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웹관리자 2023.02.28 09:08 조회 수 : 12

기억

 

얼핏 묵은 노트를 넘기다 -1월 마지막 날-이란 부분에 멈춰졌다. 웬지 맘이 철렁 가라앉는 것이

애잔한 느낌이다. 본초적인 미련,아쉬움이 표면상의 느낌이다. 표현은 계속된다. -묵은 김치를

내다 버렸다. 식탐 절반,과감히 정리 못하는 성격 반에 냉장고 구탱이에 밀려, 심지어는 잊혀진

채로 결국엔 엄청난 존재감(냄새로)만 무성한 그 김치를 드디어 “마지막"이란 단어에 힘입어

정리했다.

 

이 생애의 마지막 사랑,시월의 마지막 밤등 우리가 익숙한 많은 표현들이 있다. 프로포즈로

“마지막-”을 집어 넣으면 감동스럽기까지하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잠 안오는 어떤 밤,누워 뒤척이다( 별이나 양을 수백마리

세도 도움 안됨)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이름들을 떠올린다.

열다섯쯤,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에 K 가 있었다.주근깨가 많고 크지도 않은 키에 항상 등을

움츠리고 다녀서 천성이 머슴같아 뵈는 아이였는데 서울의 중심가에 자리한 학교까지 여럿

버스를 갈아타고 왔던 기억으로 근교 어딘가에 사는 듯했다.특히 아버지가 여자의 학교 교육을

반대해 교과서를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던졌다는 소문도 들렸다. 왜인지 그애에게선 타다남은

장작의 그을음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겸연쩍은 미소 사이로 번뜩이는 강렬한

눈빛도 기억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좋은 목청을 갖고 있지 못하나 방과후,숙제를 빌미로

교실에 남아있던 몇몇이 하나 둘씩 흩어져 돌아가고 어쩌다 둘이 남겨지면 그애는 내게

“선구자"노래를 청했다.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같이 좋아하는 노래

라는 것에 의기 투합했던 것 같다.

-일소엉정 푸른 솔은.....해란강은'나는 행여 음이 더 잘 나올새라 몸을 곧추세우고그 힘겨운

노래를 뽑아냈고

듣기 청한 그애는 눈을 지긋이 감고 그야말로 경청을 했다. 좋다,참 좋네-그애는 박수대신 깍지

낀 두손을 펴곤 했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나를 참 기쁘게 했다. 또 한명,K가 추앙하던 피부가

하얗고 선병질적인 애가 있었다.

작은 키(도토리 키 재기지만)로 맨 앞자리를 사수했는데 꽤 살집이 있었고 해서 통통한

손가락으로 필통을 여닫을 때면 뭔가 용이치않아 불편해 보였던그 애는 무슨 연유에서 인지

K를 언제나 머슴부리듯 했다. K는 쌀쌀맞기 그지없이 본인을 대하는 그애를 마치 큰 언니가

어린 동생 대하듯,아니 마당쇠가 안방 아기씨 대하듯 싫은 기색 없이 그 애를 챙겼다. 나는 그

둘의 미묘한 관계가 이해가 안됐고 확실히 기억나진 않으나 그 부분을 따져묻지 않았나 한다.

지금껏 이해되지 않는 걸 보면 K가 확실한 해명을 하거나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후, 고등학교등으로 흩어졌고 소식이 두절됐다. 들리기론 K 는 진학을 안했다 한다.

문득 이 밤의 나는 뉘옄뉘옄 해가 지는 교실, 벽에 기대어 서서 목청을 가다듬던 나와 눈감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 애를 떠올린다.

나는 이 순간,마지막이란 주술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친구가 전학갈 때

속수무책으로 떠나 보내고, 연락처를 묻지 못해 그저 그것이 마지막일 때가 왕왕 있었다.

돌아보면 그 뿐으로 다시는 못볼 사람들,인연이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그 내용이

어지됐든 제일 시청률이 높다한다. 예상 가능 할지라도 마지막은 모두들 궁금해 한다. 드라마도

우리네 인생도 해피 인생이지만은 아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길을 나서니 모든게 첫 만남이고

마지막 만남이다.-했다.

 

시위가 이미 당겨진 우리 인생 길은 마지막을 향해 그냥 고-이다. 그러나 마지막이란 분기점이

있기에 또한 전속력으로 질주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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