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수필가 <이계향>美貌 그리고 文學>

- 미동부문인협회 초대 회장

 

최 정 자

 

1)설화(說話)로 본 미인(美人)의 영()과 욕()

 

나는 미인이 부럽다. 그것도 모자라 학문學文과 지략智略까지 갖추었다면 더욱더 부럽다.

예나 이제나 미인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어찌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있으랴. 예나 이제나 미인 앞에서라면 정치가는 물론 교육자도 종교인도 홀려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을 잃기 때문에......,

미인이라면 남자도 마찬가지다. 미남 배우들에게 빠지는 여자들, 미남이라면 전 세계 어디서나 여자들의 가슴을 애태우고 있다. 여자나 남자나 배우이건 아니건 어여쁘면, 인기와 돈과 명예가 쉽게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오래전 이계향선생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에 C라는 미남 교수가 있었단다. 그가 어찌나 미남이었던지, 그 학교 여학생들의 흠모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수업 시간이 되면 먼저 칠판에

나를 바라보지 말고 칠판을 바라보세요.”라는 글을 써 놓고서야 강의할 수 있었단다.

그런 그 미남 C교수도 이계향선생의 미모에 반했는지, 여자대학 여학생들이 흠모하던 그 교수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모든 버스 정류장마다 내려 공중전화로 이계향 선생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출근했단다.

당시는 대학교수도 버스로 출퇴근하던 시절이다. 전화기는 흔하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 구멍가게에 빨간 공중전화가 겨우 설치되어 있던 때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인 이야기를 해 보자.

-서울의 밝은 달이랑 밤 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해이고 둘은 뉘 해 인가

본시 내 해 다만 앗긴 것을 어찌할꼬.

신라 현강왕 때 처용處容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鄕歌.

신라의 노래다. 그렇지만 고려 때와 조선조 초기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연극으로 불리는 노래 <처용가處容歌>.

역신疫神에게 마누라를 빼앗긴 처용, 신라 현강왕이 나들이를 나섰다가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을 데려다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미녀를 아내로 맞게 하고 벼슬을 주었다. 처용이 무슨 뛰어난 실력자였든지, 아니면 그의 배경으로 나라에 크게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었든지, 아무튼 처용을 잡아놓기 위해 아름다운 여자와 살게 했다. 그 처용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녀를, 그 유부녀를 역병疫病의 신이 흠모했다. 흠모하다 못해 처용이 없는 밤을 노려 그녀의 몸을 범했다. 이 감당 못할 역병疫病의 신은 누구였을까?

게다가 기막힌 일은 처용에게 역병의 신이 집집마다 대문마다 처용의 화상을 붙여놓게 한 것이다. 처용의 화상만 보고도 다시는 얼씬하지 않겠다는 약조였다. 그것은 처용을 마누라 빼앗긴 놈으로 동네방네 처용 스스로 광고하게 만든 것이다. 과연 처용은 바보였을까?

 

-자줏빛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 놓으시고

나를 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제 33대 성덕왕 때 강릉 태수가 된 순정공이 경주에서 강릉으로 부임하는 도중, 그의 부인인 신라 최고의 미인 <수로부인>은 용에게도 구렁이에게도 납치되었다가 풀려난다. 그러면서 바위 위에 핀 꽃을 탐하다가 지나가던 노인의 <헌화가>를 받는다. 미인이라면 삼라만상이, 용과 구렁이와 노인이, 모두 탐하였다는 후세의 기록에 남는 <노인헌화가>까지 받는다.

여기서 꽃을 꺾어 바친다. 라는 말은 옛말 <곶이다>로 해석해서 대단한 음사淫辭로 해석한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선화공주님은 善花公主主隱 (선화공주주은)

남몰래 얼어 두고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서동방을 밤에 薯童房乙夜矣 (서동방을야의)

몰래 안고 간다. 卯乙抱遣去如 (묘을포견거여)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향가 14수 중 한 수인 데, 백제 30대 무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마()장수 시절,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로 간다. 서라벌의 아이들을 꾀어 위와 같은 동요를 지어 부르게 한다. 장안에 퍼진 노래로 해서 쫓겨난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왕비로 삼는다.

