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 빚진 것 갚기
토요일마다 새벽에 친구들과 산행을 한다. 나는 트레일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적당한 나뭇가지를 구하려고 이리 저리 눈길을 준다. 우선 들고 다니는데 부담이 안 되게끔 굵기와 길이가 적당하고, 반드시 작대기 한쪽 끝의 단면이 사선이라야 일등품이다. 지팡이 대용이 아닌 다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할 거니까.
모든 인류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지만, ‘거미의 역사’ 역시 그렇다. 거미들이 밤새 거미줄을 뽑아서 좁은 산길 양쪽에 도열한 나무들을 출렁다리로 이어놓으니까. 막 여명이 벗겨질 때라, 뭔가 내 얼굴에 와 감기며 간지럽게 해야 비로소 허공에 걸린 거미줄다리의 존재를 의식한다. 옛적부터 아침거미는 복을 갖다 주는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지만, 안개처럼 엉켜 있는 거미줄은 처치곤란이다. 산길의 첫손님이 지불해야하는 영광<?>의 통행료로 알고 막대기로 앞을 휘두르는 수고를 감수하며 전진한다.
잠간 백범선생의 좌우명이었던 서산대사의 선시를 떠올린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어지럽게 함부로 가지마라./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이정표가 되기엔 턱도 없는 소박한 내 발걸음이지만, 그래도 뒷사람이 좀은 편하겠거니 한다. 그래서 거추장스럽게 산책길을 훼방하며 누워있는 가지들도 발 운동 삼아 길 밖으로 뻥뻥 차거나, 기다란 것은 주워서 숲속으로 던져버린다. 이렇다보니 등산하면서 축구도 하고 원반던지기도 하는 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팔다리운동 하면서 빠르게 행군하면 1시간 만에 우리의 쉼터인 냇가 벤치에 당도한다.
한담을 나누며 커피, 쑥차, 군고구마, 구운 감자, 삶은 계란, 옥수수와 빵, 과일 등으로 아침 요기를 한다. 30분 후, 머물렀던 흔적이 안 남게끔 완전하게 뒷마무리를 한 후 쓰레기 백을 들고 일어선다.
귀로 변에 투기된 각종 음료수 병들이 눈에 띄면 나는 쓰레기 백에다 주워 담는다. 휴지조각이나 비닐나부랭이들은 막대기의 뾰족한 끝으로 콕 찍어서 담는다. 거미줄퇴치용 막대기가 쓰레기집게 대용품노릇을 당차게 한다. 그러다보니 일행에 뒤처지기 십상이라 헉헉대기 마련인데도 내 마음은 가볍고 뿌듯하다. 이런 소소한 일이 감히 자연보호운동이니 자원봉사니 하는 차원엔 턱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나 나름대로 꾸준히 실행하게 된 데는, 산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근원적으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모에서다.
아버지는 참 다감하신데다 정리정돈이 몸에 배신 정갈하셨던 분이다. 퇴근 후 현관에 들어서시면, 무질서하게 벗어던져진 우리들 신발부터 가지런하게 놓으신 다음, 이방 저 방 흐트러진 사물들을 제자리에 정돈하는 게 습관이셨다. 야단은커녕 한마디 지적도 잔소리도 없으셨다. 단 한 번도. 또 등산애호가셨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산 나들이도 참 많이 하셨다. 산에서 음식을 먹은 후엔 깔끔한 뒷정리를 우리에게 강조하시곤, 아버지는 남들이 버리고 간 주변의 쓰레기들까지 수거해오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일단 산에 오르면 아무리 공짜라도 산한테 신세를 지는 거다. 산을 찾을 때면 반드시 최소한의 의무라도 이행해야 조금이나마 산에 진 빚을 갚는 거다”
그러셨던 아버지의 신조를 숱하게 듣고 보아선지, 산에 널린 쓰레기들이 도통 예사로 봐지지 않았다. 공자 논어의 학이 편에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보여주신 도리를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孝)라고 이를만하다’ 했다. 나는 아버지 생전에 효도 한번 못한 게 너무 죄스러워, 뒤늦었지만 아버지의 지침만이라도 따르기로 했던 것. 나로선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의 탕감(?)차, 하나 둘 줍게 됐던 건대 하나도 귀찮지가 않았다. 아버지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려지고 ‘아버지와 함께’ 라는 느낌이 들어 좋기만 했다. 자연스레 그 일은 당연하게 나 자신과의 약속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파킹장의 쓰레기통에다 들고 온 불룩한 쓰레기 백을 넣는데, 산악자전거를 탄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땡큐!”한다. 별것 아닌 일로 타인에게 기쁨을 줬나싶으니 흐뭇하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을 잇는다는 취지하에 시작된 작은 수고로 인해, 아버지께 좀 떳떳하고, 등산객들은 상쾌하고, 산은 쓰레기몸살걱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테니 일거삼득인가!
문득 나 자신의 삶의 행로를 뒤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는 아버지처럼 애들에게 생활지침을 심어준 말과 행동은 뭘까? 아니 있기나 한가? 얼른 답이 안 나온다. 헛살았구나...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7 | 할머니꽃<노랑꽃> | 웹관리자 | 2025.08.29 | 3 |
| » | 산에 빚진 것 갚기 | 웹관리자 | 2025.08.29 | 3 |
| 5 | 나야 | 웹관리자 | 2023.06.15 | 336 |
| 4 | SUNKEN MEADOW 공원에서의 수상 | 웹관리자 | 2023.06.15 | 341 |
| 3 | 어느 하얀 겨울밤에 | 웹관리자 | 2023.06.15 | 336 |
| 2 | 우리 가족의 지구촌 생활 이야기 < I love Paul > | 웹관리자 | 2023.06.15 | 341 |
| 1 | 뉴욕 겨울 산 의 단상 | 웹관리자 | 2023.06.15 | 34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