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대륙횡단
LA 동생네가 차를 운전하여 뉴욕으로 왔다.
미국 구경이 아니고 30 년 넘게 살던 LA를 떠나 이사를 온 것이다.
짐은 컨테이너로 부쳤으니, ‘이김에 거대한 땅덩어리 곳곳을 여행하듯이 오라’고 동생에게 말 했다.
누구나 한 번은 해보고 싶어 하는 대륙횡단이 아닌가.
이민 초기, 뉴욕에서 서부로 이사 가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산 교육 을 시키겠다며 미국을 지그재그로 횡단해 갔다.
내게도 저런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바로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미국 땅을 가로질러 갔었다. 뉴욕서 시카고까지는 기차를 탔기 때문에
세미(Semi)횡단이지만, ‘로키 마운틴 하이’ 죤 덴버의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산길, 황야의 무 법자가 달리는 광활한 들판, TV 광고에서나 보던 아슬아슬한 절벽 길을
실제로 운전해 다녀 본 것이다. 덕분에 생전 처음 라스베가스도 가봤고, 나파 벨리 와이너리에서 와인도 마셨다.
대륙횡단 경험자로서 동생에게 현명하고 완벽한 충고를 해준 것이다.
“얘, 이제 여기 눌러 앉을 건데,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냐. 천천 히 와라.” 외할머니가 쓰시던 말, 이북 사투리로 ‘놀메 놀메’ 오라는 것이다.
“응, 그럴 게 언니.” 그동안 LA 집 파는 일, 40년 묵은 이삿짐 싸는 일로 녹초가 되었을 동생의 목소리가 가냘프다. 게다가 차로 운전해오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니까 제발 더 슬슬 놀면서 오라는 말이다.
대학 졸업하고 금방 LA에서 결혼해 살던 동생과는 견우직녀보다도 더 만나지 못하며 살았다. 동쪽에서 바라보는 서쪽 끝 - 피붙이 하나 없는 곳 - 에 살고 있는
내 동생이 늘 애처롭기만 했다. 이제 그 온갖 사연을 남겨두고 남편이랑 같이 새살림 차려보려고 감행해 오는 용감 한 동생이다.
아무래도 며칠은 언니 집에서 눈치 보며 지낼 텐데,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대륙횡단을, 평생 굳을 대로 굳어졌을 부부관 계에, 좀 유치하지만,
로맨스그레이의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로맨스 그레이라면, 뉴욕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다.
혼자가 된 한국 남자들에 비해 무척 독립적인 80대 할아버지가 벌써 몇 년째 캘리포니아 여성과 사귀며 1년에 한 번씩 LA를 다녀오셨다.
그런데 올해는 자동차를 미리 보내 놓고, 나중에 그 차를 타고 뉴욕까지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 여성이랑.
“그 여자가 운전 잘하니까 번갈아 가면서 하면 되지.”라면서. 두 남 녀의 3,000마일 대륙횡단이 과연 어떻게 전개가 될까?
드디어. LA를 떠났다고 한 동생이 얼마 안 가서 자동차가 고장 났다고 하더니 어느새 중부에 다 와있었고, 어느 날 느닷없이 필라델피아라고 하더니
금방 또 “언니, 여기 뉴저지야” 한다. “뭐라고? 우리 집 까지 몇 시간 걸린다고 나오니?” ‘큰일 났네, 집 좀 치워야겠다.’했는데,
갑자기 “언니, 타판지 브리지 가 보이는데.”라 한다. 고생고생한 얼굴로 들어서는 동생에게 “아이구. 니네는 자로 긋듯이 대륙을 횡단했구나.”했다.
자기 아이들만큼이 나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두 마리 데리고 웬만한 식당에도 못 들어 갔 을 뿐 아니라, 강아지 허락하는 호텔도 드물어서,
그야말로 차안에서 생활하면서, 어서 빨리 뉴욕에 가야지 일편단심으로 쏜 살처럼 운전 해 온 것이다.
그 옛날 서부개척사도 아니고 이런 동부개척사가 있을 줄이야.
나의 반쪽짜리 대륙횡단은 짐도 없이, 운전시간, 먹는 장소, 호텔, 에어비엔비가 미리미리 잘 짜여 있었고,
일본과 유럽의 오른쪽 운전으로도 쌩쌩 달리는 친구가 운전을 거의 다 맡아서 했는데도,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할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는데.
LA에서 못다 한 사연을 잔뜩 짊어지고 독하게 마음먹고 오는 동생 에게, 세상에, 슬슬 놀면서 천천히 오라고, 무섭게 다그쳐댄 언니라니.
나무가 많은 집에서 폭설 걱정을 하던 동생 네가 맞이한 뉴욕의 첫 겨울은 LA에서 못 보던 눈 경치 사진 찍으며 즐겁게 구경할 만큼밖에 눈이 없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언니 찾아 삼만리’ 동생과 함께 유럽으로 자동차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내 친구가 아기자기 산동네 마을들을 노련하게 달릴 테니, 우리는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놀메놀메' 대륙을 횡단해 오실, 그레이 로멘스 견우와 직녀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