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저당

웹관리자 2023.06.25 10:49 조회 수 : 52

자 유 의 저 당(抵 當)

 

인생은 입구에서 보면 먼 길이지만 출구에서 보면 하나의 짧은 추억이 되기도 한다. 육군복무

0년간은 한국 땅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치루어야 할 홍역이다. 군대생활 이야기는 너무 흔해

빠진것이 되어 좀 진부한 것이 됐지만 내 젊은 시절 겪은 <그 3년>은 내 인생의 구도의

길이기도 했다.

여름 날의 나무 잎처럼 많은 사연들을 다 기억해 낼수는 없다. 여기서 엮은 글들은 단편적인

체험의 기록들이다. 생의 가치와 자유의 고귀성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사실들이다.

 

1

 

그날은 심하게 눈보라 치는 날이였다. 대학을 마치는 졸업시험을 끝내고 새로운 날들의

설계에 몰두해 있던 날, 고향집으로 부터 등기편지 한통을 받았다. 편지와 함께 나온 입영

영장은 내 생활의 모든 방향을 돌변 시키는 느낌 이였다. ‘보충역으로 내내 미루어 오다가 이

중요한 시기에 오라고 할게 뭐람’ 우선 불평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에

3년 씩이나 군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대를 꼭

가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여러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착찹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채

집결지로 가야 할 날이 됐다.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고향으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종이 쪽지 한장이 제시해 주는 내 생의 가치를 계속 저울질 했다. 나라의 평화와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대는 필요한 것이고 내가 편하게 지낼 때 다른이 들이 수고를

했으니 나도 이제 내 자유를 국가에 저당 잡히고 부르는 대로 따라야 되지 않을까. 이 의무의

이행 없이는 자유시민의 권리 보장도 받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흔들리는 열차의 좌석 등받이에 피로한 머리를 뉘었다.

 

2,

 

논산 수용연대에 처음 들어 가던 날밤, 연병장이 진흙땅이라 발자국에 파인 구멍마다

살어름이 얼어 잘못 딛으면 흙탕물이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입소한 장정들은 물이 고인 땅은

피하려고 엉거주춤 하다가 대열정돈이 늦어졌다.

집결지에서 부터 입대장정들을 인솔해 온 상사 한분이 있었다. 집결지나 호송열차 까지는

고분고분 존대말을 쓰더니 정돈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갑작히 화가 나서

“이 개00들 빨리 정돈 못해.” 소리 지르며 앞에 몇사람을 군화발로 걷어 찼다. 놀랍게도

장정들의 움직임이 민첩해 지고 빠르게 열이 정돈되었다. 진흙구덩이도 옷을 버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아,여기서 부터는 인간대우를 잃어 버리는 구나’ 혼자 생각 했다.

군대생활을 통해서 사람이 먼저냐, 군대가 먼저냐 하는 의문은 여러번 대두 된다. 군대도

사람의 집단이니 인격적인 대우는 있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욕을 먹거나 기압을 받을

때는 인간상실감을 여러번 맛보아야 했다. 군대생활을 통해서 대다수가 조금씩 거치러

진다.옳고 그름의 의식도 조금씩 둔감해 진다. 착하고 얌전 빼는 사람은 고문관이 되고

못된자가 좋은 군인이 된다는 통념에 빠지게 된다.

연병장에서 대열정돈을 끝내자 일정한 수대로 막사 배치를 받았다.막사에 들어가자 다른

지방에서 우리 먼저 온 장정들이 선배라 하며 침상 앞에 정돈 시키고 “차려, 열중 쉬어”를

연속적으로 시키며 잔득 겁을 주었다. “0.5초 내로 침구속으로 들어 가.” 하고 명령 했다.

흙탕물에 버려진 옷을 입은 채 우리는 급히 침구 속으로 들어 갔다. 어쩐지 바닥이 딱딱하다

싶어 옆사람을 보니 나만 ‘메트레스’밑으로 들어 온 것을 알고 내가 너무 긴장한 것이 아닌가

싶어 혼자 씁쓸히 웃었다.

 

3,

 

수용연대는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다. 신체검사에 합격해야 군번을 받고

군인의 길로 가고 검사에 불합격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갈림 길이다.

