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문
창문 밖에서 지구가 돌고 있다.
이만큼 살았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뻔해야 할터인데도, 매일매일 ‘오늘은?’ 마음을 조이는 나의 인생은 쳇바퀴를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가지, 그나마 나를 잠시라도 놓아주는 건 새로 이사온 집의 창문이다. 열 발걸음도 안되는 방 전체 넓이를 가로지르며 천장까지 닿는 창이다.
몇 달 전, 노년 준비의 첫 걸음으로, 30년 넘게 살던 집을 떠났다. 딸이 우리가 더 늙으면 자기집에 같이 살자고 했지만, 아직은 더 늙지가 않았으니,
일단은 임시라는 기분으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하는 새로운 고생에 눈코 뜰새가 없었다. 잠자리가 낯선 것이 제일 불편했다.
오랜 세월 자고 깨는 일은 규칙적이었다. 침대에 들때면, 셀폰으로 하는 의례가 있다. 우선 캔디 크러쉬라는 게임을 한다. 세상사를 잊고 게임을 하다가,
말똥말똥하면 인스타그램을 쭉 훑어본다. 훑어보는게 아니고 자세히 들여가 보다가 겨우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맞은편 벽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보며 점을 친다. 첫 유럽 여행 때 벼룩 시장에서 산 레이스 조각을 머리맡 작은 창에 걸어둔 것인데,
하늘하늘한 그림자가 환상적이다. 그림자가 선명하면 맑은날, 주홍빛이면 이른 아침, 아무런 그림자도 없으면 흐리거나 아니면 내가 늦게 깬 것이다.
애들 봐주시러 오신 친정 어머니가 새벽에 창문을 내다보며 ‘갈퀴 달과 비너스’, 즉 초생달 옆에 뜬 금성 이야기를 해도, 문학소녀의 감상이려니 했었다.
어느새 나도 새벽잠이 없어지던 날,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무심코 창문을 내다보고 ‘아 저거구나!’ 했다. 깜박이는 별과 실 눈썹 같은 달!
매일매일의 나의 아침은 창문으로 시작을 했다.
새 집에 와서는 침대 생활이 없어졌다. 좁은 집에서 남편이랑 부대끼기 싫어서 나의 공간을 리빙룸으로 정하고 바닥에 푸톤 식으로 잠자리를 만들었다.
어느날, 자려고 누워서 보니 창문 한 쪽에 둥그런 달이 떠있었다. 벽 하나 가득한 까만색 캔버스에 달 그림이 그려진듯 근사했다. 셀폰으로 카톡도 점검하고
인스타 그램도 보다가 다시 창을 바라보니, 달이 가운데로 옮겨와 있었다. 어머나, 고 잠깐 사이에 지구가 저만큼 돌았구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다가 다시 눈을 뜨니 달이 창 오른쪽 끝에 걸려있다. 아하. 세월이 이렇게 가고 있구나 했다. 내 눈으로 세월이 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새벽은 또 어떤가. 예전에 친정 어머니가 해가 저 뒷집 지붕 위에서 뜨다가 날이 갈수록 점점 남쪽으로 옮겨져 옆집 지붕 뒤에서 뜬다고 했었다.
이 좁은 아파트에서는 운이 좋으면 멀리 건물들 사이에 새빨간 점으로 해가 떠올라 나타나서 살살 퍼져가는 걸 감상한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본 그런 해다. 시야가 넓다.
눈이 오면, 옛날 살던 집에서는 부엌 뒷 문 앞 바베큐 테이블 위에 케이크 처럼 쌓인 눈을 보다가, 이 작은 아파트에서는 저멀리 다른 동네에 눈 덮인 지붕들까지
다 내려다 보인다. 그렇지. 세상이 내 눈앞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가며 깨우쳐 주는 듯 하다.
임시라면서 좁은 아파트로 옮겨와서, 내가 당분간 얹혀 살고 있는 지구를 한껏 느끼게 해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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