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밥상인줄 알았소

웹관리자 2022.12.01 12:37 조회 수 : 26

우리들 밥상인줄 알았소

 

지난가을, 앞마당에서 뒷마당으로 종일 해가 떠나지 않는 이 집이 너무 좋아 이사를 했다. 겨울을

나며 몇 달을 지내면서 우리는 뒤 뜰이 사슴 가족들의 안방인 줄 알았다. 그네들은 온 가족이

군락을 이루며 아침저녁으로 와, 잔디가 저들의 침대인 양 털썩 주저앉아 안식을 취한다. 로빈이며

블루제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주변으로 날아들고, 때론 여우도 지나간다. 모습이 마치

초원의 한 풍경 같다. 우리 내외는 평화로운 이 풍경에 감탄하며 다가올 봄에는 꽃도 좀 더 심고,

과일나무를 많이 심자고 꿈에 부풀었었다. 3월부터 묘목을 보러 다니다 드디어 사과나무와

배나무, 체리나무를 사 왔다. 그리고 철쭉이며 백합이 너무 아름드리 피었길래 그것도 덥석 사다가

사월 한 달 내내 정원사 노동을 했다. 텃밭을 만들 거라고 상추, 고추, 호박, 깻잎 모종도 심어 놓고

이 채소들이 과연 토끼 때문에 우리 입까지 오려나 웃으며 걱정했다. 남편은 ‘같이 나눠 먹지 뭐..’

했다. 며칠이 지나고 밤사이 유난스레 바람이 심했던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먼저 나와 마당을 둘러

보던 남편이 나를 바라보며 “당신 좋아하는 백합이 바람에 꽃이 다 떨어졌네” 한다. “그래요?”

서둘러 앞 마당을 보니 아니 그 많던 백합 아홉 그루의 꽃이 몽땅 사라졌네! 설마… 하고 다가가

보니 범인은 바람이 아니라 사슴이었다. 2피트가 넘는 큰 키의 백합이 모두 반 동강이가 난 게

아닌가. “아니 이놈들이…” 너무 화가 났지만 이웃집들이 왜 수선화만 잔뜩 심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재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틀 밤이 지난 아침에는 배나무가 아주 결딴이 나

있었다. 꽃이 한창 피어 그 밑으로 레몬 씨만 한 배 열매들이 가냘프게 달려 있었는데 그만 뱉어 낸

포도 씨처럼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고 어린 가지들은 패잔병처럼 누워 있다. 그날 저녁 퇴근하여 와

보니 이번에는 사과나무 마저 린치를 당했다. 아직 이파리가 돋지 못하고 더디 핀다 싶던

체리나무만 앞마당에서 앙상한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손에 쥔 풍선을 놓친 아이 마음이 이럴까?

망연자실, 허탈하여 멍하니 나무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더스 데이, 브런치 하기에 딱 좋을 만큼 햇살이 화사했다. 비가 올 거라고, 그래서 오전에는 흐릴

거라던 기상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고 얼굴을 드러낸 햇볕을 즐기며 식구들은 모여 앉아 느긋한

식사를 즐긴다. 화제는 ‘사슴’!

우리처럼 정원을 열심히 만들어 놓은 막내 시누네도 사슴들 때문에 전전긍긍한다고 했다. 사슴이

싫어하는 코요테 오줌이 들어간 흙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약도 있으니 사서 뿌려 놓으라고 한다.

“그러게.. 아니 초원 같은 풍경은 좋았는데.. 멀찌감치 놀러 올 때는 예쁘기만 하더니.. 칠 수만

있다면 싸리 빗자루로 몹시 세게 후려쳐 주고 싶은 심정이네.”

큰 시누네는 팰리세이드 파크웨이에서 운전하다가 사슴을 쳤다고 했다. “ 달리다가 설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상황이었어요. 뒤돌아보니 못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도착해 보니 차가 앞이 다 부서진 거예요. 그러니까 무거운 마음은 싹

사라지고 아니 이 나쁜 놈! 하면서 화가 막 나더라구요.”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요리조리 바뀌는 내 맘을 늘 변명하며 살았지만 이처럼 안면 바꾸며 화가

나기도 드문 일이었다. 원래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게 인생사 아니던가!

 

배 한 박스, 사과 한 상자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외양간을 고쳐봐야겠다 싶어 코요테 흙도 사다

뿌리고 사슴이 싫어한다는 방향제도 나무에 달아 놓았다. 약효가 얼마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슴들의 항변이 뒤뜰 끄트머리에서 들려온다.

“여보시오, 주인 양반! 당신이 풍경이 좋다고 우리를 위해 차려 놓은 밥상인 줄 알았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 Q13 버스 웹관리자 2022.12.01 50
4 바퀴 달린 화 웹관리자 2022.12.01 27
3 웹관리자 2022.12.01 23
» 우리들 밥상인줄 알았소 웹관리자 2022.12.01 26
1 엄마의 집 웹관리자 2022.12.01 2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