아침기상 시간에 모두 일어나 잠자리를 정돈하며 부산을 떠는데 한 친구는 계속 누어 자고

있었다. 그 막사를 책임지는 기관병이 달려와서 군화발로 그 친구를 걷어 찼다. 저녁

점호시간에 우리 막사 인원이 한명 부족 했다. 얼마후 옆 막사에서 한명이 끌려 왔다. 아침에

늦잠 자던 그 친구였다. 그는 또 매를 맞았다. 고향이 어디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저기-“하고

대답 했다. 자기 나이는 43살이고 자기 아버지는 24살이라고 했다. 짖궂은 아이들이

‘고문관’이라고 쓴 종이장을 등에 써 붙이고 놀려 돼도 “헤 헤”하고 웃었다. 신체검사에 떨어져

집으로 돌아 갈 줄 알았는데 어이된 영문인지 합격 되어 훈련소로 넘어 갔다. 군대를 안 가려고

그렇게 매를 맞으며 바보 짓을 했을까. 그 친구가 측은하고 염려 스러웠다.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군대라는 특수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하고 고문관 취급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군대는 통일화와 균일화를 요구하는 집단이다 수준 아래 있는 사람은 그 수준까지

 

2

 

끌어 올려 똑똑하게 만들고 그 수준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수준 까지 끌어 내리며 바보 취급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4

 

수용연대에 들어가 처음으로 먹는 군대밥은 콩나물과 두부가 섞인 된장국, 설익은 듯이

밥알이 살아 있는 보리밥이 평식기에 담아 나왔다. 묵은 곡식 냄새 같기도 하고 군대밥 특유의

냄새가 났다. 몇 숟갈 뜨다 말고 가지고 나가 버렸다 드럼통에는 버린 음식이 그득했다.

기관병들은 그 통을 짬빵통이라 불렀다. 육군 졸병들의 식사는 밥과 국을 말아서 함께든다고

해서 짬빵이라 부른다고 했다. 빵을 사 먹으려 매점에 갔더니 많은 장정들이 시장터 처럼

법석됐다.

훈련소로 넘어가서 군대 짬빵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배로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만 덜 먹어도 배가 고파 뛰지를 못하겠고 식사 때가 되면 배곱시계가 정확히 먼저 알려

주었다. 짬빵을 맛있게 먹는 입은 팥없는 빵도 라면도 특식이 되고 김치를 먹는 것도

별미였다. 군대의 짬빵을 맛본 사람 만이 일반 식사의 고마움과 기쁨을 느낄수 있으리라 생각

되었다.

 

5,

 

수용연대에서 훈련소로 배치 되는 날은 비가 내렸다. 비를 피하여 작은 막사 안에

예비군인들이 빼곡이 들어 섰다. 담당병사가 옷과 신발을 몇 무더기 풀어 놓고 “0.5초내로 갈아

입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민간복은 싸서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 훈련복으로 갈아 입고

통일화로 바꿔 신었다.

옷은 체격에 맞는 호수와 신발은 문수가 있겠지만 무더기속에 섞겨 동작 빠른자들만 맞는

크기를 골라 가고 좀 얌전을 피우다 보니 남은 것은 큰 사이즈 뿐이였다. 주춤거리며 서 있는데

한 장정이 “신발들이 커서 신을수가 없습니다.” 불평을 터트리자 “다른 사람과 바꿔 신든지

발을 통일화에 맞추어 신든지 해.” 인솔 하사관이 쏘아 부쳤다. 나는 찔끔해서 말도 못 꺼내고

팔소매는 걷어올리고 바지 가랭이는 통일화에 쑤셔 넣고 통일화 끈을 꼭 졸라 맺다. 작은

체구에 훌렁한 큰 옷과 커다란 신발은 어느 희극영화의 배우처럼 보였다.

훈련소까지 먼 길을 걸어 오는 동안 발 뒷꿈치가 벗겨져 쓰리고 아팠다. 닥아 올 어려운

군생활을 예고 하듯이 빗줄기 마져 새차게 얼굴을 때렸다.