선화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타국의 거칠 것 없는 왕자가 계략을 꾸며 사랑을 이루어야 했을까? <얼어 두고><얼다><교합하다.>라는 우리의 옛말, 역시 음사淫辭라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뛰어난 미녀 이야기가 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후처였으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여대왕>, 그녀는 졸본 부여사람으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손자 우태優台와 결혼한다.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고 남편 우태가 죽는다. 그녀는 졸본으로 도망쳐 온 주몽 즉 동명성왕과 재혼한다. 주몽이 졸본에서 고구려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왕비가 된다. 주몽은 왕비 <소서노>도 그녀의 소생도 사랑하지만 전 처의 아들, 즉 자기 친아들이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정한다.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난 <소서노>는 동명성왕인 주몽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간다. 남쪽에 당도하여 작은아들 <온조>와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운다. -

세계사를 통틀어 두 차례나 나라를 창건한 여성 시조는 오직 <소서노>여대왕 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뛰어난 미녀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수필가 이계향李桂香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인美人이다.

내가 대단한 사가史家라도 되는 양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들추며 장황하게 미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나는 처음 이 글을 어느 불교 잡지사로부터 청탁받고 거절했다. 나는 선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노라. 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나의 거절은 선생도 원고 청탁자도 당황했다.

선생이 미인이기에 겪어야 했을 질시와 영화를 내가 어찌 다 알겠는가? 혹여 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빙산氷山에 일각一角일 터, “나는 아는 게 없다가 정답이라면 어찌 선생에 대한 글을 써서 오히려 선생을 욕되게 하겠는가? 또한 미인은 미인으로 족할진대 무슨 이야기로 군더더기를 만들고 사족蛇足을 붙이랴.

 

제백사除百事하고 실은 내가 선생의 적수敵手가 못 된다는 것이다.

선생은 내가 갖지 못한 미인이라는 사실이 그 첫째요. 세계사와 중국 역사와 우리나라 고대사와 현대사를 넘나들며 문화의 전반을 펼치는 해박한 지식이 그 둘째요. 그 해박한 지식으로 면면히 써 내려가는 문장력이 그 셋째다.

선생이 쓴 글에서 한시漢詩를 인용한 대목을 읽노라면 그만 화가 치민다. 샘이 나서 견딜 수 없다.

그럼에 도 불고 하고 나는 끝내 이 글을 쓴다. 결국 선생의 글 <이계향전집>에서 발췌한 이야기로 시작과 끝을 맺는 그런 글을 말이다.

 

2) 이계향의 삶.

 

중국의 용정龍井 땅은 무슨 징조였는지? 그해 초여름은 유난히 녹음이 짙었다. 그만큼 꽃들이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맺었다. 그중에 산야에서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새색시의 고운 자태를 닮은 자귀나무꽃은 내숭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잠자리 날개와도 같은 맵시로 나뭇잎 위에 올라앉아 사람들을 매혹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928616일 그곳 용정에서는 가히 한 세기를 뒤흔들만한 어여쁜 여자아이가 조선조朝鮮祖 이씨李氏가문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으로 태어난다.

이계향李桂香,

여자아이는 자랄수록 더욱 아름답고 더욱 총명했다.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함께 선사했다. 어여쁨만으로도 충분한데, 제가 할 일을 제가 알아서 하는 책임감 또한 분명했다. 결국 소녀 가장이 되어 자신보다 가족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 일찌감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의 아버지는 8대 독자 외동아들이었다. 할아버지가 함경북도 청진에서 제세병원濟世病院 이라는 아주 유명한 한방병원 원장이었으므로 아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어른이 된 부잣집 8대 독자 외동아들은 화려한 왕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찍이 생모와 이별하는 고통을 겪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할 굳건한 왕자의 자리였는데 마귀의 장난에는 어쩔 수 없었다.

선생의 아버지는 어려서 할머니 등에 업혀 외갓집에 갔다가 그만 감기에 걸렸다.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에게 8대 독자를 감기 들게 했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내쫓김을 당했다.

할머니를 내쫓은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후손을 많이 볼 줄 알고 이미 아이들이 줄줄이 딸린, 아이 잘 낳게 생긴 여자를 계모로 앉혀놓고, 계모의 농간弄奸을 받아들여 끝내 선생의 아버지를 중국의 용정龍井 땅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용정으로 쫓겨난 선생의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살았다.

