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관리자 2022.12.01 12:40 조회 수 : 23

- 너 -

 

열일곱.

너는 백합 속에 파묻혀 죽음만큼 깊은 잠을 자고 싶어 했어.

열 일곱 살 때는 그렇게 죽고 싶었던 거야. Y와 S, 그리고 너, 모두 자살 예찬에 빠져 있었지.

넌 그들에게 말했지, “우리가 생에서 완전한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때인 거야..” M은 너의 그런 도발적 사고에 찬사와 감동을 쏟아내며 너를 우러러보다시피 했었어.

그 아인 너희들의 겉멋만 부러웠던 거였어. 다다르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꿈들로 괴로워 하던

갈등이 보이지 않았겠지.

원하지도 않았던 대학, 부모가 원하던 전공을 공부해야 했을 때는 장대 위에 앉지도 않은 채

맴도는 잠자리 마냥 그 시공간의 언저리에서 뱅그르르, 뱅그르르. 그래서 넌 늘 어지럽다고 했지.

대학 삼학년.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던 넌, 산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고 했어. 함께 산행하던 리더 아저씨는 큰일 낼 아가씨라며 몸을 잡아채듯 일행들에게 끌고

가는데, 그저 순순히, 터벅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갔지만 너의 눈동자에는 계곡 아래 융단처럼

뒤덮인 초록이 가득했었어. 거기에, 툭!, 몸을 던지면 온몸에 스며들 나무 향기가 숨 속에 파고드는

듯하다고.. 그 뒤로 덕유산으로, 지리산으로, 소금강으로, 산을 찾아다녔어.. ‘너’를 맡아 줄 곳을

찾아야겠다고.

야누스.

단골 카페 문을 밀면 문 위에 풍경처럼 달려있던 야누스의 얼굴이 덜렁거렸지.

들어갈 적마다 너의 무리는 킥킥거리며 말했어. “우리의 두 얼굴이 심히 흔들린다.. 살살 열어..”

그때마다 넌 중얼거렸어.. “두 얼굴만 되면 성공이지.. 아마도 족히 열 얼굴은 감추고 있을 텐데..”

탄광의 굉음처럼 찢어질 듯 울리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후반부가 실내를 꽉꽉

채우고 있었어. 컴컴한 구석 자리에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몇 시간을 감춰진 열

얼굴을 끄집어내려고 끙끙거려 봤지만 언제나 허탕 질이었다. 위스키 한 방울 탄 커피는 탁자

위에서 떠나지를 않고.

어디에도 진실은 보이지 않았고 사이비만이 유령처럼 떠다니던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력함에 휩싸여 너를 드러내기 조차 힘들었던 80년대는 너의 무리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어.

Lee’s PR & Research.

사무실 시계가 여섯 시 오분 전이 되자 비서 미스 유는 사장만 퇴근하면 튀어 나갈 자세로 조바심을

누르느라 책상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한 채 앉아 있고, 올드 미스 타이피스트 미스 김은 립스틱을

꺼내 예의 빨강색 루즈를 입술에 덧칠하며 네게 묻는다. “ 미스 박은 퇴근 안 할 거에요? 뭘 그렇게

잔뜩 펼쳐 놓고 있어요? 난 오늘은 타이핑 더 못해요, 야근 안 할거라구요..”

 

“알아요...“ 멍한 눈빛으로 책상을 내려다보며 맥없이 대답했다. 넌 대충 서류를 폴더에 밀어 넣고

슬리퍼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었다. 빌딩을 나서니 퇴근하는 사람들의 물결로 저녁 공기가

부산스럽다. 그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발을 내디뎠다.

어디로 가나?.. 생각 없는 발은 이미 광교 횡단 보도를 건너 무교동 낙지 골목으로 들어섰다. 벌써

소주잔을 부딪히며 한잔 걸친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공안과 앞 버스 정류장을 무시한 채 늘 그렇듯

종로 서적으로 향했다. 2층 시집 코너로 가서 지브란의 예언자를 꺼내 ‘죽음에 대하여’ 읽는다.

‘….그대들 삶의 중심에서 죽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낮에는

눈멀어 밤만이 보이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는 것을. 진실로 죽음의 혼(魂)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들의 가슴을 넓게 삶의 몸을 향하여 열라…’

다시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시집을 꺼내 ‘조그만 사랑 노래’를 읽는다. ‘어제를 동여 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점점 가슴 바닥으로 침잠하던 너는 서점을 나와 인사동을 가로질러 안국동으로 왔다. 삼선동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보인다. 못 본 듯 다시 걷는다. 길 건너 텅 빈 비원이 밤보다 더 진한

어둠을 품고 덩그마니 홀로 있다. 빗장이 질러진, 우리는 들어갈 수 없는 비원의 문은 고집통이의

꽉 다문 입같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정원인들 인적을 마다한 정원이라면 그건 어리석음이었다.

