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감사합니다, 용서하세요

웹관리자 2023.02.22 21:59 조회 수 : 25

 

아버지 감사합니다, 용서하세요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가 서울의 한 병원에서 길고도 짧은 인생을 외롭고 고통스럽게 작별하신 날.

이미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어제 같은 날입니다.

 

저는 뉴욕에서 그 처절한 소식을 둘째 오빠로부터 연락받고 밤새 뜬눈으로 새우다가 다음 날

유독히도 햇빛 찬란한 맨해튼 거리로 나와 한 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파트 길 건너에

성당이 하나 있지만, 아버지 천당 가시는 길이 낯설고 두려울까 봐 같이 손 잡고 걸어가고 싶어 좀 더

떨어진 5애비뉴의 성 패트릭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소란하고 어지러운 맨해튼 거리를 슬픔에

젖어 아버지와 어정어정 걸어갔고, 이른 오후의 그리 붐비지 않는 성당에서 먼저 떠나신 어머니와

상봉하셨을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나오니 조금 위안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맨해튼의 한 아담한 카페에 앉아 핫초콜릿에 치즈 샌드위치를 시켜 놓고 제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랩톱 컴퓨터를 꺼내서 글을 이어 가겠어요. 아버지, 웃지 마세요. 저는 가끔 기회가 되면 점심

시간이 지났을 때 어느 카페에 들어와서 이렇게 글을 쓰곤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즐거운 고독 아닌 고독의 시간이라고 할까요? 이제 먼저 이야기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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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편하고 널찍한 집에서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수십 년 전 우리 조국이 악랄한

일본 식민 쇠사슬에서 해방되면서 아버지는 불어나는 가족을 서울 도렴동의 아늑한 한옥에서 한강

바로 너머의 야산 기슭에 넓고 넓은 정원을 끼고 있는 커다란 저택으로 옮겼습니다. 이사한 후 7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각종 꽃나무와 수목이 무성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키 큰 꽃나무

두 그루를 사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꽃나무를 정원에 심어 놓고 저에게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영자야, 목련화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세월은 강물같이 흘러갔고 세상이 몇 번 바뀐 지금인데, 한 가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일은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어딘가 슬픔에 차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 글이 끝나기 전에 다시 되돌아보겠지만, 제가 이혼한 후 센트럴파크를 홀로 쏘다닐 때 그와 똑같은

빨간 목련꽃을 발견했답니다. 이 목련나무는 아버지 것보다도 훨씬 더 컸지만 아버지의 자색 목련꽃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핸드백에서 카메라를 꺼내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두었지요.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제가 써 놓은 시와 함께 이 책에 올렸습니다.

 

<천송이 목련화(A Thousand Magnolias)>는 항상 부모님께 못다한 사랑과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어느 날

짧은 영시 몇 줄이 제 가슴에 뿌드듯 뭉켜 왔습니다. 어찌 한글이 아니고 영어로 먼저 썼냐고

하시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른 첫 단어가 영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한편 제

마음이 정적인 상태에서 첫머리가 한글로 나오게 되는 경우에는 그대로 한글로 이어 가게 되는데,

물론 글이라는 게 쉽게 써지는 일은 거의 없지요. 어쨌든 이중 언어로 창작하는 데는 어떤 공식도

없지만, 아마도 저의 정서적인 자세와 언어, 그리고 두뇌의 심바이오틱(Symbiotic)한 상호 작용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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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헤아릴 수 없는 참극과 수많은 주검과 파괴를 초래했는데, 우리 집의 전쟁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여기에 슬픈 이야기가 또 하나 있으나 나중으로 밀고, 그 대신 시큼하고

떫은 이야기 하나 드릴게요.

 

한때 어머니는 일하는 아줌마도 없이 가끔 편찮으셔서 오빠들 조반을 제가 만들어 먼저들 먹고

나가게 했기 때문에, 저는 다니던 경희대학의 첫 강의 시간을 자주 빠지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동설한 겨울에는 버스 타고 회기동 끝 정거장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 내려 조용하고 따뜻한

영국대사관 도서관에 들어가서 영어 소설을 읽다가 또 강의를 빼먹곤 해서 결국 몇 학점을 채우지

못하고 영문과 수료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후회도 없고, 단지 어머니를 도울 수 있었음이

저의 기쁨이었으며, 제가 영국대사관 도서관에서 문학집을 들춰 보면서 터득한 것은 저의 숨은 자질이

영어와 문학에 있다고 스스로 자만했답니다.

 

그뿐이겠어요? 제가 이화여고 3학년 때 ‘미세스 버지니아 맨’이라는 훌륭한 영어회화 과외반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이 미국으로 돌아가신 후에 저와 한두 번 편지를 교환한 적이 있었어요.

편지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제가 열심히 영어사전을 들춰 보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그분으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왔는데, 그 안에는 영문학의 거장인 랄프 왈도 에머슨·나타니엘

호손·펄벅·키플링 등의 책들이 한 권씩 들어 있었어요.

 

아, 얼마나 숭고하고 값진 선물이었는지요! 저는 고맙다는 편지를 했고,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소식이

끊어졌지만 ‘미세스 버지니아 맨’은 저에게 영문학의 꿈을 키워 주신 영원한 은인이십니다. 제가

실제로 그 책들을 전부 읽은 것 같지는 않으나, 그 영광의 선물은 저로 하여금 언젠가는 미국에 가서

영어로 글도 짓고 직장을 찾아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아마도 제가 이렇게 꿈을 꾸며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더욱 더 동생들에게 무심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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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수십 년 전에 아버님이 저에게 선물로 보내 주신 십자가를 여기에 올리오니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먼저 떠나버린 제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받으소서!

 

(“천송이 목련화”의 “아버지께 드리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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