그런 때 이계향선생의 오빠와 선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생모를 이별한 괴로움과 생부에게 버림받았다는 원망은 선생의 아버지에게 편안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 아버지의 괴로움은 선생 아버지를 방랑자로 만들었다. 객지로만 떠돌아다니게 했다. 집에 있는 날보다 차가운 땅 러시아로 유랑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객지로 떠돌면 떠돌수록 가슴속의 한이 더 큰 한을 불러왔다. 깊고 검은 아버지의 눈동자 속은 더욱 슬프고 애절한 것들이 쌓여있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거나 한학과 서화書畵에 몰두하여 밤을 지새우며 몸을 혹사했다.

그런 선생 집은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용정에서 할빈으로 북안 등지로 옮겨 살았다. 만주에서 중국 북부지방으로 다시 이사하려던 해에 8.15 해방을 맞았다. 선생네는 고국 청진으로 돌아왔다.

해방은 되었지만 어수선한 나라 사정으로 함께 살던 언니 내외가 먼저 서울로 갔다. 뒤이어 어머니가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월남했다. 월남한 어머니가 다시 아버지와 이계향선생을 데리러 왔는데, 러시아말을 잘했던 아버지는 통역관으로 북한당국의 감시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짓을 보며 아버지만을 남긴 채 선생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왔다.

 

서울로 온 후 스물한 살의 오빠가 죽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선생의 가족을 보살피던 유일한 남자, 언니의 남편, 형부마저 돌아가셨다.

어머니 와, 언니 와, 여동생 과, 그리고 선생, 네 명의 여자만 남은 선생의 가족,

다 키운 9대 독자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몸부림, 남편을 잃은 언니의 통곡, 깜깜한 아버지의 소식.....,

살아남은 네 명의 여자에게 닥친 것은 슬픔보다 더한 막막한 생계였다.

꽃 같은 열일곱 살의 꿈 많은 처녀, 이계향 선생은 그 나이에 가장이 되어 야했다. 어머니와 언니를 위로해야 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선생은 이를 악물었다.

 

미군정청 경무부, 해방 후 광화문 중앙청(지금은 헐려 광화문이 다시 복원된 자리)에 들어섰던 정부 기관에서 여직원을 모집했다.

한국말보다 일본말이나 중국말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선생은 여직원 모집에 응시 합격했다. 세 명 모집에 백 명도 더 지원했던 자리에 선생이 합격한 것은 분명히 미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경무부 부장은 유석維石 趙炳玉박사였고 경무부 차장은 최경진崔慶進씨였다. 선생은 경무부 부장 조병옥박사의 관방官房에서 일을 시작했다.

경무부 부장인 조병옥박사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생겼다. 웃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게, 사납게 생기고 웃을 줄 모르던 경무부 부장 조병옥박사가 선생을 보면 미소를 지었다. 경무부 차장은 지프차를 보내주고 출퇴근을 도와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보다 또 다른 생애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선생이었다. 매 주말이면 중앙청 뒤뜰(현 경복궁 뜰)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선생은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이계향 선생이 마음만 먹었다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 없었다면, 선생은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에 관비로 유학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랬다면 선생은 지금 또 다른 모습의 선생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생애는 지금에서 아주 먼 방향의 아주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가족들을 위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선생은 경무부 출입 기자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다. 조병옥 박사와 가깝다는 이유였다. 출퇴근하던 지프차를 보고 조병옥박사의 지프차가 새벽에 이계향선생 집 앞에 있더라고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또 어떤 사건이 나면 거기에 연루시키기도 했다. 난감한 처지도 여러 번 겪었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세상일이 승승장구 잘 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결국 선생은 경무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는 여전했다. 선생은 명동에서 6개월간 다방茶房을 경영한 적이 있다. 그로 해서 말쟁이들은 다방레지였다고 비하하는 이가 있다. 믿어주고 염려해주고 도와주는 이가 더 많아 선생은 흔들림 없이 살아냈다.

