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달린 화

웹관리자 2022.12.01 12:41 조회 수 : 27

바퀴 달린 화

 

진우는 오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우가 입을 여는 시간은 노래 시간이다. 노래는 따라 한다.

노래를 좋아해서인지, 적어도 노래하는 동안은 다른 아이들의 소리와 섞여 자신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우는 한국어 학교에 다니는 일이 그다지 신나는 일이

아니지만, 지연이 하는 대로 따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연은 진우의 누나다. 혈연이

아닌 그저 각자 입양되어 남매가 되었다. 누나 지연은 얼굴에 표정이 없다. 최소한의 대답으로

본인을 알린다. 그렇게 남매는 묵언과 무표정으로 토요일 아침 수업이 짜증스럽다고 전한다.

건우는 언제나 심통을 부리며 수업을 방해한다. 토요일 아침 카툰도 못 보고 이웃의 다른

친구들은 축구하러 가는데, 저만 두시간을 차 속에 갇혀 오는 이 한국어 학교가 너무 싫은 거다.

그래서 늘 화가 나 있다.

나는 삼, 사십 분 먼저 나와 수업 준비를 한다. 교실이 협소하여 저녁 성인반 책상을 치우고

아이들 의자와 책상으로 정렬해야 한다. 칠판에는 수업할 내용을 미리 기재하고, 프린트물도

카피해 놓는다. 그리고 노래 시간을 위한 오르간을 펼쳐 놓으면 그 날의 수업 준비 완료.

맨하탄 32가 빌딩 9층에 자리한 한국 문화 재단의 입양인 한국학교에서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공부한다. 미국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음식을 먹여 주며 문화 체험을 위해 한국을 간다.

하은, 지연, 진우, 리나, 수민, 건우.. 모두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들이다. 나이는 7살에서 12살

사이. 지연과 진우의 엄마, 제인은 남매의 소리 없는 불만이 마음 아파 한 번씩 눈물로 씻어낸다고

한다. 건우 엄마는 심술이 나서 툴툴거릴 때마다 아이와 말씨름을 하고 꼭 이겨서 데리고 온단다.

다음 주면 어느새 봄학기가 끝나는 토요일이다. 건우, 수민의 가족은 일찍 휴가를 가기 때문에

다음 주에 못 온다고 했다. 나는 한 주 당겨 여름 방학 숙제를 준비해 왔다.

드디어 노래 시간에 건우의 활화산이 터졌다.

“선생님, David(건우) doesn’t sing and he’s kicking my chair” 땡깡을 부리던 건우는 리나의

고자질에 그만 폭발해 버린 듯 벌떡 일어나 리나의 의자를 밀쳐 버리고 리나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다리가 아프다고, 리나는 바닥에서 꼼짝도 못 한다고 울어 젖혀 댄다. 건우는 화가

좀 가라앉자 그제야 저가 벌려 놓은 상황에 겁이 나는지 나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여전히

빨간색을 본 투우장의 소처럼 코에서는 콧바람이 씩씩 나오고 있는 채로.

리나는 발목을 절뚝거리며 귀갓길 ‘우리집’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해결을 보고, 건우는

엄마가 픽업해서 먼저 집에 귀가하는 거로 한 학기 내내 품고 있던 화 덩어리를 풀어 한바탕

소동을 마무리한다.

금요일 저녁이면 다음 날의 수업 준비에 마음이 늘 긴장된다. 토요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이지만

머릿속 에서는 일주일 내내 다음 수업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시계 톱니처럼 생각이

끊임없이 째깍거린다. 병원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또 다른 일터, 주부라는 가운이 기다리고

 

있다. 식구들의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하는 동안 수업 준비에 마음이 급해서일까, 슬금슬금

짜증이 올라온다. 올라오는 짜증을 눌러 앉히려 애써보다가 그냥 싱크대 안으로 쏟아붓는다.

