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의 분노

웹관리자 2024.01.15 14:40 조회 수 : 14

소미의 분노

 

1.

소미는 오늘도 다른 사서들보다 일찍 나와서 한쪽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화장기 없는 갸름한 하얀 얼굴에 누가 보아도

사십이 넘은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여자다. 그렇다고 소미가 유난히 예쁘다거나 매력이

있다는 건 아니다. 얼핏 보면 덜 자란 여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작은

키에 마른 몸집을 가진 그녀는 매사에 세심하고 지나칠 정도로 조심

성이 많은 여자다. 가톨릭인 그녀가 단발머리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묵주를 굴리고 있을 때 옆에서 보면 여고생으로 보일 정도다. 사십이

넘은 늦은 결혼에 아직 아이가 없는 탓인지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책

을 빌리러 오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

곤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도서관장 A가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소미 씨, 벌써 와서 다 정리했네. 커피는 마셨어요, 어때 커피 한

잔?”

“죄송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소미는 사람과 눈도 안 마주친 채 들릴 듯 말 듯 모기만한 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다.

“아아, 커피 안 마신다고요. 그럼 핫 티라도?”

“죄송해요, 그냥 물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자신의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사람들과의 대화에 익

숙하지 못한 소미는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수줍음을 타는 듯 양

볼이 빨개졌다. 도서실 직원들 사이에서 ‘천연기념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소미는 요즘 사람 같지 않고 마치 조선시대 여인이 환속

해 온 듯한 느낌이 드는 여자다.

특히 친한 친구도 없고 걸려 오는 전화도 없다. 도서실에 나오면

한 자리에 앉아서 책을 정리하거나 일일이 목록을 봐가며 그에 맞게

꽂아놓고 식사 시간이 되면 도시락이 담긴 작은 노란 손수건을 풀어

서 혼자 제 자리에 앉아 소리 나지 않게 먹는다. 햇볕 좋은 봄날, 남

들이 잠깐 밖에 나가서 봄볕을 쐬자고 해도 고개만 좌우로 내젓고 조

용히 거절의 표시를 보낸다. 그리곤 혼자서 창가에 기대어 봄볕을 쐬

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대화할 사람은 그녀의 그림자일 뿐, 어

느 누구하고도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대화를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쌀쌀맞거나 퉁명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저 할 말만 가까스로 작고 낮

은 음성으로 조용조용히 말한다. 음성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은 여지없이 나타났다.

한번은 디저트로 싸온 딸기를 먹다가 떨어뜨렸는지 흰색 블라우스

에 빨간 물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비누로 지우고 와서도 어쩐지

꺼림직했던지 도서관장에게 허락받고 10분 거리에 있는 집에 가서 다

른 흰색 블라우스로 갈아입고 왔다. 그리고 그날, 혼자 남아서 30분

을 더 일하고 집에 간 적이 있다.

남자와 한마디만 이야기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소미가 어떻게 결혼

을 했고, 또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사내에서는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소문에 의하면 원래 소미는 수녀가 될 생각으로 결혼을 전

혀 생각 안 했는데 사십이 넘어 자신과 성격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는 것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유독 많은 B 부관장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소미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소미 씨, 나도 여자라서 그런데, 아무래도 결혼하면 아기를 가져야

하잖아. 무슨 계획이 있어? 그리고 소미 씨 남편은 뭐해?”

상대방이 답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질문공세를 퍼붓는

B 부관장의 무례함에 소미는 상상외로 겸손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네. 맞아요. 아기를 가져야 하지요. 그래서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

다. 저의 남편께서도 노력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

고 한쪽에서는 빈정 섞인 야유도 들렸다.

“어머,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 남자가 노력하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순간 소미는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주만 굴리고 있었다. 군중들이란 때로는 우매하

지만 때로는 한없이 잔인하기도 한 사람들이다. 소미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누구를 미워한 적도 없다. 그런데

군중들 서너 명이 모이게 되니까 쓸데없는 용기가 생기면서 아무 잘

못도 없는 소미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골탕 먹일 궁리부터 하고 있다.