‘공간’을 지나 혜화동 로타리로 들어선다. 관성적으로 내디디던 발걸음이 육교를 보자 멈췄다.

‘저기? 올라갈까?, 아니, 저긴 아니야..’ 넌 용수철이 달린 목각인형 목덜미처럼 머리를 덜렁거리며

저어댔다. 이제 성대 앞을 지나 드디어 보문동 사거리로 오니 이명 정형외과가 보인다. 5.17 시위

때 시청 앞에서 맞은 최류탄 세례를 모두 씻고 치료해 주셨던 원장 사모님이 떠오르고 넌 갑자기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지친 다리는 서두르는 마음을 따라오지 못한다.

지름길을 찾아 뒷골목 비탈길을 오를 때 눈물이 쏟아졌다.. 비어 있던 창자가 새삼 기억해 낸

따뜻한 인정에 뒤틀려서인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괴리감이 고통스러워 인가?

현관을 열고 들어서는 너의 모습에 너의 어머님은 기겁을 하셨다. “ 얘, 어디 아프나? 안색이 왜 그

모냥이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못 볼 꼴 보고 온 아처럼 얼굴이 고마 새하얗네, 금세 죽을

거처럼 백지장 아이가!, 무슨 일이고?” 쏟아지는 네 어머니의 질문도 뒤통수에 모두 남겨 놓은 채

방으로 들어간 넌 그냥 그대로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지. 사지의 늪으로,

꿈속의 죽음이 잡아당기는 대로 온 몸을 내맡긴다. 따뜻한 안도감이 휘감긴다. 죽음으로의 도피는

이렇게 허상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언제나.

결별.

서울에서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뒤로하고 넌 뉴욕을 향한 비행기에 오르고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죽으러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 그 죽음은 현실이었어.

그저 슬픔만을 길어 올리듯 한 없는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어. 무려 8시간 동안, 앵커리지에

도착할 때까지. 결별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던 거지.

유독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냈던 너의 일상은 오히려 더 고립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크게 했었고

외로움이란 놈과 붙어살았지. 하지만 막상 떠나오려니 함께한 얼굴들, 목소리, 가슴들이 다닥다닥

 

붙어 힘들었던 거야. 엄청난 시간의 풍화작용이 필요했어… 덕분에 외로움이란 놈은 더 찰싹 붙어

따라와 버렸군 .

뉴욕.

결혼은 확실히 너를 좁게 만들고 더 많은 얼굴을 감추고 살게 했어. 생활의 작은 일들에

익숙해질수록 넌 둘러싼 바깥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고 하지 못한 채, 의식의

가장자리만을 스치며 살고 있었어. 너 자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여자가 너를 절망하게 했지.

그래도 한동안은 넌 죽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어. 생명을 품었으니까.

첫애를 출산한 11월의 뉴욕은 네 마음처럼 매일 매일 회색이었어. 아기의 밤은 오전 10시부터

시작하고 넌 온통 잿빛인 어느 날 7층 베란다 난간에 서 있었지. 아기의 온기가 난간을 잡고 있는

손바닥으로 스며들고 집 안에서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지.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달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 루이스 휘른 베르그

넌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 같은 명랑함을 찾아 최대한으로 아이들에게 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려 애썼어. 태만은 너에게는 죄의식을 느끼게 했어. 항상 뭔가를 식구들을 위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렇게 열심히 넌 두 아이를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저대로 자라고

있었던 거야.

아이들은 네가 끄집어내지 못하던 너의 얼굴들을 다 보면서 자라고 있었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넌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을 거야. 네가 얼마나 눌러 놓고 살았던

‘너’였는데. 하지만 네가 ‘너’ 아니고 싶었던 그 무수한 날마다 생각했던 너의 죽음은 그저 먼

발치에서 느꼈던 관념일 뿐이었던 거야. 네 슬픔이 튀어나오지 않게 네 안에서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지.

지난 일요일, 가을에 푹 젖어있는 Sterling Lake 를 산책하며 넌 생각했었지. ‘곧 크리스마스가

되는구나, 그리고는 나이 먹는 건 안중에도 없이 또 봄을 기다릴 테니 참 어리석네. 저 고요한

수면에 한 줄의 파동도 없이 가만히, 아주 가만히 물 밑으로 잠길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슬픔이

바닥까지 동행해 주겠지..’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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