 

6.25사변이 나자 인민군에 끌려가기도 했다. 조병옥박사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다. 조박사를 찾아오겠다. 거짓말을 하고 풀려나와 어머니와 언니와 여동생과 네 모녀가 도망치듯 피난을 갔다가 9.28 수복을 맞았다.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내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를 보았다는 사람의 말만 듣고 선생은 남포동 뒷골목을 샅샅이 뒤져 아버지를 찾아냈다.

겨우 찾아낸 아버지는 풍류객도, 로맨티스트도, 한학자漢學者, 아닌 멋쟁이는 양복쟁이는 더더욱 아닌 처참한 몰골의 거지 같은 초췌한 남자일 뿐이었다.

부산에서 아버지와 서울로 환도한 선생네는 오빠의 뼈를 수습 이장하고 손수 비문을 쓰고 묘비를 세웠다. 선생은 그 비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조선조朝鮮祖 이씨李氏 가문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임을 알았다. 선생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온갖 한탄이 강물처럼 굽이치는 세월 속에, 인간 못지않게 대자연을 벗 삼고, 고독한 생활을 스스로 택하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끝내 불운에 몰려 오십구 세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

 

-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을 일- 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던 부산 피난 시절, 선생은 어떤 이와 선을 보았다. 그렇게 만난 남편 김원규사장, 열여덟 살이나 더 나이 많은 신랑과 피난지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선생은 새색시가 되었다.

삼촌 중에 한 분이 부자였던 선생의 남편 김원규사장은 열아홉 살에 함흥으로 가서 삼촌의 후원을 받고 큰 부자가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삼대 재벌이 있었는데, <청진에 설경동> <서울에 박흥식> <함흥에 김원규>였다고 한다. 김원규가 선생의 남편이다.

선생의 남편은 수산업을 하는 부자여서 한 때 그의 별명은 <한국의 오나시스>였다. 수산업을 시작하고, 수산업을 발전시키고, 수산업에 공헌했지만 결국 그 수산업 실패의 충격으로 쓰러져 그는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선생은 남편과 나이 차가 많았으므로 전처의 자녀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혹자가 잘못 알고 험담하는 것처럼, 선생은 후처로 정식 결혼식을 올린 부인일진대 첩은 아니다.

자유당 시절 선생의 남편은 3대와 4대 국회의원을 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조병옥박사를 다시 만나는데, 조 박사는 야당 의원으로 선생의 남편은 여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면 선생의 집에 모여 마작하며 정초를 즐겼다. 그랬기 때문에 더러는 선생 남편의 돈이 조병옥 박사가 속해있는 야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가는가, 조사받기도 했다.

 

서울 종로 가회동 3층인 석조건물의 거대한 집에서 이른 아침 말을 타고 나오는 절세가인絶世佳人, 선생을 보면 선생이 남편 있는 여자임에도 인근 남자들의 가슴은 힘찬 말발굽보다 더 힘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지금도 그때의 일들을 고백하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있으므로......,

선생의 첫사랑은 어땠을까? 누구였을까? 한 생을 통하여 선생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또한 어떤 이였을까?

선생은 일흔일곱 희수喜壽를 넘겼다. 그런데도 아직 선생의 미모에는 흘러간 사랑 이야기들이 엿보였다.

어느 날 황혼 녘에 서창西窓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선생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졸라 보았다. 대답이 없다.

나는 다만, 한때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했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선생의 꽃다운 열일곱 살 처녀 시절, 그들 중 어떤 이가 선생의 첫사랑이었을까? 상상해 볼 뿐이다.

그것은 선생이 결혼하자 <사랑의 배신자>라는 원망의 편지를 수없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미인이었기에 받는 유혹들, 유혹 뒤에 오는 질시와 감당 못할 어떤 소문들, 그것들을 선생은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선생은 홀로된 어머니에 대한 효성 또한 남달랐다. 어머니를 생전에 모시고 살았을 뿐 아니라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

선생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한 서린 삶을 사신 분이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이모슬하에서 자랐다.

부와 명예로만 이어진 할아버지의 가문에서는 넉넉한 집에서 공부한 콧대 높은 처녀는 쓸모없다고, 길주명천吉州明川, 조그만 농촌에서 이모 슬하에 자란 외로운 어머니를 며느리로 삼았다. 외척이 득세할까 두려워 부모조차 없는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삼은 흥선대원군처럼 친척 없는 며느리를 들인 것이다.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가 도시의 신식 아버지를 만나 아들 셋, 딸 셋을 낳았다. 하지만 일찍 생모의 품을 잃고 계모의 학대 속에 끝내는 할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버지의 고통은 너무 깊었다.