자기들과 다르고 자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미 씨,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말 들어봤지? 남자가 노력하고

있다는 건 부부관계를 많이 갖는다는 말인가? 어머, 놀랍네. 소미 씨

가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우리도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데. 소미 씨,

생각보다 대범한 구석이 있네?”

묵주알만 연신 굴리던 소미는 입술을 깨물고 참고 있다가 드디어

그렁그렁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을 보이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리고 십 분 후에 다시 나타난 소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둥 다시 제자

리에 앉아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크게 싸움이라도 걸어오든지

아니면 한바탕 징징거리며 울 줄로 생각했던 소미가 아무 일도 없었

던 사람처럼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다시 군중들은 제풀에 꺾인 듯 조

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2.

소미와 내가 친하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나이도 비슷하고

직장에서 자리도 옆이라 진작에 친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왠지 나는

소미와 친하게 되면 혹시 받을 수도 있는 불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불이익 이래야 별것 아니지만 직장에서 주위 사람

들 눈 밖에 나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그렇

다고 그들과 함께 가세하지도 못하면서 어정쩡한 입장만 취하고 있던

나를 소미는 무언의 아군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여자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거

의 울상이 다 된 상태로 손 씻는 싱크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미

를 발견했다.

“소미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요?”

소미는 건드리기만 하면 당장 울음이 터질듯한 눈으로 애원하듯 천

천히 나에게 말했다.

“혹시 생리대있어요?”

“응, 있어요. 생리대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나가서 사면 되지, 그

게 뭐 큰일이라고.”

나는 마치 소미의 언니라도 되는 듯, 반은 꾸지람, 반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잠깐 기다리라 하고 핸드백에서 생리대를 챙겨 갖다주

었다. 소미는 생리대를 받으면서 입가에 씁쓸한 웃음 한 자락을 흘렸

다. 그 표정은 보통 때 같으면 눈에 안 띄었겠기만 단 둘이 있는 작

은 공간에서는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문득 방금

내가 본 그녀의 허탈한 웃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소미 씨, 괜찮아요?”

그러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소미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자

조적인 어투로 한마디를 뱉었다.

“피가 나오면 안 되거든요.......”

 

3.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생기면서 소미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녀의 영토를 내게 보여줬다. 나에게 이야기할

때 소미는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면서 한번씩 눈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마치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을 저지르다 들킨 수

녀처럼 의식적으로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곤 했다.

“소미 씨, 치아가 참 고르네요. 웃는 모습이 너무 고와요. 손으로

가리지 말고 웃어요.”

“죄송합니다. 제 습관이에요. 제가 잘못 굳어진 습관이 좀 많아요.”

항상 대화의 마지막은 자신을 책망하는 소미에게 나는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나이를 물었고 그녀는 75

년 2월이고 나는 74년 11월생이니 학번은 같아도 띠가 다르다는 것까

지 서로 알아냈다. 돌연 소미는 느닷없이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죄송해요, 저와 동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언니네요. 이제부터

키고 결국 자기네 집단을 위한 사람으로 키운다는 사실이 가장 끔찍

한 일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더욱이 어릴 때부터 키워진 아이들은 흠

없고 순전한 아이들로 전적으로 천주님의 은혜를 받은 아이들이라는

궤변은 어디서 나온 논리냐며 성토를 했다. 어떤 종교든지 종교는 절

대로 아직 철이 들기 전부터 답습하게 하는 건 세뇌교육, 즉 브레인

워시라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잠시 나에게는 허리케인이 지나가는 듯한 큰 태풍이 몰려왔다. 나

는 딱히 종교가 없다. 부모님은 교회에 다녔고 나 역시 주일학교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엔 교회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 가면서 친구

따라서 성당도 가고 또 한참 우파니샤드 철학에 탐닉했을 때는 절에

도 갔었다. 심지어는 이태원의 모스크 앞을 지나갈 때는 호기심으로

모스크에 들어가서 무슬림에 대해 배운 적도 있다. 그러나 어느 종교

든지 내 머릿속에 박힌 생각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또는 어려서부터

어떤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은혜라는 사실이었

다. 불현듯 그동안 내가 갖고 있었던 사상,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나를 옥죄고 있었던 이 사상에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태호는 나에게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비밀스런 진리를 말해준 것이다.