신발에 발을 맞추라는 억지는 군 생활에서는 보통 상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훨씬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6,

 

군인이 되는 길은 땀과 먼지로 범벅된 인내와 눈물의 언덕이였다. 훈련병의 이동은 언제나

구보로 이어 졌다. 밥과 국을 급하게 말아 먹고 M1 총을 앞에 들고 훈련장 까지 먼 길을

달려가니 밥알이 살아서 올라 왔다. 유격훈련장에서는 철봉에 매달려 씨름하다 보니 손바닥이

부풀어 터졌다. 사격술 연마의 반복 동작으로 팔굼치와 무릎이 깨졌다. 기록사격에 불합격

했다고 두 시간 동안 기압을 당했다. 그 기압은 총을 등으로 껴안고 업드려서 배로 기어가는

것이다. 연병장은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눈을 뜰수 없고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 자연히

입으로 헐떡거리다 보니 입안에 흙먼지가 들어와 텁텁했다. 침을 뱉자 흙먼지와 피가 섞여

나왔다.

군대생활을 이겨내는 의지와 인내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면 못할 것이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인간 재생창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군대를 마치고 나면 사람이 달라 졌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군인의 길은 물리적 고통만이 강요 되어서는 안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정신훈화 시간을 갖지만 대부분의 사병들은 졸고 있었다.

 

7,

군대에서의 기합은 부대의 기율과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참기 어려운 기합을

당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이 강하게 남았다.

일정구역의 땅을 파고 메우는 ‘땅 파기’ , 양팔을 머리에 얹고 앉은 자세로 엉금엉금 걷는

‘오리걸음’ 오리걸음 자세로 발을 바꿔가며 제자리 뛰는 ‘쪼그려 뛰기’ 어떤 지점까지 달려

갔다가 빨리 온 사람만 빠지고 나머지는 계속 반복시키는 ‘선착순’ 주먹 쥐고 땅에 엎드려

‘팔굽혀 펴기’ 등은 졸병으로서는 기본적이고 신사적인 기합이다.

 

3

 

조금 강도 높은 기합으로는 ‘원산 폭격’이 있다. 팔을 뒷짐쥐고 머리를 땅이나 마루에 거꾸로

박는다.심할 때는 철모를 놓고 그 위에 머리를 박는다.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쓸어지면

엉덩이에 불이 난다. 병사들이 기거하는 막사는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편이 나무 침상으로 되어

있다. ‘쥐 잡기 실시’ 하면 재빠르게 침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 어떤 덩치 큰 친구가

침상가에 엉덩이가 걸려 매를 맞으며 엉엉 울던 일이 있었다.

‘한강 철교’는 앞 사람의 다리는 내 어깨에 걸치고 내 다리는 뒷 사람의 어깨에 올리고 팔로

기어 간다. 살 어름 진 구덩이나 몸집이 큰 친구가 앞에 서면 큰 고역이 된다. ‘나이롱 취침’은

바로 누어서 소총을 가슴 위로 올리고 발은 90도 꺾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철모는 끈으로 턱에

조이고 땅에서 떨어지게 든다. 처음에는 이렇게 편한 기합도 있구나 했는데 점차 시간이 갈수록

팔 다리 고개가 아파 견딜수 없었다. ‘자전거 타기.는 나이롱 취침과 같은 자세를 하고 발만

자전거 타듯이 움직인다. 조교가 빨리 하면 빠르게 천천히 하면 느리게 움직였다. 다른

훈련병은 다리가 아프도록 열심히 돌리는데 한 사병은 가만히 있었다. 조교가 군화발로

엉덩이를 차며 “왜 너는 안돌려” 하자 “저는 지금 언덕을 내려가는 중이라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한 바탕 웃고 말았다. ‘제트기 포복’은 소총을 등에 끼고 엎드려 배와

다리로만 하는 낮은 포복이다. 먼지 모래가 날릴 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였다. ‘싼타 크로쓰’는

지급 받은 관물을 모두 판초 우의에 싸메고 뛰어나와 선착순으로 집합한다.관물을 다시

정돈하는 것이 더 큰 일이다. 어떤 동작을 실시 했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 가라는 말로 ‘원

위치’가 있다. 실내 점호시 야외훈련을 받을 때 원위치는 기합으로 쓰인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으로 산 등성이를 기어 오르는 데 한 두사람 잘못 한것으로 전체를 원위치

시키면 약이 오르고 목도 더 말랐다. 출발점으로 터덜거리며 걸어 내려오면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맞을 때 원위치 해서 처음 부터 다시 시작 할수 있는 용기가 필요 하겠구나 하고 생각

했다.