그런 아버지는 외로움의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머니를 건져주지 못했다.

세월이 가도 어머니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참담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맏아들을 다섯 살에, 막내아들을 세 살에, 가운데 아들이며 선생의 바로 위 오빠는 8.15해방 직후 스물한 살에 참적慘迹시킨 때문이다.

이계향 선생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 묘에 합장했다. 그리고 선생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고기를 사십구일 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노래를 듣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궤연几筵을 사십구일 간 모셨다. 칠칠일마다 스님을 모셔 재 올리고 언니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렸다.

선생의 어머니가 노래를 좋아하셔서 그랬던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선생이 부르는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 그토록 선생이 노래를 잘 부른 이유는 선생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미 알려진 선생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는 많다.

한국 불교계의 어른이던 <승산스님>이 미국에 잠시 다니러 왔다가 파란 눈의 곱슬머리들을 삭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던가, 모모한 스님들이 뉴욕에 오면 무엇이든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어디 스님들뿐인가, 문단의 내 노라. 하는 분들도 오면 선생님을 찾았고 안내받았다 한다.

오늘도 선생의 세월 속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3) 이계향 문학.

 

천구백육십 년대 <자유문학>(지금의 <자유문학>은 그때의 <자유문학>이 아니다.) 당시의 자유문학현대문학은 대학의 문예창작 교제로 쓰였다. 나는 그런 문학지에서 읽은 수필로 선생의 이름을 접했지만 뚜렷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가 뉴욕으로 이민 와 선생의 회갑 기념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중공에 다녀왔습니다.><나무아미타불>이라는 선집 두 권을 받았다.

당시에는 <중국>이 아닌 <중공>이라 불린 국가 중국, 그 나라는 공산국가여서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로 밖에 기억하지 못했던 나라, 중공에 다녀왔다는 기록은 놀라웠다. 이민의 낯설음에 시달리면서 그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단지 나는 이민의 낯설음을 이기기 위해서만 그 책들을 읽었을까? 아니다.

 

선생은 흘러간 인물들을 멋대로 골라 스승으로 혹은 연인으로 만들어 놓고, 함께 울고 웃는 글을 쓴다. 미국에 온 어떤 스님의 소식을 한국에 전하는 표현의 글을 읽으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무엇 하고 있나? - 이렇게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떠나온 고국과 친구가 그립다고 애만 태우고 허송세월하고 있었으니? 반성했다. 반성한 나는 시집서울로...’를 준비했다.

 

-홍진紅塵 세계의 욕염慾念을 초승超承 하신 스님 모습은 약간 비대하신 도체道體에 한국에서처럼 회색 법복法服 차림으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그 고매高邁 하신 도풍道風을 미 대륙에 떨치고 계십니다. -

-또 눈을 감습니다. 단숨에 천장구만리天長九萬里를 훨훨 날아 고국에 갑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택幽宅을 남겨놓고 이국 사리를 떠나오던 날, 슬프고 슬퍼서 못 견디겠던 날이었습니다. 황량한 하늘로 나를 실은 비행기가 폭음인지 통곡인지 알 수 없는 진동을 남기며 떠나온 조국......, 어언 여러 성상星霜이 흘렀습니다.

 

<이 마음 푸른 파도>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느 시인과 일 년간 교신한 편지다.

옛 철학자 노자老子 장자莊子는 말할 것 없고, 두보杜甫의 시, 이백李白의 시또한 말할 것 없고, 또 당시唐詩들도 두루 읊조리는 편지의 사연은 마치 판소리의 노래가락 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길게 짧게 높게 얕게 빠르게 느리게......, 자진모리 휘모리 중모리 중중모리......, 그렇게 이어졌다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글솜씨,

 

<이계향 전집>을 본 사람 중에 책을 몇 쪽 펼치다가 말았다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평소 선생이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어떤 여자는 자기 친구에게 <책 공해>라고까지 비난했다고 한다. 그 여자는 전집의 방대함에 질려 포기한 것이 아니다. 글은 읽지도 않고 화려한 사진과 사진에 나온 배경 인물들만 보고 기분 나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자기 자랑하면 싫어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기 가족 자랑하면 팔불출八不出 이라고 했다.