 

4.

‘이월상품 70프로 세일’ 광고를 보고 소미와 백화점에 갔던 날 이야

기다. 소미는 주름치마 하나를 사면서 요리조리 살펴보고 심지어는

손가락 마디로 주름의 폭까지 재고 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너무

어이없어서 물어보았다.

“소미 씨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꼼꼼했어? 아휴, 너무 놀랬다. 아니

주름치마 주름의 넓이까지 다 재봐? 난 심지어 치마 사러 갔다가 치

마 없으면 바지라도 사 오는 성격이거든. 그런데 소미 씨는 꼭 자기

가 원하는 종류가 아니면 그냥 빈손으로 오더라구.”

“죄송해요. 오늘 저 때문에 시간 많이 뺏기셨죠? 성격을 좀 고치려

고 해도 힘들더라구요. 글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는

이 정도로 꼼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끔 옷에다 음식을 흘린다

고 수녀님께 야단 맞은 적도 많거든요. 근데 아마 중학교 이후부터

야단 안 맞으려고 매사에 조심했던 것 같아요.”

그날 우리는 백화점에서 나와 출출한 요기도 달랠 겸 근처의 분식

점에 들어갔다. 떡복기와 만두, 어묵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단무지

를 하나 집어먹고 있는데 소미는 자기 쪽에 놓여진 앞 접시를 들어서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왜? 뭐가 있어?”

“아니요, 금이 간 것 같아서요.”

“그래? 내 껀 괜찮은데. 똑같은 거잖아.”

“그러게요. 이상하게 제 것만 금이 간 것 같아요.”

“어디 봐, 아니야, 이건 무늬잖아.”

“죄송해요. 지금 보니까 그런 것 같네요.”

흰색에 연하게 불규칙한 무늬가 있는 접시는 얼핏 보면 깨진 것처

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접시 안쪽도 아니고 외형의 밑 부분을 조사하듯

이 살펴보는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소미가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소미는 이번 일뿐 아니라 항상 흰색에 대해 유난히 민감한 반응을 보

였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의문이 갔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에둘러서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요즘 녹색이 그렇게 좋더라고, 전에는 노랑이나 흰색 등 연한

색이 좋았거든. 근데 요새 환경이니 뭐니 하면서 여기저기서 녹색운

동이 한참이다 보니까 나도 따라가게 되는 것 같애. 소미 씨는?”

한참 밑을 보고 있던 소미가 한쪽 뺨을 붉히면서 마치 어려운 문제

를 풀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요....... 흰색이 제일 싫어요.”

나는 무슨 색을 싫어하냐고 물은 게 아니었는데 의외로 소미는 먼

저 자기가 싫어하는 색부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다른 한쪽 뺨에

스치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에 내 마음 한쪽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

었다. 그때 소미는 마치 나에게 위안이라도 주려는 듯 다시 처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싫어하는 색부터 말하니까 이상하시죠? 좋아하는 색 말

하면 더 놀라실 것 같아서요. 저는 검은 색을 제일 좋아해요. 검은색

은 모든 걸 다 덮어주잖아요”.

 

5.

소미는 두 번의 자연유산 후 침체 상태에 빠졌다. 그렇잖아도 조용

한 소미가 더욱 말수가 적어지고 내 눈길조차 피하고 혼자서 한 곳에

서 웅크리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나는 친한 친구 중에 산부인과 의

사인 닥터 C를 생각해내고 소미에게 닥터 C에게 가서 소미의 상태에

대해 의논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소미는 깜짝 놀라면서 재차 물

어왔다.

“죄송한데요....... 분명히 의사가 여자죠? 저는 남자 의사한테는 안

갈 것입니다.”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내 친구를 생각한 거야, 소미 씨가 그럴 것

같더라고. 그리고 닥터 C는 성격도 쾌활해서 아마 한번 말해보면 기

분도 달라질 거야. 개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친

구들 사이에도 소문났거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가볼게요.”

