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KEN MEADOW 공원에서의 수상

웹관리자 2023.06.15 13:01 조회 수 : 22

SUNKEN MEADOW 공원에서의 수상

 

 

가게서 동동거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운동량초과라고 치부했다. 가뜩이나 혹사시키는 다리를 쉬게 해야지, 왜 더 힘들게 운동을 하느냐고 했다. 그런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무지 높게 나왔다. 정신이 버쩍 들 정도로. 아무리 몸을 많이 움직여도, 그건 단지 노동일뿐인 것이다. 듣던 대로. 하여 친구랑 같이 시작한 것이, 새벽별 보며 걷기 운동이었다.

바다를 안고 있는 Sunken Meadow Park으로 가서 일출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새벽 5시라, 으레 칠흑이려니 하고 문밖을 나서다가 깜짝 놀랐다. 백야 같다. 달님이 드라이브 웨이에 흰 광목을 깔아 놓았다. 아니 은하수 한 자락이 내려와 환히 빛나고 있다. 처음엔 엘니뇨의 횡포로 싸락눈이 살짝 덮인 줄로 알았다. 아무리 기상이변이 잦아도 그렇지, 분명 초가을인데 설마! 하며 하늘을 보았다. 정말로 큰 쟁반 같은 보름달만이 터질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해에 비하면 있는 듯 없는 듯 겸손하기 만한 달의 위력이 새삼 놀랍다. 인간의 겸양지덕의 모습인양 깊고 은근하지 않은가.

또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총총 별들도 보석같이 빛을 발한다. 그 중에서 왕 다이아몬드인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유난히 명멸한다. 다른 별자리의 별들도 밤을 새느라 졸려 깜빡거리면서도 옹기종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순간 주먹만한 불덩이가 번개처럼 아래로 휙 사선을 긋다가 스러진다. 너무도 눈 깜짝할 새에 소멸된 별똥별이었다. 어디쯤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화살 같은 우리의 인생과 대비돼 더 허망하다. 정지용 선생의 시가 떠오른다.

별똥별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가,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제 다 자랐다.’

여하간 별똥별을 보면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살포시 기대감도 든다.

잠들은 하이웨이를 달려 도착하니 새벽이라고 파킹요금도 없다. 아침형 인간에게 베푸는 특혜다. 자고로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얻게 마련 아니던가. 등산로 쪽의 주차장엔 차가 없는데, 바닷가 앞쪽엔 20여대나 넘게 딱정벌레처럼 엎드려있다. 이곳 사람들은 정적이기보다 동적이라 그런가? 확실히 산보다는 바다를 향해 마음들이 열려있다. 어느 산엘 가도 항상 호젓해서, 내가 마치 주인이고 내산 같았다. 반면 해변엘 갔을 때의 느낌은, 늘 북적대는 인파들 틈에 끼여, 어쩔 수 없이 도토리 꼴의 이방인이곤 했었으니까.

깜깜한 산 속의 오두막집 불 모양 외롭고 따뜻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곳이 있다. 누군가의 배려가 그 불빛 속에 다사롭게 녹아있는 화장실이다. 역시 미국은 시민들 편의를 우선으로 하는 정책엔 철저하다.

해 뜰 시간이 남았기에 백사장 위에 있는 나무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서, 새벽 운동하는 Early Bird 라는 동류의식으로 반갑게 미소 짓는다. 주고받는굿모닝소리가 새소리처럼 낭랑하다.

머리 까만 동양인들이 온다. 한국 사람들이다. 서양 사람들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절대로 구별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단일민족들끼린, 부모자식 간에 핏줄이 당기듯, 묘하게도 느낌으로 안다. 의식적으로 무표정을 가장해도, 못 본 척 외면해도, 그러기에 더 확실히 서로 한국인이란 걸 알아버린다. 이번에도 우리가 먼저 안녕하세요!”하니까 마지못해 대표로 한 명이 멋쩍은 듯 !”하며 지나간다. 같은 동포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야멸치게 무뚝뚝하다. 바닷물에 수장시켜야할 미소결핍증 민족성조차, 애교 있게 여겨져 미소가 인다. 그만큼 청정한 새벽바다 향기는 사람을 싱그럽고 넉넉하게 만든다.

