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라는 훈장

웹관리자 2026.05.16 08:42 조회 수 : 20

 

늙음이라는 훈장

 

송지선

 

"너도 늙어 봐라, 너는 안 그럴 것 같니?"

 

어른들이 던지던 이 투박한 한마디가 어느덧 내 입가에 머문다. 늙음을 말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늙음이라는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청춘에 늙음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없었다. 뜨거운 열정의 나이에 노년이란 단어는 가슴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시니어'라는 낯선 이름표를 가슴에 달게

된다. 나라가 인정한 정식 노인! 메디케어 카드가 나오고 은퇴 연금에 대한 소식이나

광고가 쏟아져 들어온다. 비로소 깨닫는다. 아, 나도 이제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구나!

 

기껏해야 두 살 위인 남편은 요즘 부쩍 늙음을 과시한다. 내가 몸이나 행동의 변화에

당황할 때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럴 때야, 나는 벌써 전에 그랬어"라며 십 년은 더 산

사람처럼 유세를 떤다. “늙은 게 뭐 훈장이라도 되나? 저리 유세를 하네!”

 

어쩌면 남편의 유세는 낯선 노년의 변화를 먼저 겪어낸 그만의 서툰 자기방어이자, "나도

당신처럼 당황스러웠어"라는 공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훈장은 남이 달아주는

것이지만, '늙음'이라는 훈장은 스스로의 시간을 견뎌온 자신에게 주는 자작 수여식 같은

것일 테니까.

 

우리는 학창 시절, 한 학년만 높아져도 후배들 앞에서 "너희는 참 좋을 때다"라며 상노인

행세를 하곤 했다. 하지만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 어제의

노련함은 사라지고 다시 설레는 '병아리 신입생'이 되어 푸릇푸릇한 생기를 되찾았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노년이면 초로에서 또다시 시작이다. 백 세 시대이다 보니

노인학교에 가도 70대면 아직 젊다고 물심부름만 하게 된다며 안 간다고 하는 우스갯

말도 들었다.

 

물 심부름 좀 하면 어떠랴….운동한다 셈 치고 다시 병아리 노인으로 푸릇푸릇해진다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낙천성이야말로 진정 '곱게 늙어가는'모습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잘 늙는 비결로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며 귀는 여는 것'을 꼽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잘 늙으려면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할 일이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거나 귀 기울여 들어 준 적이 없이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가며

살았을 뿐이다. 평생 책임감에 밀려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봐 줄 여유조차

없이 살았으나, 이제는 내 이름을 불러주며 칭찬해 줄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 나를 위해 칭찬을 많이 해 주자!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과학기술이 정답을 말해주는 시대라지만, 삶의 진리는 결코

데이터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살아온 시간의 축적, 경험으로 응고된 지혜 속에만

존재한다. 설렘은 줄어들었을지언정 아마도 깊은 이해를 얻을 것이라 믿으며, 서두르지

않아도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느긋함’을 배우는 중이다.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나누는 이가 곁에 있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가 인정하는 지공 거사의 혜택보다 더 빛나는 진짜 '훈장'일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삶을 '이 세상 소풍'이라 노래했다(시-귀천).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대해야 한다. 늙음은

주저앉으라는 호령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내어준 멋진 훈장이다. 그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남은 소풍 길을 기쁘게 걸어가 보려 한다. 시인의 마음처럼 나도 하늘로

돌아갈 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소풍을 해야지.

 

4.2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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