이렇게 해서 소미는 닥터 C 클리닉에 다니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모처럼 밀렸던 빨래며 집청소를 하고 있는데 소미에

게 전화가 왔다. 토요일에는 좀처럼 전화를 안 하는데 웬일이지 생각

을 하면서 전화를 받으니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와 함께 한껏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제가 카톡으로 ‘전화 가능해요?’라고 물어봤는데 카톡을

안 보셔서요.”

“어, 그러네. 청소기 돌리느라고 못 들었어. 근데 웬일? 잠깐만, 내

가 먼저 말할게. 좋은 일이지?”

“죄송해요, 토요일에 전화드려서요. 좋은 일 맞아요. 그런 것 같아

요.”

“소미 씨, 그 죄송하다는 말 좀 안 할 수 없어? 뭐가 그렇게 매일

죄송해,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반이라고 하잖아. 토요

일이 무슨 상관이야.”

“죄송....... 아니, 이제 안 할게요. 죄송하다는 말이요. 오늘 닥터 C

클리닉에 다녀왔어요. 임신 6주래요.”

“어머! 진짜 좋은 소식이다. 태호 씨도 알아? 모르면 빨리 알려야

지.”

“같이 다녀왔어요. 처음 3개월만 조심하면 괜찮대요. 근데 정말 괜

찮을까요? 걱정이 돼서요.”

“아니, 남들 다 낳는 앤데 무슨 걱정을 해? 제발 사서 걱정 좀 하지

마.”

일단 툭하고 말을 던지긴 했어도 나도 내심 걱정이 앞섰다. 잘 되

어야 할텐데.......

“그래서 둘이서 축배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 축하해. 그리고 뭐

필요한거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까짓 꺼, 내가 다 사 줄게.”

“말씀만 들어도 고마워요.”

뭔가를 안 하고 있으면 항상 불안한 듯 직장에서도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일하는 소미다. 다른 사람은 자기 할 일만 하면 전화기를 무음

으로 해 놓고 실컷 카톡하고 심지어는 게임하는 사람까지 있다. 성격

이 좀 활발한 사람은 관장에게 일 다 끝났는데 잠깐 밖에 나갔다 와

도 되느냐고 묻는다. 내가 바로 그랬다.

조용히 앉아서 컴퓨터와 둘이 일하는 직장 분위기가 싫어서 빨리

일 끝내고 도서관 뒤쪽의 공터에 나가서 멍때리고 있다 들어오곤 했

다. 그런데 소미는 달랐다. 일단 직장에 들어오면 전화부터 꺼 놓는

다. 그리고 페이퍼 타올에 물 묻혀서 자기 자리, 컴퓨터, 회사 전화기

등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닦는다. 비누가 묻은 물티슈가 있는 데도

마다하고 꼭 물을 묻혀서 닦고는 의자에 앉기 전에 의자 다리며, 앉

는 자리, 손잡이 등을 점검하고 앉아서 컴퓨터를 켜기 시작한다. 지겹

지도 않나, 회사에 처음 출근하는 날도 아니고 어쩌면 저렇게 매일

똑같은 일을 할까, 사실 더러워질 것도 없다. 먼지가 쌓일 곳도 없다.

그런데 소미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자체를 마치 죄악시하는 사람처

럼 보인다. 내가 밖에 나가서 혼자 멍때리고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놀

랄까 생각을 하면서 하루는 소미에게 물었다.

“소미 씨, 혼자서 멍때린 적 있어? 알지 무슨 말인지? 그냥 넋 놓고

있는 거, 아무 일도 안 하고.”

“녜, 알아요. 근데 왜 그래야 돼요? 그건 나쁜 거잖아요.”

“뭐가 나뻐? 한번 멍때려봐. 얼마나 휴식이 잘 되는데. 소미 씨, 사

람이나 동물이나 가끔씩 휴식이란 게 필요하거든.”

“아무 일도 안 하고,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가 텅 빈 상태는 나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빈공간에는 잡념이나 나쁜 생각이 들어가잖아요.”

“누가 그래. 나쁜 생각이 들어간다고?”