바다 쪽에서 쌩쌩 불어오는 칼바람으로 얼굴이 시리다. 그런데도 허리 아래는 후끈후끈 훈풍 마사지를 받고 있다. 바닥을 보니 공중목욕탕 앞의 하수구 마냥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더운 김인 줄 알고 바닥 가까이 손을 대보니 아주 냉랭하다. 온건한 기류는 산책로를 방파제처럼 에두르고 있는 숲과 산 쪽에서 오는 건가보다.

그런데 방수 옷을 입은 나무로 만든 뽀얀 산책로가 흠씬 목욕한 폼 새다. 간밤엔 분명 비가 안 왔는데. 그럼 파도가 밤에 심술을 부렸나? 그건 아닌 게 확실하다. 허리 높이의 난간은 뽀송하고 보드웍은 파도가 넘볼 만치 낮은 키가 아닌데다 백사장도 넓다. 무엇보다도 파도가 큰 대서양 같지 않게, 화냈던 것 같지 않게 아주 온화하다. 그제 서야 아하! 하고 깨달아졌다. 이슬비에도 옷이 다 젖는다고 하더니, 큰 일교차와 산과 바다의 다른 기류가 부딪치며 생긴 이슬로도, 목욕이 가능했다는 것을.

그렇게 샤워한 보드웍이 달빛의 반사로 검게 빛나는 호수의 수면으로 변했다. 겁을 먹은 발이, 물에 빠질세라 제가 알아서 사뿐사뿐 살짝살짝 내어 딛는다. ! 연잎들까지 떠있다. 자세히 보니 젖은 나무 바닥에 찍혀진 사람들의 발자국을 가지고 달빛이 창조해 놓은 거였다. 제일 좋아하는 화가인 모네가 이 기막힌 달의 수묵화 솜씨를 봤었다면, 명 연꽃 시리즈가 하나 더 추가됐을 텐데. 아쉽다.

바닷물이 산 밑 에다 만들어 놓은 석호로 갈 즈음에야, 희붐해지면서 검은 장막이 회색으로 엷어졌다. 별들은 낌새도 없이 어느 틈에 다 숨어버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달만 외롭게 내 그림자를 따라온다.

고니들이 검은 수면을 고요히 유영한다. 거개의 공원처럼 이곳도 조류보호 고시지역이지만, 오리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어둑한 사위 때문에 백조가 스완 같이 까매서 흑조로 보인다. 꿈속에 빠져있는 새들에 비해 오리종류가 훨씬 새벽잠이 없고 부지런한 건가? 아니면, 물에서 밤을 샌 건지도 모르겠다. 어두워지면 오리들이 늪으로 이동하지만, 어떤 오린 한쪽 눈 만 감고 물위에 둥둥 떠서 자기도 한다니까,

동쪽 하늘은 서서히 붉은 기운이 짙어져 노을처럼 타오른다. 뭐에 놀란 듯이 우아하게 날아오른 백로들이, 가늘고 긴 막대기 같은 다리를 쪽 편 채 허공을 가른다. 질세라하고 청둥오리 떼들도 궁둥이가 무거워 퍼더덕 물을 차고 오르더니, 힘겹다고 꽥꽥소리 지른다. 조류 종류에 따라 비상하는 자태가 다른 것이 신기하다. 모양이 틀리듯이, 소리가 틀리듯이, 나는 태도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말이다.

섬광처럼, 인간들은 피부색갈이 틀려도, 심지어 언어와 문화까지 틀려도, 희한하게 희로 애 락의 표정과 눈빛, 표현 동작은 꼭 같다는 사실이 머리를 친다.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도 온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마음하나 틀려서 이해는커녕 죽고 못 살고 하는 경우들이 생기니 안타깝다. 결국은 마음에서 태생된 증오 때문에 참혹한 전쟁까지도 자초한다. 비극이다. 또한 인종과 나라,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인생을 누린다. 불공평하게도, 삶의 양상과 빈부의 극명한 격차는 너무 엄청나다. 그렇건만 인간들은 그 폐해의 미로 속에서 해결점을 강구하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깊어지는 골에 빠져 허우적대니 비감이다. 얼마나 오리보다 못한 존재인가. 오리들은 적어도 서로가 싸우지 않고 해 꼬지도 안 하니까. 또 어디서 살더라도 삶의 본질과 모양새는 똑 같으니까.