그릇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꽈당꽈당 던져놓고 비누 거품을 잔뜩 풀어 박박 문질러대고 수돗물을

세게 틀어 세상에 더 없는 폭력적인 설거지를 마친다. 내려가는 물길 속에 바작거리는 사기

조각들이 있는 걸 보면 상처받은 그릇들이 몇 개 나오겠다. 마음 하나 못 다스리는가, 자책이

들면서 그릇이 아까워진다. ‘돈 내면 그릇 깨뜨리면서 스트레스 풀게 하는 곳도 있다던데...’

책상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차분히 숨을 고르고 오피스 걸에서, 주부에서, 선생님으로 유니폼을

바꿔 입는다. 밤 10시, 책상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컴퓨터에 파워를 넣는다. 이번 금요일은 수업

준비와 여름 방학 숙제 패키지를 함께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준비를 다

마치고 프린트를 하며 보니 어느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잠자리에 드는데 남편이 잠꼬대 같은

소리로 불평을 한다. “일찍 좀 자지, 잠이 부족해서 내일 어쩌려고…” 난 못 들은 척 등을 돌리고

눕는다. 남편은 나의 토요일의 외도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도움 없이 진료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터이니. 하지만 아이들이 좋고 가르치는 일도 좋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오늘은 아침을 안 먹은 채 4시간 수업을 마치고 나니 뱃가죽이 등가죽에 가서 붙은 느낌이다.

운전하는 동안 밀려오는 허기를 채우기에는 그저 김밥이 최고다. 김밥집에서 매운 참치김밥 한

줄을 샀다.

김밥집 옆에 전에 못 보던 선물 가게가 생겼다. 안 그래도 다음 주 종강 시간에 줄 선물을

마련해야 하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32가 거리가 북적거리기에는 아직은

이른 시간대라서 그런지 가게 안은 아무도 없다. 캐쉬 대에 어린 아가씨만 덩그러니 앉아 넓은

가게를 부둥켜 앉고 있다. 나는 천천히 헬로키티 문구에서 시작해 작은 장식품들 선반까지

살피다 작은 모래시계를 보고 내가 하는 호흡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문을

열고 나오려 하는데 캐쉬 대에 있던 아가씨가 용수철처럼 튕겨 나와 나를 막는다.

“ 손님, 백 좀 보여주세요!”, 그녀의 갑작스럽고 황당한 요구에 수면 부족과 허기진 상태의 멀뚱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 아니 왜요? 제 백은 왜 보자고 하시는 거지요?” “ 손님이 만지던

모래시계가 없어졌잖아요.” 그제야 난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다. 설마 내가 그런 좀도둑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최대한

교양있게 대처하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아가씨, 그 작은 모래시계, 내가 구경하고

제자리에 놓았는데요.. 잘 살펴보세요.” “제가 선반을 확인했어요.. 없다구요!” “

아니 이 봐요. 아가씨, 다시 한번 가서 보세요, 다른 곳을 봤나 보네요. 난 거기에 놔두고 왔어요.

같이 가 봐요” 가서 보니 모래시계는 거기에 있었다. 점원은 물건을 보더니 이제 되었다는

표정으로 “ 아, 여기 있네요” 그리고 끝이다! 사과도 없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는 더더욱

기대할 표정도 아닌 채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지친 몸 뒷머리 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가 느껴지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하세요,

뭐 이따위 매너로 손님을 대하나? 점원 교육을 어떻게 시켜 논건가? 싱갱이 소리에 어디서 한

남자가 나온다. “ 무슨 일이가요?” 주인은 자초지종을 듣자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졸지에 도둑

 

취급을 당한 분이 안 풀린 나는 “뭐 저런 점원이 있으면 손님이 오겠어요? 물건을 팔기는커녕

손님을 쫓고 있으니, 원..”

한바탕 난리를 치루고 가게를 나서니 전신에서 허물이 벗겨 나가듯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주차해 놓은 곳까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와서 차에 오르니 눈에서 핑그르르 물이 떨어진다.

‘아니 이건 또 뭐야?, 무슨 눈물까지? 그렇게 화가 났었나..’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진다.

‘너무 허기가 져서 이상해 진 거야 내가… 김밥을 먹자!’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먹으며

시동을 걸고 5 애비뉴를 돌아 웨스트 하이웨이로 들어선다.