“꼭 누가 그러는 건 아닌데요. 그럴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릴 때 수

녀님들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구요.”

문득, 소미의 마음과 생각과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단단한 쇠

사슬. 그리고 그 쇠사슬에 매임을 당하면서도 즐거운 듯, 그것이 최상

인 듯 살고 있는 소미가 이 공간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마치 햇빛

한점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실체인 양 살고 있는 느낌. 그래서 밖에서 ‘나와 보세요. 여기 햇빛이

좋아요. 딴 세상이에요.’라고 부르짖어도 결코 나올 수 없는 동굴.

물론 우리 모두는 다른 크기와 모양의 자기만의 동굴이 있다. 그리

고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때로는 빛이 들어오는 작은

틈을 발견해서 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우리는 선자 혹은 도인이

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소미를 옥죄고 있는 아니 어

쩌면 그녀가 택한 쇠사슬의 고리를 내가 풀어줄 수 없다면 알려는 주

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녀의 선택은 그녀가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길이고 그 길은 한 길밖에

없는 외길이었으니까.

 

6.

“아, 참 소미 씨, 내가 물어보려고 했는데 자꾸만 잊어버리네. 요즘

성당에 안 가는 것 같더라, 그치?”

언젠가부터 성당 얘기를 안 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물었다.

“네, 태호 씨가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이유도 있고요. 그래도 가끔

기도하러 들려요.”

“태호 씨 무슨 일 한다고 했지?”

“건설현장에서 일해요. 노동이죠. 태호 씨 말을 빌면 ‘신성한 노동’이

죠.”

“와, 신성한 노동이라? 거창한데? 어쩐지 좀 이데올로기가 섞인 말

같기도 하고.”

“태호 씨가 신성하다면 맞을 거예요. 지나 놓고 보니까 태호 씨 말

이 거의 다 맞더라고요. 성당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태호씨 말이

꼭 의식적으로 주일에 갈 필요 없다 하더라고요. 그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정말 순수한 여자, 소미다. 마치 물이 든 컵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

뜨리면 금방 퍼져 나가듯 옆에서 누군가가 설득력 있게 잘 말해주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사십 중반의 나이에 저렇게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은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 세상 풍파에 시들고 누가 뭐라 해

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식의 생각을 가진 나로서

는 한편 부럽기도 했다. 남편인 태호 말을 믿는다면 최소한 여태껏

스스로를 학대하게 만들었던 그 어떤 관념 그리고 세뇌를 강요하는

그 집단으로부터는 자유로울 것이라는 안도감마저 생겼다. 아기를 가

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소미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대하려고 노력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가끔씩 농담도 하면서 웃

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군중들도 더이상은 놀림의 먹잇감이

없어지자 제 위치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소미를 대하기 시

작했다. 마치 여태껏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이 가면을 벗고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스스로도 ‘그래 아마 소미가

쇠사슬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자랐다면 저런 모습이었을 거야.’라

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점심을 함께 먹으며 나는 장난스럽게 소미에게 물었다.

“소미 씨, 그때 말이야, 내가 색깔에 대해 물었을 때 왜 흰색을 싫

어한다고 한 거야?”

나는 사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물었던 것이지 결코 대답을 요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소미는 진중하게 받아들이면

서 목청을 한번 가다듬고는 가늘고 여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차분하거나 진중한 말을 하려 할 때면 으레껏 하던 그녀의 버릇이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이젠 됐어요. 천주님이 다 용서하셨어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제 마음이 힘들었던 것도 자꾸 그 행위 자체를 떠

올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그 신부님을 결코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워하지 않아요. 미워하는 건 죄악이니

까요. 저는 용서할 수 없지만, 천주님은 다 용서하실 수 있으니까요.”

내가 뭔가를 좀 안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한 사람으로 나를 지목한 건지 몰라도 소미는 담담하게 그러나 모호

하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그 신부

가 누구냐거나 그 일이 무슨 일이었냐고 물어볼 수는 없다. 단지 이

야기 끝에 본인이 많이 울었다는 것, 그때 피가 흰색 시트에 묻었던

기억이 안 잊혀진다는 것, 원장 수녀가 따로 불러서 아무한테도 이

일에 대해 발설하면 안 된다 했고 천애원이 나쁘게 소문나면 결국은

천주님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은 다 잊혀

진 일이라고 했다.