그럼에도 이 순간 나는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에 사는 행운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낙후된 환경에서, 비참하고 열악하고 남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떠올라, 참으로 미안하고 죄스러움도 느끼면서도, 딱 그 뿐이다. 늘 거기까지였다. 어지간히 이기적이고 영악하고 얌체 근성이다. 해오라기 보기도 민망스럽다.

미운 오리새끼가 시나브로 탈바꿈하듯, 백조와 두루미도 칙칙한 검은 옷들을 벗고 하얀 옷으로 갈아입는다. 호수 건너편의 갈대밭이 바다 편 쪽을 가리고 있어서 끝 간 데 없이 아스라한 초원으로 보인다. 그 위로 하얀 물안개가 은하수처럼 피어올라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붉게 채색되는 먼 동 하늘가를 배경으로, 들녘의 까만 고목나무의 자태는 한마디로 몽환적인 아프리카 황야의 수채화다.

조금씩 맑아지며 땅도 그제야 희누르스름한 피부를 드러내고, 달은 기운 없이 심각한 빈혈증세를 호소한다. 하늘과 구름도 잿빛에서 우유 빛으로 변해간다. 해는 저 깊고도 깊은 아래쪽에서, 떠오르기 위한 진통으로 잔뜩 얼굴을 붉히고 있나보다. 드디어 준비운동완료인지 불쑥 솟구치기 시작이다. 잉태한 고통 끝에 오는 해산의 열락 같은 순간이다. 너무도 장엄하다. 찬란하고 경건함에, 보건체조를 하다말고 딱 정지된 로봇이 된다. 말조차 잃는다. 흑 하고 숨까지 멈춰진다.

이 순간만은, 저 해가 만인의 해가 아니고, 오로지 나만의 나를 위한, 내 해라는 뿌듯함과 희열이 엄습한다. 진주황색의 얼굴에서 내리쏟는 거대한 순백의 햇살에 눈이 부시다. 오싹 부끄러워지며 괜히 벌거벗은 기분이다. 당당하게 해와 맞서기엔 너무나 추하고 초라하다. 위축돼서 저절로 미간이 좁혀지고 가늘게 실눈이 된 채 집중한다. ! 착시인줄은 모르나 붉은 해의 속살이 보인다. 눈부시게 빛살이 내리쏟는 불덩이 안으로 긴 터널이 보인다. 하얀 은빛의 길이 뚫려있고 그 끝은 점처럼 까맣게 막혀있다. 문득 그게 천국의 문으로 느껴진다. 저 해야말로 바로 영험한 신이구나 싶다. 순간적으로 내 생애를 뒤돌아본다. 무엇보다 분명한 건, 그 속으론 절대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거다. 그렇건 만도 해는 몸을 불태우면서 나를 비춰주고 있다. 남은 생이라도 깨끗이 살면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내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결코 안 될 것이다. 떳떳치 못하다.

해는 이제 풍선처럼 둥실 둥실 위로 쑥쑥 올라간다. 삼라만상의 해로 거듭난다. 자기가 깨워야 날개 짓을 시작하는 새의 습성을 알고 일일이 새집들을 방문했나보다. 새들이 아침인사로 분주한 것을 보며, 맥없이 발길을 돌린다. 갈매기도 비로소 잠자리에서 일어나, 금가루 은가루가 바다 가득 뿌려진 아침바다를 선유한다. 먹을 것이 지나치게 풍부한 이곳이라 갈매기들마저 다이어트가 필수다. 갈매기들도 눈여겨보면 탐심이 참 많다. 인간의 끝도 없는 탐욕보다야 적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비상하는 모양새는 날렵해 물오리랑 확연히 구별된다.

