 날, 딸 부부는 다섯 살 된 손자를 데리고 시어른 생일에 갔다. 식당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직계가족끼리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그날따라 남편은 약속이 있어 혼자 아기를 보아야 했다. 

 “아기가 잘 먹어서 똥도 자주 싸, 그래서 똥구멍이 빨개. 기저귀를 좀 빼고 있어야겠어.”

 딸의 말대로 아기의 기저귀를 벗기니 앙징맞은 자그마한 엉덩이 사이가 발갛게 부어있다. 얇은 이불을 덮어 아기를 품에 안았다.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잠든 아기를 안고 있자니 아기 심장과 내 심장이 닿은 듯 마음이 평화로웠다. 아기도 할머니 심장 소리가 편하기를 바라며 꼼짝 않고 앉아서 맞은 벽면에 걸린 TV를 보고 있었다.

 두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갑자기 아랫도리가 뜨뜻해지더니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뿔사,’

 아기가 잠자면서 오줌을 싼 것이다. 그 조그만 고추에서 나오는 오줌 줄기는 나의 배를 타고 사타구니를 지나 허벅지까지 흘러내렸다. 얼마나 기분이 이상한 지, 또 흐뭇한 지, 얼굴에 저절로 벙싯 미소가 지어졌다.

 ‘ 녀석이 이렇게 효도를 하네. ’

 아기의 말갛고 깨끗한 오줌으로 내게 묻은 세상의 때가 다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나의 불안과 걱정, 우울증이 말끔히 날아가고 정화된 것이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딸 부부는 아기가 내 배위에서 오줌을 쌌다고 말하자 어쩔 줄 몰라 한다. 딸이 자기 셔츠와 바지를 들고 나오면서 얼른 옷 갈아입으라고 한다.

 “엄마, 집에 가려면 옷이 젖어서 어떡해? 이 옷 입고 가.”

 “아니야, 바로 집에 갈 건데 뭐, 괜찮아, 다 말랐어. ”

 나는 아기의 귀한 오줌 세례를 받은 젖은 옷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다. 생명에의 존귀함, 삶과 죽음의 숙제를 푼 듯한 기분,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대를 이어 간다는 진리에 가슴이 다 설렌다. 

 더 이상 내 몸과 마음이 늙어가는 것이 힘들지 않다. 언젠가 올 죽음이 자연스럽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윤석구 ‘늙어가는 길’ 

 

 늙어가면서 이제 나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늦진 않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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