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단
나는 마음 속에 나만의 계단이 있다.
어릴 적에 읽은 동화-이때는 “층층대”란 명칭이 제목처럼 어울린다. 계단은 촘촘하고 제대로
형태를 구비한 견고한 건축물로 이해되고 후자의 층층대는 낡고 듬성듬성한 구조이나
어딘가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처럼 호기심으로 올라갔는데 거인이
살고 괴물이 있는 다른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괴물을 물리치고 누군가를 구조하거나
신비한 어떤 연결고리를 찾아내 극한 상황을 정리하는 이른바 어린이 판
“인디애너.존스”이기도 하고 그저 다른 차원의 세상에 닿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상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이제 어른인 나는 현실적으로 내가 피하고 싶은 상황, 간과하고픈
현실을 뛰어넘게하는 상징적인 마음의 보루인 것이다. 이 계단은 때로는 비겁한 계단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그리움이 수반된다. 초등학교때 거쳐여만 했던 계단들, 나는 숫자를 세거나
습관적으로 간판을 읽는데 101개의 수와 오르던 그 느낌은 생생하다. 층계하나.하나가 어린
내겐 폭도 넓고 높아 절대로 한보폭으로는 불가능했고 중간에 층계참도 있어 따지고 보면
엄청난 계단을 매일같이 오른 셈이다. 지치지않는 지금의 체력도 그때 다져진 것이 아닐까싶다.
어떤 사람은 같이 먹은 음식으로만 기억되듯이 그때, 같이 걷던 어린 친구들은 전혀 기억에
없고 그저 광활하게 치솟은 계단만 마음에 남았을 뿐으로 기억의 어떤 부분이 사라진 듯해
쓸쓸한 느낌도 든다.
계단만 보면 무작정 올라가 애를 태우던 조카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거꾸로 신을 신고-아마도 제어될까 겁났으리라- 옥상으로 치닿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계단에 익숙하지않은 우리개는 계단 밑참에서 (에레베이터에 익숙하기도 하고, 나이
탓도 있고) 억울함을 토로한다. 아이는 그저 위로,위로 향한 계단 오르기가 신명나서,게다가
쫓기는 긴박감에 스릴이 더해 졌으리라 생각한다. 반면 개는 익숙하지 않은 가파른 구조물에
좌절감을 느꼈을 것으로 무력감에 그저 짖었을 것 이었다.
어떤 대담 방송에서 한 출연자가 결혼을 계단에 비유했다. 가고 가고,올라가도 평탄함이
없다고 해석을 곁들여 말이다. 혹은 목표를 향해 같이 올라가는 것, 이는 나의 주석이지만.
때로는 걷는 보폭이 다르고 혹은 다른 이유로 더 나아가기를, 더 오르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나이 탓일까,지금의 나는 무의식으로는 계단을 번거로워한다. 집 구입을 위해 돌아볼
때,계단이 많단 이유로 주저없이 대상에서 제외하고 심지어는 연로한 분이 현재 거주자는
아니겠지, 혹은 살다가 힘들어져서 이사나오는 것일까 등 근거없는 걱정까지 얹는다.
지금의 나는 건물의 사층에 거주하는데 근력을 키우기위해 의식적으로 계단을 이용하려한다.
숨을 고르며 층을 확인하면 영낙없이 삼층이다. 나의 현재 근력지수는 거기가 한계점인 것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계단은 험난한 여정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노래”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처럼 결국은 그 여정의 끝에 천국이 있기를 바란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생명을 살
수없었던 것처럼 천국에의 길은 굳이 종교적인 해석을 떠나서도 노래가사와 같이 황금으로도
살수없었다. 계단은 때로 역경처럼 느껴지고 다음 단계는 희망으로도 해석된다. 현실은 계단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이미 인지하고 있기도 하고 혹은 우회를 하기엔 늦은 감이 있어서
비감하게 오르고 대다수는 불투명하나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그것을 오르는 것이다.
에레베이터대신 가능하면 계단을 이용하세요 - 주치의의 당부이다.
이 경우는 대부분, 나의 무의식이 우위다. 자연스레 에레베이터 앞에 서있는 날이 더 많으니까.
혹은 마음을 다잡고 비상구 쪽 계단으로 방향을 정한다.
올라갈 땐 뒷꿈치를 먼저, 내려갈 땐 앞꿈치가 먼저다. 하나, 둘, 세엣. 나는 가볍게 구령을
부친다.
사층까지 무리없이 완주,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