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집

웹관리자 2022.12.01 12:36 조회 수 : 21

엄마의 집

 

“ 아니, 아침은 언제 만들려고 마당만 치우고 있는거요? 일어났으면 부엌으로 들어가야지, 어째

마당으로 나가는지 모르겠네..” 아버지는 늘 불만이었다.

그랬다. 엄마는 밤새 어질러진 집 안팎이 정리되어야 부엌을 들어갔다. 당신 성격에 흐트러진

주변을 그냥 두고 잠자리에 들지도 못할 터, 지저분해서가 아니었다. 아침 염불을 끝낸 후에는

치울 것이 있든 없든 일단 앞마당부터 나가 봐야 했다. 집 한 바퀴 돌며 점검이 끝나면 세수하며

간단한 목욕탕 물청소가 이어지고.. 드디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엄마!

노년의 부모님은 그렇게 조반 준비 문제로 티격태격하며 매일 아침을 시작하더니 결국엔 아침

준비는 아버지의 몫이 되어 버렸다.

사업하는 사위는 절대 안 볼 거라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질리게 한 오르락 내리락 했던 남편의 사업

치닥꺼리, 일 년 열두 달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 종가 맏종부 노릇, 그리고

시집살이, 올망졸망 자식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던 엄마의 삶에서 울컥 울컥 밀려 올라오는

덩어리들이 밤마다 토악질하듯 쏟아져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던 걸까?

 

엄마의 시어머니는 늘 어린 손녀딸에게 그러셨다. “세상천지에 니 에미같이 별난 여자는 봐도 봐도

첨 봤다! “난 그런 할머니가 미웠다. 당신이 치워 주는 것도 아니면서 깨끗하고 정돈 된 우리 집이

왜 엄마의 흠이 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엄마의 일상은 뭐든

완벽했다.

부엌의 냄비는 반짝반짝 윤이 안 나면 그날로 아줌마는 바뀌고, 화장실은 늘 아침, 저녁 물세례를

받아야 했고, 문갑 위의 먼지는 절대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방바닥 구들은 불이 잘 들어오는 지,

대청마루가 휘지는 않았는 지, 철마다 드는 햇살의 조도를 맞추기 위해 커튼은 바꿔야 하고,

장독대는 신줏단지 모시듯 매일 닦아대셨다. 집은 엄마에게 ‘사당’ 같은 곳이었다. 한시라도

늘어질까 팽팽하게 잡아 붙들고 있는 당신의 정신줄이었다.

그렇게 쓸고 닦고 하시는 동안, 당신의 공연 무대가 펼쳐진다. 기분이 괜찮은 날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 부터 패티킴의 ‘이별’로 이어지는 ‘쇼쇼쇼’ 무대가 펼쳐지고, 마음이 시끄러운 날은

어느 연극 무대에도 없는 긴 독백이 당신 특유의 목청으로 한없이 이어졌다.

집 전체가 당신의 지휘봉에 맞춰 제자리 사열이 멋지게 끝나면 이제는 엄마가 흐트러지는

시간이다. 방바닥에 털썩, 등을 대고 드러누우면서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다는 음성으로

쏟아내시는 탄성, “하! 내 집이 최고네!”

 

여섯 살 때 살던 청파동 집 이후, 내가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해도 다섯 손가락으로는 모자란다.

엄마는 집에 집착이 많았다. 당신은 적어도 이런 집에는 살아야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항상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집을 옮겨 다니면서도 엄마는 자식 육 남매 모두 덕수국민학교를 나와야 한다며, 남의

주소를 빌려서까지 나를 불광동에서 광화문까지 통학을 시켰다. 덕분에 난 문 안의 학교에

다니면서 어릴 적부터 시내 분위기를 꽤 즐길 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유독 주택을 고집했던 엄마였다. 엄마의 인생 모노드라마 리허설이 시작되면 늘 듣는 대목이 있다.

선생님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사업가로 변신한 아버지가 잘나가던 시절엔 문갑 밑으로

금덩어리를 넣어 놓고 살았다고. 시어머니와 시누들 등쌀에 맘 놓고 누리지는 못했었지만, 그때는

봉우리에 앉아 있는 줄 몰랐어서 내려올 길이 있을거란 계산을 못 했단다. 당주동 저택에서 미제로

둘러싸여 키워진 갓난아기였던 내가 기억하는 청파동 집은 그러니까 내리막길이었던 거다.

재산이 쌓이면서 시어머니의 심술과 시누들의 극성이 심해지는 저택에서 살기가 엄마는 꽤

힘들었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그 공간에서 남편의 부재였다. 들어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던 당신의 막장 드라마 부분은 막내딸인 내가 유일한 청취자다. 언니

오빠들은 그 시절 엄마가 얼마나 엄했던지 기억조차 하기 싫다고 했다. 한량 기질이 가득했던

멋쟁이 아버지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달씩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소식만 던진 채 집을 비웠다.