사적인 ‘린치’나 비 인간적인 기합이 군대내에서 사라졌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하의 추운

날에 팬티만 입힌 알몸으로 자갈 밭을 포복 할 때, 야전용 변기통을 혀로 핥을 때, 계급과 군번

순으로 고참부터 차례로 때리는 ‘줄 빠다’는 가련한 졸병들에게는 고문 같은 것이였다.

별다른 잘못 없이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 차이는 ‘쪼인트’를 맞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고통은 인간의 정신을 가끔씩 순화 시킨다. 잡념을 털고 교육훈련에 전념하라는 효과로

단체생활의 기압은 필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급자나 피교육자를 단순히 괴롭히기 위한

기합이 계속 된다면 선량하고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인내심이 조금 부족한 탓으로 <남한산성-

군대 교도소>로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8,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에게 지급되는 여러가지 물품을 관물이라고 한다. 피복 배낭 야전용삽

철모등 이다. 관물은 거의 비슷비슷 해서 한번 잃어 버리면 내것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매일

점호시에 관물의 정돈 관리상태를 점검하므로 잃어버린 물건이 있을 때는 상당히 불안감에

싸인다. 관물을 잃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변상을 해야 한다. 때로는 조금 모자라는 ‘고문관’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않게 가만히 있다가 감쪽같이 채워 놓는 자가 똑똑한

군인이다.

관물이 부족되는 이유를 훈련소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훈련소를 떠나 갈 무렵에 내무반장이

침상 널판지 밑에서 이것저것 물품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내무반장이 몰래 숨겨 놓고

훈련병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금품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또 훈련병들이 부주의로 파손하거나 야외 훈련시 잃어 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훈련소 내에는 관물의 절대수가 부족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잃어버린자는

다른데서 훔치고 부족하면 채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부대원의 식사를 배급 받으려 ‘식깡’을 둘이 들고 가는데 난데없이 한 녀석이 뚜껑을 가지고

달아 났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 쫓고 쫓기는 경주가 벌어 졌다. 뚜껑을 든 자가 경주에 불리해

지자 그것을 버리고 도망했다. 훈련소의 야외 변소는 대게 지붕이 없다. 한 친구가 대변을 보고

있는데 모자를 볏겨 도주해 버렀다. 큰일을 보다가 일어나 쫓아갈수 없으니 포기할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한 훈련병이 관물을 잃고 고민하다가 한 밤중에 먼데 다른 막사에서 무사히 훔쳐 오다가

순찰사관에게 탈주병으로 오인되어 뿥잡혀 갔다. 정상보고를 받은 지휘관은 그 용기가

가상하다고 훈방 시켰다. 관물대 위에 놓아 둔 야전삽이 밤사이에 감쪽같이 없어 졌다. 종일

초조하게 보내며 이궁리 저궁리 했다. 밤이 되어 변소에 가는 척하고 나와 옆 막사로 갔다.

내무반 불침번이 졸고 있을 때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날렵하게 삽을 꺼냈다. 삽을 가지고 달려

오면서 “그저, 자리만 옮겨 놓는 걸” 혼자서 중얼거리며 어두운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혼자

어설프게 웃었다.

 

4

 

9,

 

훈련소에 입소 할때는 부모나 친지들로 부터 비상금으로 쓰라고 얼마씩 돈을 주어 가지고

들어 간다. 내무반에 들어 간 첫날, 못된 내무반장은 돈을 쥐어 짤 작전을 시작한다. 종이

쪽지를 한장 씩 나눠 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금 액수와 이름을 적어 내라고 했다. 처음에는

매우 황당한 말로 들렸다.

“적어내지 않는 사람은 도난을 당해도 책임 질수 없다. 그리고 내무반 안에서 다른 사람이

돈을 잃었을 때 적어 낸 금액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심받게 될것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적어내야 한다.” 하고 강조 했다.