고무바지를 입은 낚시꾼들이, 금 비늘 은비늘이 춤을 추는 바닷물에 들어가 금고기야! 은 고기야! 고기를 부르고 있다. 낚싯대로 하며 물비늘들을 흩뿌리면서. 모래사장은 파도와 이슬로 목욕 재개해서, 청정해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떠오르는 첫 햇살로 갓 세수한 풀잎 마냥 신선한 그 백사장에, 흉물스러운 쓰레기가 널려있다. 신문뭉치, 검은 비닐 백, 누런 봉투 등이 어지럽다. 한국사람 짓일 까봐 가슴이 쿵! 한다. 아니길 바라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다. 너무도 낯익은 신문의 활자가 눈을 콱 잡아당겼다. 그 자랑스러운 한글글자가, 그 사랑스럽고 정들은 글자가, 지금처럼 안 반가운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신문뿐인가? 새우깡 봉투에다 샌드위치를 쌌던 종이, 또 밤새 잡은 고기를 아예 손질까지 해갔는지, 피갑 칠한 생선대가리들과 징그럽게 널린 미끼들까지. 너무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누가 볼세라 그 오염물들을 신문으로 잽싸게 두루 말았다. 우리의 글자가 새겨진 신문에게는 미안하지만. 쓰레기통을 찾으니, 세상에! 바로 10 미터 정도 뒤에 있다. 정말 너무했다. 그 얼굴 두꺼움에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퍼뜩 내 모습을 본다.

해외생활 20년 넘게 하면서 정작 나는 어땠나? 정직하게 말해보자.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관습 외에도, 말과 매너, 옷차림, 또는 운전 중에라도, 이민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적이 없었는지를. 자신 있게 NO! 라고는 못 하겠다.

산에 갈 때마다, 돌이나 예쁜 꽃들을 보면 집으로 갖고 오고 싶어 안달을 낸다. 또 봄 만 되면 고향에서 나물 캐던 기억으로 나물을 뜯고 싶어 몸살도 냈고. 그것도 다 욕심과 이기심의 발로인 줄 알면서도, 그래선 안 돼는 줄 알면서도, 못 참곤 했었다. 우리나라에서야 나물 정도는 내 들, 내 산이려니 하고 마음 편하게 채취하겠지만, 이민자인 내겐, 이곳 산은 어디까지나 남의 산일뿐이다. 그런데다가 이 나라 사람들은 하찮은 풀 하나, 돌 하나 안 건드린다. 머릿속에 자연환경보호라는 단어가 철저히 입력돼있어서다. 더욱이나 산나물은 먹는 거라는 사실을 모르니, 염소도 아닌데 어떻게? 기이하게 몬도가네 식으로 보기 이다.

더구나 모든 자연물 채취에는 엄격하게 법규가 정해져있다. 게를 잡아도 맥주깡통 길이 보다 작으면 미련 없이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 낚시로 잡는 고기, 사냥하는 사슴, 곰 등등 사이즈와 잡는 마리 수가 다 정해져있다. 위반 시는 칼날 같이 큰 벌금으로 직결된다. 얼마 전 어느 한인이 규정량보다 많은 굴을 땄다고 경범죄로 걸려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단다. 그랬더니 도덕적인 인격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이민국으로부터 시민권 신청이 거부당했단다. 이 정도다. 내 조국이라면 당할 수 없는 일인 건 자명하다.

그 외에도 웅담과 녹용, 산삼, 두릅 등 불법채취 건으로 문제를 일으킨 극성맞은 한국인들이, 심심하면 언론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따지고 보면 꽃과 나물을 캐는 내 자신도, 그런 양심불량자들과 같은 범주 아닐까. 결국은 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나 역시 몰상식한 행동에서 100%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러면서 감히 누가 누굴 나무라고 있나 싶어 뜨끔하다. 로마법이라도 법이라면 따라야 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성숙된 이민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일거일동이 곧 조국의 얼굴이 된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찬연한 일출의 햇살 아래서도, 부끄럼 없이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더구나 타국 살이에선.

윤동주 선생의 그 유명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화두 인양 내내 머리에 맴도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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