며칠 후 태호에게 들은 바로는 소미가 중학교 3학년 쯤 되었을 때

한 신부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지만 아무도 문제 삼

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잘못 퍼진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후로는 모두 잊혀진 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소미가 자

기랑 살면서도 한 번도 이 일에 대해 말을 안 해서 몰랐다고. 벌써

30년이 지난 일인데 혹시라도 고소가 가능하겠느냐고 나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한 주도권은 천주님도 아니고 신부

님도 아니고 원장 수녀도 아닌 오직 소미만이 가지고 있고 소미는 이

젠 없었던 일로 다 잊었다고 하니 소미가 원하는 대로 따르자고 했

다.

내 친구 닥터 C는 서글서글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여자다. 자기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도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려고 노력하

는 여자다. 무엇보다 소미를 참 좋아했다.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많

은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

면서 내가 이미 소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던지 소미에 대해 말하

기 시작했다.

“어릴수록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야, 소미처럼 어릴 때 임신해서 소

파수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염증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나팔관 한

쪽이 막히거나 협착이 와서 임신이 어려워져. 이번에 임신된 게 천만

다행이지.”

소미는 닥터 C에게 모든 걸 다 솔직하게 얘기한 것 같다. 단 한 가

지만 빼고, 상대는 신부가 아니고 동네 깡패들이라고.

임신 3개월이 가까워 오면서 소미는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가끔

씩 옷 위로 만져보고 쓰다듬고 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놀리기도

할겸 농담으로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싱글벙글이냐고 이제 낳아보라고

얼마나 힘든지라고 했다. 그 소심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대범하게 만

인이 보는 앞에서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걷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한편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소미 씨, 뱃속에 아기가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때야, 일단 밖에 나

와 봐, 그때부터 애나 엄마나 둘 다 고생이지 뭐.”

“고생이라도 좋아요. 다른 고생은 안 하고 싶은데 이 고생은 꼭 하

고 싶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아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거든요.”

 

7.

“큰일 났어요. 태호 씨가 공사현장에서 떨어졌대요. 어떡하죠? 빨리

가봐야 되겠어요.”

마침 토요일, 아들과 집에 있는데 다급한 소리로 소미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언젠가 소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아기가 생기면 식구가

하나 더 느니 태호가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이제 막 임신 3개월에 접어드는 소미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소미 씨, 기다려. 내가 자기한테 갈게. 그리고 병원부터 알아봐,

어느 병원인지?”

이렇게 말하고 간 지 15분도 채 안 되었는데 소미는 급하게 2층에

서 내려오다 층계를 헛디디면서 쓰러져 있었다. 소미에게 달려가자마

자 닥친 급작스런 상황에 뭣부터 해야 할 지 잠시 난감해졌다.

그렇지, 소미부터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생각하고 닥터 C에게 전화

를 하고 급히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뒷자리에서는 배를 움켜잡고 다

리를 든 채로 소미가 울고 있었다. 급한 상황에서도 뱃속의 아기를

지키려는 모정이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세운 채로 뒷자리에 누워 있

었던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얼굴이 하얗게 변한 소미의 모습

을 보는 순간 앗, 하면서 정신이 확 깼다. 내 뒷자리 시트에 피가 흥

건하게 고여 있던 것이다. ‘어쩌지, 안 되는데?’하면서 급히 응급실로

들어갔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닥터 C가 빠른 동작으로 소미를 눕게

하고 나를 잠깐 나가 있으라 했다. 밖에서 기다리는 10분의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수 있을까. 닥터 C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들

어오라 해서 들어갔다. 그때 울고 있던 소미는 천장을 응시한 채로

크게 한마디,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그런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가 났을까, 생전 소미의 목소리라고는 상상이 안 될 정

도의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개새끼, 용서할 수 없어. 다 죽여버릴 거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소미의 분노 웹관리자 2024.01.15 1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