부자이기를 바라면서 부자를 미워하고, 미인이기를 바라면서 미인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이계향 전집을 읽지 않은 이들은 손해 본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데 이계향 전집에는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운 표현으로 누구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겨우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사진과 선생 자신의 자랑으로 보이는 사사로운 이야기만을 읽고 포기했으니 말이다.

나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있었다. 사진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으로 충분한데 자랑이 지나친 상황설명이나 표현은 왜 했을까? 무슨 옷을 입었다는 말 같은 것, 그러다 보니 나도 사진을 그냥 넘겨버렸다.

또 가장 조심해야 하는 수필이 갖는 오류다. 신변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기 자랑, 자식 자랑에 치우친다. 작가는 그것을 배제해야 함에도 불고 하고 간간이 그걸 놓친다. 게다가 모든 독자는 손윗사람으로 생각하고 글을 써라.라고 배웠을 텐데,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과 나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습관이었을까? 몰라서일까?

글에서 남편 지칭하기를 높임말을 썼다는 어떤 이의 비난이다. 방대한 작품 중에 얼마 안 되는 초기작과 가족사의 작품들은 맨 뒤로해야 할 편집의 잘못 때문도 있다. 일부 독자의 비난을 사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

 

다시 말하거니와 선생의 문학, 96책의 <이계향전집>은 페이지마다 마디마디 적절하게 인용한 일화로 재미있다. 감동스럽다.

읽노라면 어느새 미인이나 부자로 살았던 자랑을 일삼는 한 여자에 대한 질투는 사라진다.

<부운의 변두리> <세월의 그림자>를 보고 <이 마음 푸른 파도>를 보면 누가 이만한 지식으로 이만한 문장력을 구사하고 글을 쓰겠는가?

 

<춘추 전국시대><한국의 고전문학에 핀 한국수필>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중국 궁중에서 일어난, 왕과 후궁들과의 교활하고 비참하다 못해 처참한 이야기들, 우리나라 왕조에서 본 왕자의 난이나 후궁들의 시샘은 아무것도 아니다.

장희빈의 악랄함은 고조의 애첩을 <사람돼지>로 만든 여태후呂太后,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인 측천무후則天武后, 왕이 사랑하는 애첩들의 궁에 불 질러 몰살시킨 서태후西太后에 비하면 새의 발에 피다. 다시 일어나 앉아서 <時空>를 읽어본다. 지식의 보물 창고가 그곳에 있다.

기행문을 쓰면서 인류의 발상지라는 중국의 주구점周口店에 가기 전에,

-시대를 대별, 지구 탄생 이후 약25억 년 전까지의 시생대始生代에서 원생대原生代, 캄브리아대, 고생대古生代, 중생대中生代, 신생대新生代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층地層 속의 화석化石에 의해 대, , 로 세분하고 인류도 원인猿人, 원인原人, 구인舊人, 新人으로 구분되는 - 등등의 공부를 했다니 놀라웠다.

 

어느 학벌學閥 높은 문인이 그만한 지식이 있어 무사독학無師獨學한 선생을 따라가겠는가?

한국 문단 어른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괜한 겉치레의 칭찬이 아니었다. 주석註釋 달기와 찾아보기(index)를 넣어 컴퓨터나 사전을 볼 필요 없이 그대로 책을 편하게 읽도록 한 것 또한 남다른 실력이라고 본다.

 

다음은 한국 문단 어른들이 선생에게 한 이야기를 요약해본다.