당주동 집을 지키는 일은 이제 당신의 자존심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명분이 되었다. 연락이 끊어진

남편을 대신해 아이 다섯을 데리고 집을 옮겨야 할 때도 엄마는 마당이 있는 집을 고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문에 아버지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문패가 달려 있어야 했다. 문패가 있어야

대주(大主)가 있는 것을 알리고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그 문패를 보고 아버지가 집을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엄마는 그 당시에는 하루 중 밤이 제일 좋았다고 했다. 일하는 아줌마들은 젊은 새댁이 그런 말을

부끄럼도 없이 한다고 놀리더란다, 남의 속도 모르고. 일을 안 해도 되는 그 밤이면 당신 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좋은 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던 거였다. 어느 밤엔 다시

교단으로 돌아간 김 선생님, 어느 밤엔 시어머니한테 또박또박 따지며 시댁을 보란 듯이 떠났다.

집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향해 잘살아 보라고,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당차게 말하고 입을 꼭

다문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여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던 밤. 엄마는 수십 번, 집을 뛰쳐나가는

‘노라’가 되었다. 밤새 대본을 쓰다가 맞이하는 아침은 리허설조차 욕심낼 수 없는 얼음장 같은

현실이었다.

그렇게 밤에 떠나고, 아침이면 돌아와 버리는 여행을 엄마는 쉰이 가까울 때까지 했었다고 한다.

다섯 아이의 얼굴이 오롯이 맞대고 밥상 앞에 앉을 때,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대본은 벌써 아궁이

속 불쏘시개로 재가 되었다. 아버지는 방랑을 끝내고 문패 달린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남동생이 태어난 뒤로 더 이상 집을 떠나지 않으셨다.

철이 들고 깨달은 사실이지만 청파동에서 녹번동으로 마당이 있는 집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아래채를 양보하기도 했고 대구에서 유학 올라온 사촌 형제들을 집에서 돌보기도 했다.

더는 힘들었던 것일까? 내가 단발머리 여중생이던 어느 날, 엄마는 우리 가족을 이끌고

비포장도로의 버스 길 옆으로 배추밭이 있는 강남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아파트에서 살며 두

 

언니는 결혼했고 두 오빠는 해외 연수로, 군 복무로 모두 점점이 엄마의 일상에서 떨어져 나갈 때

즈음, 엄마도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비록 이삼일에서 길어야 일 주일짜리 가출이긴 했지만, 그저

엄마가 워낙 온천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방에서 하던 기도를 절에 가서 하고 오는 거라 알았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엄마는 당신의 일상으로 덤덤히 돌아와 치우고, 쓸고, 닦았다.

엄마 나이만큼 살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당신 마음 속 공터에 빈 집 한 채 지으러 갔던 것을.

갑갑한 닭장 같던 아파트 생활이 뜨끈한 보일러, 더운물이 종일 나오는 편리한 생활로 익숙해질

즈음, 내가 회사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배추밭에서 이제는 부촌의 상징인 강남을

떠나 ‘마당이 있는 집’을 위해 다시 강북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화단의 목련 나무를 돌봐야 하고,

뒷마당 광을 수리해야 했으며, 벽지를 바꾸면 때갈 맞는 커튼을 만들기 위해 포목전도 가 봐야

했다. 당신의 사당을 되돌려 받은 듯 온 정성을 다하는 열성에 아버지는 묵묵히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십여 년 아파트 생활에 묻혀있던 대리석 문패는 제 자리를 차지하여 햇살에 반짝거렸다.

두 분은 막내딸마저 집을 떠나자 큰집을 포기하고 큰딸, 작은아들 가까이 약수터가 있다는

상도동으로 이사하였고 약수터 집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지켜드렸다.

아버지가 떠난 집에 혼자 있기 힘들어 하던 엄마는 분당 아파트로 이사하는 큰딸 대신 벚꽃 나무가

있는 언니 집을 지켜주러 들어갔다. 다시 엄마의 맹활약이 필요한 집으로. 대주를 잃은 엄마를

지탱해 줄 명분이 뭔지 큰언니는 알았던 거다.

이제 엄마의 기억은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처럼 스러지고 있다.

당신의 마지막 ‘사당’은 벚꽃 나무도 없고 문패도 달 수 없는 5층 빌라로 둔갑했다.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은 어느 집일까? 지금 누워 있는 요양원 방을 당신 집이라 여기고 있을까?

평생 집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했던 엄마는 시력도, 말도 잃어 가고 있다. 보고픈 모습들도, 하고픈

말도 뇌리에서만 맴돌 뿐, 집으로 가겠다는 의지는 엄마의 눈빛에서만 남아 촛불처럼 떨고 있다.

엄마는 지금 어떤 집을 꿈꾸고 있을까..내가 대신 그려 본다.

우선 남쪽으로 향한 현관 앞에는 따뜻한 햇살 받으며 문패대신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을 거다.

그 집에서는 삼복더위같이 뜨겁던 울화도, 북풍 설한의 에이는 아픔도 없는 꽃바람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양지바른 화단에 당신 속에 있는 기쁨, 당신 속에 있는 슬픔 모두 내려놓으면

분꽃으로, 채송화로 피어날 거다. 밤마다 떠났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창가에는 당신만을 위한

안락의자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거다.

이 집은 엄마가 지켜야 할 집이 아니라 엄마를 온전히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엄마의 집’이다.

06.0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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