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풍경

웹관리자 2022.11.21 12:17 조회 수 : 15

사라지는 풍경

 

이춘희

 

볕 좋은 날, 하늘 아래 빨래 널린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뒷마당의 소나무 숲 사이로 걸린

빨래들이 바람에 ‘퍼득 퍼득’ 하는 소리 집안에 까지 들려온다. 빨랫줄은 내 유년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 누구나 빨랫줄을 사용하던 50년대, 어머니는 비오는 날만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빨래를 하셨다. 이른 아침부터 들려오는 빨래 방망이 소리, 두레박에 물을 길어다 나르는

출렁거리는 물소리는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정원이 꽤 넓었던 고향집에는 사철나무,소나무, 포도나무, 앵두나무, 장미등 사시사철 꽃이

피었다. 매미 우는 소리 요란한 여름날이면 마당을 가로 지른 빨랫줄에 속옷, 양말, 파자마,

바지, 블라우스 등 많은 식구들의 빨래가 늘상 빼곡히 차 있었다. 무거워 늘어진 빨랫줄을

지렛대로 받쳐주어야만 했다.

양잿물에 삶은 커다란 이불 호층이 빨랫줄에 걸리는 날이면 우리들은 호층 사이를 드나들며

숨바꼭질을 했다. 겨울이 되면 빨래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옷속에 집어 넣는 장난을 치면서

삭막한 겨울 마당을 뛰어다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잊을 수 없는 유년시절의 낭만이다.

꽁꽁 얼어붙은 빨래를 피려고 두손을 호호 불어가며 안간힘을 쓰시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강인한 그 생활력으로 우리 형제들은 부족한 것이 많은 가운데서도

구김살 없이 클 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한다. 내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다.

가끔 아버지가 낚시에서 낚아온 물고기들이 빨랫줄에 널려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생선

비린내가 온 마당을 채웠다. 우리집 진도개는 컹컹 짖어대며 껑충껑충 뛰어오르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게 하는 유쾌한 장면이다.

저물 녘,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집안에서는 이불 밑에 밥그릇을 묻어두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들의 소란과 다툼이 그치지 않았던 아늑한 내집, 그곳에는 석양에 불그스레 물든

빨래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을 광채처럼 빛나게 해주었던 빨랫줄,

그것은 빨래너는 기구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나를 지켜주는 보물단지 같은 것이었다.

빨래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면 언제 어디서건 가슴 뭉클해진다. 이태리 여행을 갔을 때

였다. 서로 닿을 듯 가깝게 마주하고 서 있는 아파트 건물들 사이에 있는 빨랫줄에 걸린

울긋불긋한 빨래들, 발코니마다 피어있는 보랏빛 팬지꽃,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서로

무어라 소리지르며 웃고 떠들고 있는 여인네들, 적나라한 삶의 풍경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이 부셔왔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빨래 너는 일은 하루 일과 중에 기다려지는 일중에 하나이다. 방금 세탁기에서 나온 물기

머금은 빨래들을 하나 하나 빨랫줄에 널면서 어수선한 생각을 정리한다. 햇빛을 받아

뽀송뽀송하게 마른 옷에서 나는 풀 냄새, 솔잎 냄새, 바람냄새를 맡으며 나도 푸르게 넓게

물들어 간다.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다.

무엇이든 내 주위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은 애틋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

순간이나마 순수하고 청초했던 유년시절의 나와 다시 만나는것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빨랫줄! 그 풍경을 그리워 하는 것은 비단 지난 날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리라.

사물도 사람도 기계처럼 살면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테크놀로지 시대에 우리는 정작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런지….

텅 비어 있는 뒷마당을 내다보며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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