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웹관리자 2026.03.25 18:39 조회 수 : 23

 

창문

 

창문 밖에서 지구가 돌고 있다.

열 발걸음도 안되는 방 전체 넓이를 가로지르며 천장까지 닿는 창이다. 

원 베드룸 렌트 아파트.

얼만큼이나 여기서 살아야할지를 몰라서 보통은 2년 계약을 해야한다는데, 우선 1년 반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만큼 살았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뻔해야 할터인데도, 매일매일 ‘오늘은?’ 마음을 조이는 나의 인생은 쳇바퀴를 빠져 나오지 못한다. 세상돌아가는 데에 정해진 이치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가지, 그나마 나를 놓아주는 건 새로 이사온 아파트의 창문이다. 

 

몇 달 전, 30년 넘게 살던 집을 떠났다. 딸이 부모님이 더 늙으면 자기집에 같이 살아야 자기 마음이 편하다고 했지만, 아직은 더 늙지가 않았으니, 일단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수백가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자체가 낯설지만 그 중에서도 잠자리가 낯선 것이 제일 불편했다. 

 

자고 깨는 일은 비교적 규칙적이다. 침대에 들때면, 셀폰으로 하는 몇가지 의례가 있다. 자기 전에 셀폰을 보지 말라고 하지만, 자기 전에 온갖 세상사를 잊고 ‘캔디 크러쉬(Candy Crush) 게임을 한다. 그래도 말똥말똥하면 안봐도 되는 시시한 인스타그램을 멍청하게 쭉 훑어본다. 그러다가 잠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 앞 맞은편 벽에 드리우는 커튼 그림자로 하루를 점친다.  침대 머리 맡 창문에 달아 놓은, 맨처음 유럽 여행 갔을때 벼룩 시장에서 산 레이스 조각으로 만든 커튼이 그날 햇빛에 따라 주황색이거나 흰색 벽에 하늘하늘하게 회색빛 그림을 그린다. 아무런 그림자도 없으면 흐린 날이던지 내가 늦게 깬 것이다. 

 

애들 봐주시러 오셨던 친정 어머니가, 새벽에 창문으로 내다 보인  ‘갈퀴 달과 비너스’, 즉 초생달 옆에 뜬 금성 이야기를 해도, 문학소녀의 감상이려니 했었다. 언젠가 새벽에 눈이 떠지던 날,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무심코 창문을 내다보고 ‘아 저거구나!’ 했다. 깜박이는 별과 실 눈썹 같은 달! 

매일매일의 나의 아침은 창문으로 시작을 했다.

 

창문 생활은 아파트에서도 이어졌다. 남편이랑 부대끼기 싫어서  나의 공간을 리빙룸으로 정하고 바닥에 푸톤(Futon)식 잠자리를 만들었다. 어느날 자려고 누워서 보니 창문 한 쪽에 둥그런 달이 떠있었다. 벽 하나 가득한 까만색 캔버스에 달 그림이 그려진듯 근사했다. 셀폰으로 카톡도 점검하고 게임도 하다가  문득 다시 창을 바라보니, 달이 창 한 가운데로 옮겨와 있었다. 어머나, 고 잠깐 사이에 지구가 저만큼 돌았구나. 눈이 말똥해진다. 다시 셀폰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어본다. 좀 있다가 다시 보니 달이 약간 서쪽으로 가있다. 

어떨땐, 한잠을 자고나서 창문을 보면, 달이 창문 끄트머리에 걸려있을 때도 있다. 아하. 세월이 이렇게 가고 있구나 했다. 내 눈으로 세월이 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새벽은 또 어떤가. 예전에 친정 어머니가, 해가 북쪽의 뒷집 지붕 위에서 뜨다가 날이 갈수록 점점 남쪽으로 옮겨져 옆집 지붕 뒤에서 뜬다고 했었다. 이 아파트에서 새벽에 눈이 뜨일때 운이 좋으면 멀리 건물들 사이에 해가 새빨간 점으로 떠올라오는 걸 볼수 있다. 보고 있는 사이에 옅은 색으로 살살 하늘로 올라간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본 그런 해다. 

고층 아파트의 창문에서는 시야가 넓기만 하다. 눈이 오면, 옛날 살던 집에서는 부엌 뒷 문 앞 바베큐 테이블 위에 케이크 처럼 쌓인 눈을 보다가, 이 작은 아파트에서는 오히려 저멀리 다른 동네에 눈 덮인 지붕들까지 다 내려다 보인다. 그렇지. 세상이 내 눈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가며 깨우쳐 주는 듯 하다. 보이는 만큼이 나의 세상인 듯이. AI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쳐줘도 보이는 것 만이 내 것인양.

 

임시라면서 살고 있는 집에서, 내가 당분간 얹혀 살고 있는 지구를 느끼게 해준 나의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를 조용히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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