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디딤돌들

웹관리자 2022.11.26 20:46 조회 수 : 368

어릴 적 디딤돌들


 

      어디선가 엘튼 존이나 돈 맥클린의 음악이 들리면 눈이 스르르 감기며 옛시절로 돌아가는 여행을 한다. 집집마다 틀이 다른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면 골목마다 자식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익히 아는 음식 냄새가 저녁상을 예상하게 한다. 내면의 알아차림을 드러내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냄새들과 함께 버무러져 있다.

 

     터울이 크지 않은 1남 5녀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계속되는 딸들의 탄생속에서, 게다가 연년생인 언니까지, 새로울게 없는 그냥 서열의 숫자로만 매김되는 세 번째 딸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두 살 때 앓은 디프테리아는 어쩌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서열의 숙명으로써 자칫 무관심해질 수 있는 양육 환경을, 어머니의 적절한 돌봄을 이끌어 내준 지킴이 역할을 한, 세상의 기본적 토대를 든든히 하고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게 해 준 징검돌이었다. 

 

     최초의 어린 시절 기억은 4-5세 경이다. 스텐 대야가 수돗가 시멘트 단 위에 있고 펌프식 우물가에서 자매들과 얼굴과 다리를 씻는 광경이다. 동생을 위해 펌프질을 씩씩하게 해 주며, 발을 담그고 정성껏 닦는 나의 모습에 어머니는 옆집 아줌마에게 말씀하셨다. “ 경숙이는 다시 손이 안 가도 돼요. 얼마나 깨끗이 닦는지..손이 야무져요.” 그 말씀은 내가 자매들 중에 가장 정리를 잘하고 방청소가 잘 되어 있는 딸내미로 자리매김되게 한 머릿돌이었다.  

 

    초겨울의 짧은 햇살이 빨랫줄의 옷가지위에서 넘실거리는 집마당이 보인다. 대청 마루위에 이불 홑청을 펴 놓고 물을 푸우하고 내뿜던 어머니를 따라 해 본다고 물을 머금지만 반은 꿀꺽 넘겨 버렸다. 입이 궁금해 보름달 빵이나 크림 빵을 사먹고 싶어 홑청 끝자락에서 어머니께 “이십원 만, 이십원 만, “ 조르곤 했다. 어떤 날은 쉽게 돈을 주셨지만 어느 날은 그렇게 졸라도 버티셨다. 한결같지 않은 모습에 갈피를 못잡고 서운하기만 했다. 하지만 매일 만들어 주신 토마토 화채는 건강의 파수꾼이었다. 늘 푸근하고 따뜻한 어머니는 아니셨지만 결혼 전까지 세상일의 잣대 역할을 하신 어머니는 나의 에너지 총량의 고인돌이셨다.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버스로 30여분 이상 걸리는 곳으로 다녔다. 가끔 그시절에 유행하는 가요나 팝송이 조용한 버스안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런 버스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상을 하며 눈물을 짓고, 심지어 신음을 동반한 오열을 쏟아내고는 했다.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건강한 아버지셨고, 엄하셨지만 자녀들을 사랑하신 아버지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상실의 예감의 시작을 일찍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다. 

  저녁 상을 물리면 벼루에 까만 묵을 한참을 갈았다. 아버지는 붓글씨를 가르쳐 주셨다. 양반다리를 한 내 등뒤로 오셔서 내 오른 손을 잡고, 먹물이 듬뿍 머금은 붓에 힘주어 한 획 한 획 그어 주셨다. 그윽한 먹 냄새와 말린 상어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먹던, 서당같던 그 방의 기억은 아버지와의 오붓했던 비타민같은 버팀목이 되었다. 그 시대의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제 가족 구조의 아버지는 엄하셨고 무서우셨다. 출장이 잦으셨고 오실 때는 호두 과자를 사 오시곤 하셨다. 가끔 술에 취해  “ 노란 셔츠 입은 말없는 그 사나이…” 유행가를 흥얼거리시며 우리에게 뽀뽀를 해 주셨다. 수염이 따갑다며 피하곤 했는데 엄하신 아버지가 멋쩍었는지 아니면 부끄러워 그랬는지 다른 방으로 도망을 갔더랬다. 그러면 우리를 부르시고 사오신 두꺼운 콩엿을 누런 봉투에서 꺼내셔서 작은 망치로 깨트려 한 조각씩 우리들 입안에 넣어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지게를 져서라도 딸들을 대학에 보내겠노라 하셨다. 엄격하셨지만 화초와 꽃밭을 잘 가꾸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풍채가 좋으신 아버지는 세상의 마파람까지도 막아 주는 든든한 추춧돌이셨다.

