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늙은 공주를 위하여

웹관리자 2022.11.25 18:06 조회 수 : 21

기차에서 내리면 길 양편으로 이제 마악 나지막한 등을 밝히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다소

허름하고 내부는 여전 침침하나 내리는 빗속에서 누군가는 반주와 함께 이른 저녘을 시작했다.

좁은 상가길은 질척대고, 빗물에 얼룩진 실루엣에 마음이 시려온다.이 길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일본은 멋지다-는 딸애와 다르게 같이 사진을 보던 나는 외로워 보여- 읊조린다. 엄마는

혼자였으니까-딸애는 얼른 덧붙인다. 무심코 넘긴 잡지의 사진 한장은 잊고 지냈던 일본에서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돌이켜보면 일본에서의 첫겨울은 녹록치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나이의 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있었고심지어 가위에 눌림-을 경험했으며 경미한 불면증에, 상비약이던

감기약은 수면유도제로 금새 동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와중에 가슴 밑바닥에는 새로운 생활과 불투명한 미래에의 기대감이 또한

있었다. 나는 적령기(?)를 한참 웃도는 여자에 대한 척도나 시선에서 자유로왔다. 늦게 배운

자전거로(필요에 의해, 자전거는 필수)익숙치 않은 거리를 달릴 때, 나는 익숙한 고독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곧 생활에 적응돼갔고 나름 어울리는 그룹이 생겨났고 사랑이라고 느끼는

대상도 있었다. 나의 사랑-은 무책임하고 유동적이다. - 한 친구가 떠오른다.

단발머리에 교복입던 시절, 거의 그시기를 점유하다시피한 단짝인 친구가 있었다.지금도

눈에 선한 입자가 촘촘한 피부에 움푹 패인 작은 눈이 매서운 얼굴의 소유자로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당최 타협이라곤 모르는 - 반드시 좋은 쪽만은 아닌-올곧은 성격이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숱한 시간을 문학과 인생에 대해 논쟁을 펼쳤었다.숱하게 같이 한 사계절이 있었음에

유독 겨울이 많이 떠오른 것은 눈쌓인 장충동거리를 번갈아 미끄러져가며 걷던

기억이강렬하기 때문일게다. 이성과의 달콤한 사랑등이 상상안되는, 감히 누구나 하는 평범한

결혼과 묶어 연결짓기 힘든인물이었는데 놀랍게도 첫미팅에서 만난 첫사랑과 그야말로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살다보면 그런게 있는 것같다- 뚜렷한 이유없이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멀어지는-나는 회사생활을 계속했고 그 친구 역시 일과 결혼생활로 우리는

소원해져갔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그애에게 궁금했던, 결혼을 감행한 이유를

물었다.-사랑하니까-단순하고도 단호한 답이었다. 그 대답은 대단히 강렬했으며 내게는

의구심을 주었다. 그때의 나에겐 형이상학적인 마치 외계인의 단어같았단 말이다.

세월이 지나고 그 친구가 남편을 여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그친구의

근황은 -죽음-이었다. 꼽아보니 아들이 아홉살일텐데, 두고 가는 그 심정이 어땠을까. 마음이

저미도록 아팠다. 그래도 불꽃같은 사랑을 했겠지, 아마도 먼저 간 배우자에 대한 절절한 맘

그대로 간직한채 갔겠지.웬지 범접할수 없는경지로 내심 존경심마저 들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랑은 존재할까. 사랑은 이기적인 인간이주체가 되므로 그 역시 가변적이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 란 말은 진부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돌이켜보면 상대방에 대한 표현에 엄격하고 인색하기까지하다. 살아있는 동안 그

좋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하라했는데. 떠나갔던 떠나왔던 혼자라는 것은 사랑하니까 같이 있는다ᅳ라는

등식에 당연 위배된다. 죽음을 제외하고는. 누군가는 이런저런 불평을 얹는 내게 말한다.

‘자기가 공주인줄 아나? 적당히 맞춰야지'-무엇을?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을. 결과는 뻔할진대 이름만은

고수하리라. 공주는 늙어도 공주임에 틀림없으리렷다. 백마탄 왕자는 존재하지 않고 공주도 일찌감치 없는 존재였다.

젊었고 무모했던 내가, 그래서 내일이 짐작되는 단조로운 미래가 식상나서 떠나온 일본과

사람과기억들. 나는, 낯선 골목길에 기대 놓고 온 내 자전거와 기억들을 공유한 거리들을 떠 올린다.

다소 비현실적인 낭만이란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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