 

돌아가신 시인 모윤숙毛允淑,

-자기의 평범한 행복에만 만족하지 않고 신변에서 오고 가는 내적 향수를 값지게 매만진다. 형식의 행복, 물질에 더 높은 경지로 끌고 가는 힘은 무엇일까? 하는 그의 고민을 그의 책은 잘 설명해준다. 불심佛心의 고요한 향불 앞에서 자기를 승화시키고 싶은 충동도 말하고 있다.-

수필가 전숙희田淑禧,

-그를 아는 이는 누구나 먼저 움직이는 표정의 그 아름다운 용모를 생각한다. 그다음은 그의 비범한 노래 솜씨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가까운 이들은 그의 용모나 노래 이상의 유창한 편지 솜씨와 그 달필에 깊은 정을 느낀다. 눈물도 웃음도 많은 다정다감한 여인이다.-

 

성균관대학교 교수이며 문학평론가 윤병로尹柄魯,

-뜨거운 연서戀書를 연상케 하기도 하고, 해박한 중국 고사가 삽화처럼 흥미진진하게 엮어져서 참으로 중후한 서간체 문장을 실감케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서간문과 달리 인사치레의 소식이 아니라, 이국異國에서 겪는 작가의 주변 사를 생생하게 전하면서도, 한 장의 편지마다 새로운 화제를 진지하고 흥미 있게 담아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

 

언론인이며 작가인 송지영宋志英,

-많은 찬사를 받아 온 것은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감각의 섬세함이나, 날카로움에도 있었지만,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서 동양의 마음을 잊지 않고 그 깊숙한 뿌리를 더듬어 찾으려는 자세에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끌린 것이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아득한 옛날로부터의 놀랍고 희한한 자취들을 추려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슬을 꿰는 것 같은 글들이다. 읽어가노라면 구수한 재미는 말할 나위도 없고 우리가 모르고 있던 동양의 마음, 동양의 지혜, 동양의 살아온 모습을 꿰뚫어 알게 되는 즐거움이 더욱 클 줄 믿는다. -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문학을 전공한 송지영宋志英 선생보다 이계향李桂香이 중국을 더 잘 안다고......,

 

문학평론가이며 전 한성대 총장이던 元亨甲,

-철저한 조사 분석을 거친 후에 글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인 식견에 근거를 둔 고전古典들의 해석에는 심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 작가의 고전에 근거를 둔 문장의 전개들은 그것이 심각하면 할수록, 가혹하면 할수록, 우리의 이성적 판단력을 몽롱하게 흐려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식견이나 판단을 멈춘 채 멍청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순순한 창작물 이상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제3의 경지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元亨甲선생은 <시공의 서>에서

영화 속의 서부 개척 시대 개척정신이, 엉뚱하게도 한과 고독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재미 한국 작가의 손으로 중국대륙에 서려 있는 고색창연한 고전들의 땀내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이계향>의 수필 솜씨란 말 할 것도 없이 마담 보바리를 다룬 플로베르나, 카츄사를 시베리아 유형 장까지 찾아다니며 지켜본 톨스토이만큼이나 냉철한 리얼리즘 소설작법이다. 그 냉철한 소설작법을 수필가 <이계향>은 자기 자신의 수필 세계에 도입하고 있다.

마치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내가, 꿈속의 나를, 시종일관 구석구석까지 지켜보는 것처럼......, -

 

극작가이며 예술원 회원인 신봉승辛奉承,

-미국과 중국의 국토와 인구를 비교해보면서 21세기의 문명사적文明史的인 흐름을 예견하고 있다. 자신이 돌아보고 있는 중국 문화유적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우리 역사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그만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뇌리에 새겨 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다. 예컨대 심양瀋陽에서는 병자호란 때 이른바 전범戰犯으로 끌려가서 조선 선비의 기개를 펼쳐 보이면서 장렬히 순사殉死한 삼학사三學士를 비롯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극을 가슴 저린 심정으로 토로한다던가,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에 이르러서는 중국문화에만 심취되지 아니하고 우리 역사와 연관하여 그쪽의 문물을 살피고 있는 역사 인식의 실상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문장은 참으로 놀라운 탐구가 아닐 수 없다.

운치韻致를 아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을 누리면서 중국을 돌아보고 있다. 정말로 종횡무진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신봉승辛奉承 선생은,