 

      딸을 줄줄이 낳으신 어머니께서는 “아들과 딸” 이라는 드라마 속의 어머니와 같았다.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의 전근대적 관념이 뿌리깊게 잔재해 하나뿐인 아들에게 지극정성은 당연했고 딸들과는 대놓고 차별하셨다. 오빠가 딸들과는 다른 계층에 산다는 불평등에 입을 삐죽삐죽 내미는 날이 많았다. 한지붕 아래지만 오빠의 보금자리와 나머지 딸들의 소굴은 다른 세계였다. 오빠는 개인 과외 선생이 따라붙고 말끔한 새 옷으로 폼을 잡고, 셋째 딸인 나는 그저 보풀 난 언니 옷을 받아 입었다. 여자라는 굴레를 씌워서 금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가운데 딸로서 불합리한 양보를 해야 했다. 언니랑 집안 일을 도와야 했고 심지어 석유를 사러 멀리 떨어진 주유소를 걸어가야 했다. 모질게 추운 겨울 날, 엉성한 털실 벙어리 장갑과 목도리를 하고 큰 석유통에 막대기를 끼워 언니와 들고 오던 그 쩡한 겨울날의 시려움을, 허연 얼굴의 귀한 아들인 오빠는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연년생인 언니와 태극당에 들러 앙꼬빵과 뜨거운 단팥죽으로 그 서러움을 퉁치며 깔깔거렸다. 가끔 감정들이 쌓여 한바탕 울기도 하고, 사춘기 때는 두꺼운 양장본의 일기장에 거의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은 내면을 토해내기도 했다. 물론 엄마의 부당함과 그에 따른 울분과 욕들이었다. 심리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또 하나, 마음을 아우를 수 있었던 나만의 출구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적 여성 운동가이며 당대의 문필가, 화가이기도 한, 나 혜석의 전기와 전 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등의 여성 의식의 눈뜸을 강조한 책들을 읽으며 분한 마음을 삭였다. 남존여비나 여필종부의 구시대적인 사고에 서러움이 차고 넘치며 차가운 얼음물 같은 울분이 차올랐다. 남녀가 평등해질 때까지 고독과 절망에 싸우더라도 자기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전 혜린의 말은 이상하리만치 진심으로 느껴졌다. 근대 페미니즘의 여류 작가들의 생과 작품은 희망의 불씨를 품게 해 준 부싯돌이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국민학교 운동장이 생각난다. 오전, 오후반으로 한 반에 70-8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종례시간에 예쁘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배급 받을 수 있었던 맛있는 노란 옥수수빵을 얻기 위해 신사임당의 모습으로 무던히 노력했지만 번번히 받지 못한 것이 저학년 때의 슬픈 기억이다.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상처가 됨을 알았다. 

 또 다른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퍼런 비닐 우산이 흔했다. 비와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면, 푸르딩딩한 비닐 우산은 앙상한 우산살을 휑 내보이며 치마가 위로 들추어지 듯 홀랑 뒤집어졌다. 당황스럽고 창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산과 함께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공포도 참아내야 했다. 그렇다고 우산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잘 사는 집의 애들은 모자달린 노란 비옷과 노란 장화를 신고서 거리의 예쁜 수채화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나는 견디고 버텨야 했다. 왜 우산을 써야만 하는지의 의미와 절박성을 깨닫고, 나의 한계를 인식해야 했다. 결국은 바람이 세차면 문방구 처마밑에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아예 우산을 펼치지 않고 살짝 머리만 우산속으로 디미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또 우산이 뒤집혀도 날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어떻게든 우산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피땀 어린 노력을 했다. 때로는 버티는 것 자체가 해결책일 때가 있음을 그때 즈음 알게 된 것 같다. 옥수수 빵의 간절한 기억과 절박한 우산의 싸움은 세상을 맞설 수 있게 해 준, 한지붕 아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너와집의 크고 작은 조약돌이었다.

 