입하(立夏)의 오 월, 허드슨강물은 신록만큼 싱그럽게 출렁이고 있다. 운전하며 집어 먹다 보니

어느새 김밥을 다 먹었다. 속이 차니 배터리 바꿔 준 깜빡이 인형 눈처럼 머리에 불이 찰칵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자 마음마저 김밥으로 채워진 걸까, 가슴도 무거워진다.

‘뭐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어린 아가씨를 일자리에서 쫓겨나게 한 건 아닐까..’

허친슨 파크웨이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어린 아가씨한테 부렸던 화가 나를 향해 슬금슬금

굴러온다. ‘나이 값도 못하고 어린 아가씨한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조금 더 참고 이런

경우에는 손님에게 사과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거라고 주의를 주면 될 것을. 잠시

좀도둑 취급받은 것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 분하게 씩씩거렸을까..’ 나를 향한 화는 더 빨리

불어난다.

연록의 나뭇잎들이 산들거리는 바람을 유혹하듯 살랑거리며 애교를 떤다. 사이사이 햇살이

부서져 들어와 신록을 흩트려 놓는지 시선을 몽롱하게 한다. 내 차는 파크웨이 엑시트를

빠져나와 마마로넥 로드로 들어왔다. 콜로니얼 로드로 좌회전만 하면 우리 집이다. 좌회전도

했는데, 우리 집 앞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네.. 아, 집에 다 왔네.. 그리고 콰당!

내가 도착한 곳은 다섯 번째 우리 집 앞이 아닌 세번째 집 새로 이사 온 마크의 핸디 맨 트럭

뒤꽁무니였다. 시선을 몽롱하게 한 건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씩씩거리며 쏟아냈던 화 덩어리가

매운 참치김밥의 식곤증과 엉켜 잠시 잠깐 나를 셧다운 시켰던 거다.

마크가 나온다. 차 문을 열고 묻는다. “Are you Ok?” “마크, 눈 깜짝할 만큼만 졸았었나 봐

내가…” 순간, 저만치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보이고 저기까지 가서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싶고, 자신의 분에 지쳐 사고를 낸 한심한 상황이 한편

또 화 덩어리를 빚는다.

의자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어져 있다. 최근에 찾아낸 Chuck Mangione 의

Feel So Good 씨디가 구석에 처박혀 있네, 저거 망가지면 안 되는데… 친절한 마크는 날 집

앞까지 에스코트해 주고 차도 드라이브 웨이에 갖다준다. 그리고 하는 말 “ that’s nice CD, I like

Chuck too!” ‘저 씨디를 들었다면 기분이 좋아져서 사고가 안 났을까?’

다행히 핸디 맨 트럭은 상한 데 없이 멀쩡하다. 하지만 지난달 페이먼트를 다 끝낸 우리 차는 앞의

후드가 심상치 않다.( 결국 폐차했지만). 남편에게 사고를 알리고 까부러져 잠이 들었다.

남편이 그사이 집에 와 차를 확인하고 들어 왔다. “ 몸은 괜찮아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다. 나는 방귀 뀐 놈이 되어 마구 성을 냈다. 거기에 왜 차를 세워

 

놨는지 모르겠다고, 차만 없으면 내가 잠깐 눈을 깜박했어도 부딪힐 일이 없는데. 나한테로

향했던 화 덩어리는 남편에게로 마구 굴러가고 있다. 굴러오는 화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남편은 자신의 화를 움켜쥔 채 오피스에 다시 가봐야 한다며 나가버린다.

공자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 중에 안회라는 제자가 있다. 그의 대단한 행동 중의 한 가지가 불천노(

不遷怒)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화를 옮기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배움을 몸에 익혀 둔 제자가

요절을 했을 때 공자가 하늘을 향해 한탄했다고 한다. 그만큼 실천하기 힘든 인품을 가진

제자이기 때문일 거다. 그 어려운 불천노를 지켜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대부분이다. 오늘은 아주 큰 실패를 했다!

모두 가슴에 화로 만들어진 굴렁쇠 하나씩 품고 산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다. 종로에서 뺨 맞은 일은 종로에서 그냥 해결해야 하는

거다. 한강까지 굴러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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