의유당 김씨意幽堂 金氏가 쓴 동명일기東溟日記의 경우, 그 글은 규방의 여인이 쓴 것이지만, 그야말로 문학을 업으로 하는 문필가의 경지를 훨씬 넘어서는 미문과 진솔함을 함께 간직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런 명문이라면 자신의 전집에 등재하는 것으로 글을 선별하는 안목을 충분히 과시한 것 일텐데도, 구태여 그 글의 가치를 논한 학자들, 이를테면 가람 이병기李秉岐를 비롯하여, 정병욱鄭炳昱, 장덕순張德順 등의 논거를 모두 섭렵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놓고야 직성이 풀리는 빈틈없는 역사 인식이다. 그런 역사 인식의 구사야말로 자신이 언급하는 모든 것을 진실되게 하는 고증考證의 기반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지난 30년간 무사독학無師獨學으로 공부했다.”는 이계향여사의 역사를 읽는 시각은 참으로 불가사의 할 만큼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숙종조肅宗朝의 역사를 통사적 개념通史的槪念으로라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현왕후전>에 기술된 내용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나는 <이계향>선생의 문학과 삶을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더듬었다. 끝내 남은 의문은 미인의 삶을 찾아 떠도는 소문, 그 영과 욕은 설화 속의 일일 뿐인가?

얼마 전에 워싱턴DC에서 선생에게 한 노신사가 다가와 여러 통의 편지를 건넸다. 알고 보니 -포토맥강가를 거닐면서도 생각한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간지러운 연애편지였다.

내가 선생의 전집을 읽고 썼던 졸작拙作 를 옮기고 이 글의 끝을 맺는다.

 

<높이곰 돋으사 머리곰 비취오시라>

-이계향 전집을 읽고 古稀 출판기념회에서

 

-“대관大官의 존함은 누구십니까?”

나의 성은 칭가요

천하 선지식善知識을 달아보는 칭가秤哥란 말이요

! 그러면 그것이 몇 근이나 됩니까?”

소동파蘇東坡가 오도송悟道頌을 짓기 전에

안하무인하고 오만 무례하던 시절에

승호선사承皓禪師를 만나던 이야기

몸은 살았으나 마음은 죽어 발걸음을 되돌리며 깨달았던 이야기

때로는 기원전 중국의 여인들과 울며 웃다가

때로는 조선조의 아낙들과 울며 웃다가

다시 고려조로 올라가 선사님들을 만나 선 문 답을 하다가

춘추 전국시대를 넘나들다가

아침에 초나라에 가 붙고, 저녁에 진나라에 가 붙는

나라의 정치 외교에 허허 타가

구석구석 깊은 곳에 숨어 사는 음모와 배신

죄 없이 멸족당하는 가문에 몸부림치는 선비이다가

웃고 울며 오르락내리락 하던 발자취

대한민국으로 와서

정치의 거목 조병옥趙炳玉박사 곁에서 다소곳하다가

다시 어제는 전자방田子方, 오늘은 노중련魯仲連, 내일은 범려范蠡,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인생역정,

산정과 계곡으로 냇물과 바닷물로 웃음과 눈물로 그리고

그리고, 폭포 같은 사랑으로

옛 어른들이 지은 옛시조로 멋을 내면서

심금을 울리면서 가슴을 조이면서

선사禪師들의 유유거래悠悠去來로 중국의 고사古史로 살면서

누구시더라?

알 듯 말 듯 한 그의 님은 누구시더라?

애타고 안타깝던 그의 사랑은 누구시더라?

언뜻언뜻 다가서는 그림자 찬 바람 부는 깊고 깊은 밤

서창西窓을 열어놓고 떨면서 눈물 흘리다가도

다시 생로병사의 인간 고뇌에 젖어 들며

청천 하늘 그 푸르고 서늘한 기운에 몸을 맡기고

기쁨이 너무 크면 눈물이 나고

슬픔이 너무 크면 웃음이 나고

그리움이 너무 크면 원망이 서리는 여인,

모모한 대학도 박사학위도 없이 무사독학無師獨學한 실력으로

쌓아 올린 문장력,

글자 한 자, 한 자, 몸에 남은 한 방울의 피를 짜내어 썼다는 글에는

속이지 마라. 얼굴을 맞대고 간언하라.”는 공자孔子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난다.”는 노자老子의 말씀도 있습니다.

황황급급遑遑急急하던 육이오 전쟁 때 육군 작가 단의 명단이 있고

공군 작가 단의 명단이 있고

문학사 자료의 대답이 있는 문학 사전

거기에서 <이계향 전집>에서

이 가을 매창梅窓의 옛시조 한 수가 가슴을 에고 있습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 시의 제목: 백제 향가 <정읍사>의 첫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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