     작은 양은 국자에, 달고나와 뽑기를 먹기 위해 연탄 불 주위로 모여 앉아, 소다를 넣으면 부풀어 오르던 그 찐득하고 달콤한 맛은 간식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때에 단맛의 갈증을 해갈 시켰다. 하얀 밥에 빠다를 넣고 간장과 참기름으로 비비며 버터 냄새나는 미국을 생각했다. 미국을 다녀 온 사촌 오빠가 가져 온 바나나, 땅콩이 콕콕 박힌 두꺼운 초콜릿과 눈이 감겼다 떠지는 노란 머리의 인형은 미국이 선진국이라는 명분에 토를 달지 못했다. 종로 2가 화신 백화점, 파고다 공원 앞으로 전차가 다녔으며 창경원, 비원이 단골 소풍 장소이어서 길게 줄을 서서 학년 별로 학교 정문을 떠나 걸어갔다. 동물이나 대궐을 보고 놀라며 즐거웠던 기억보다 무진장 걸어서 지쳤던, 온 동네의 어머니들이 김밥과 유부초밥을 싸느라 시끌벅적한 날이었다. 엘튼 존의 노래와 함께  ‘ 켄디’ 라는 만화를 보며 자매들과 눈물을 질질짜기도 하고, 저녁 시간이 길었던 그 시절은 골목마다 친구들과  “다방구” 라는 역동적인 술래잡기 놀이와 줄넘기, 고무줄 놀이를 저물도록 하며 넘치는 에너지를 내뿜었다. 자잘한 즐거움을 주었던 무수한 추억들은  손안에서 뛰놀며 자가증식하는 공깃돌이었다.

 

     유신 정권이라는 프랭카드가 중,고등학교 담벼락에 붙어 있었고 새마을 운동과 새벽종이 울렸네의 노래를 국민 교육 헌장을 외우듯 아침마다 들었다. 교복과 교련복이 당연했고 줄 맞춰 걷는 군인들의 행렬을 연습하느라 고달팠다. 사열, 열병, 분열, 연병장등 군대 용어가 난무하는 교련시간이 지루했다. 반공교육 중에서도 이 승복의 ‘공산당이 싫어요’는 북한의 잔혹함의 사례로, 관련된 포스터와 표어를 매 학년마다 상투적으로 그리며 예술에 길들여졌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 폭 파묻혀 시험 때마다 정독, 남산 도서관을 가서 긴 줄을 새벽부터 견뎌냈고, 멸치 국물 하나 사서 도시락을 먹었다. 도서관의 조용함과 뜨거운 멸치 국물에 어수선함과 피곤을 뒤로하고 행복의 스마일을 가득 담았다. 그런 와중에도, 목련화가 흐드러진 교정에서 스케치를 하며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춘기의 감수성을 도닥거렸다. 방과 후 교정 벤치에 앉아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야망의 미래를 꿈꾸고 정체성을 다지고, 인생이 무엇인지 철학적인 물음표를 서로가 던지고는 했다. 학교 건너편에 있었던 튀김 가게의 오징어, 고구마 튀김, 그리고 설탕이 뿌려져 있던 빵 튀김까지 우리의 풋풋한 학창시절의 추억들은 자잘한 자갈돌이었다.

 

     공부를 위한 대학은 정권에 항의하는 대자보와 총학생회의 입장을 밝히는 벽보들로 도배가 되었다. 캠퍼스 잔디는 경찰들의 표적이 되어 쫓긴 학생들이 몰매를 맞으며 움츠렸고, 전경들이 곤봉과 방패로 두려운 공기를 뿜어냈다. 독립문, 광화문, 종로거리는 매서운 얼굴의 아픔과 눈물이 쏟아지는 최루탄이 자욱했고, 시위대 대열은 뭉게뭉게 커져갔다. 운동권의 주변인으로 시위대의 물 공급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비열하고 정의을 몰라라하는 젊음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어서 갈등과 번뇌는 딩연했다. 최루탄을 맞고 고개가 젖혀진 이 한열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 종철의 기사들로 온 국민은 반독재,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일정하게 주도한 학생운동, 대자보, 많은 학생 운동가들은 민주 국가를 향한 넓고 튼튼한 바윗돌이었다. 

 

  연년생이라 대학시절이 같았던 언니와는 전공도 같고 감성도 같았다. 집안 대청소를 끝내면 둘이 눈치를 보내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버스 정류장으로 웃음을 휘날리며 뛰어가곤 했다. 미술 전시를 가기도 하고 삼일로 창고 극장, 엘칸토 예술극장등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 ‘ 신의 아그네스’ ‘빨간 피터의 고백’  ‘에쿠우스’등을 관람하며 연극의 실험성 추구에  동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뿐 아니라 결혼 후까지 언니와는 좋은 추억을 함께 했다. 가장 편하고 가장 소중한 인생의 벗인 언니는 따뜻한 하얀 차돌이다.

 

      모든 젊은 세대들에게 어려움이 있듯이 내가 겪은 그 시대의 나라 상황과 의식 역시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자랑스러운 것은 고민을 정확히 알았고 나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어리숙했던 내게는 자갈밭처럼 편히 걷지는 못했지만 나름 성공했고, 그런 의미에서는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이었음을 안다. 이런 나의 디딤돌들을 굳게 딛고 삶의 여정은 계속되며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러운지 나만의 인생의 결을 오늘도 성장하며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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