사실대로 적어 내면 자기 가진 돈을 다 노출시키는 것이고 안 적어내면 도난 맞아도 아

무 소리도 못 하는 것이고 내무반 내에서 도난사고 났을 경우 혐의를 받을수도 있다는 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순진한 아이들은 가진대로 전부 적어 내고 약은

친구들은 가진것 보다 적게 적어냈다. 다음날 부터 내무 반장은 돈 있는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불러내어 빌리는 형식으로 가져 갔다. 전체적으로는 점호시에 검열을 까다롭게 하고 괴롭히며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어 빨래 쥐어 짜듯 거두어 갔다.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내무반 향도를 맡았다. 향도는 내무반의 반장격이다. 부대원의 집합,

내무반 청소지휘등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면 훈련병들의 돈을 거두어

내무반장이나 조교들에게 상납하는 일도 해야했다. 내가 그 일을 거절하자 행정반에 불려가

매를 맞았다. 향도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가 더 ‘빠다’를 맞았다. 내 비상금을 털어 주고 풀려

나왔다.

퍼렇게 멍든 볼기짝의 아픔보다 빼앗긴 돈보다도 돈 때문에 치사해 지는 인간성의 타락에

더욱 슬펐다.

 

10,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시간 맞추어 식사하며 매일 달리기를 하며 다른 잡념을 가질 시간이

없으니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 졌다.

M1 소총을 앞에 들고 먼데 교육장 까지 달려 갈때는 팔뚝이 빠질듯이 아팠다. 모래주머니를

정강이에 매달고 종일 걷고 달리면 처음 몇일간은 다리근육이 당겨 아팠다. 그러나 습관이 되면

모래주머니를 떼고 뛰면 날을것 같았다. 태권도 정골 단련이라고 시멘트 바닥에 주먹을 쥐고

팔굽혀펴기를 할 때는 눈물이 나왔다. 하루 종일 총검술을 하다보면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아렸다. 나중에는 소총이 조금 무거운 막대를 들고 장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M1소총의

크립에 든 실탄을 장진 할때 총대를 양무릎에 끼고 두 손의 엄지로 간신히 할수 있던 것이 팔과

손의 힘이 강해지자 한 손으로도 거뜬히 할수 있었다.

장거리 구보를 하고 ‘오리 걸음’이나 ‘토끼 뜀’을 시킬 때는 그 자리에 주저 않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다리 근육을 풀리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치를 깨닫고는 기합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고 팔굽혀 펴기도 몸의 단련이라 생각하니 덜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달라 진 것은 땀 흘려 훈련을 받고 저녁을 들 때 짬빵이 꿀맛이였다. 몸살기로

밥맛이 없다고 식기를 물리는 옆 전우에게 입으로는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들지.”위로의

말을 하면서 손은 잽싸게 옆 사람의 식기를 가져오는 얌체가 되어 버렀다.

 

11,

 

나무 잎사귀가 따사로운 태양아래 눈 부신 신록의 빛갈을 자랑할 무렵 훈련도 끝나고 있었다.

땀에 저린 훈련복을 벗어 수도가에서 빨아 말렸다. 다음에 올 훈련병들을 위해 잘 접어

반납했다. 작대기 한 개의 이등병 계급장을 다니 군 생활을 다 마친 듯이 약간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속을 받을 때는 병과 라는 것이 주어 진다. 병과의 숫자는 앞으로

의 군대생활의 편함과 어려움을 결정 짓는 운명의 계시였다.

군대는 도도히 흐르는 커다란 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멈출수도 거슬러 올라 갈수도 없었다. 내 인생을 육군 따불 백에 담고 배속 된 부대를 찾아가는

강물에 뜬 뗏목처럼 느껴졌다. 내 병과는 유선 가설병으로 대대 통신대에 배속 되었다. 실제

임무는 통신서무 조수로 신병생활이 시작 되었다.

아침 기상을 하면 점호를 마치고 아침 구보가 끝나면 청소를 하고 부대원 식사를 타려 갔다.

밥과 국을 배식 받으려 들통 둘을 들고 취사반으로 갔다. 식사를 가져다 고참 순으로 배식을

했다. 맨 나중 남은 밥은 국물에 말아 훌훌 들어 마셨다. 우물가에서 빈 식기를 씻어오면 “사역

집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병은 층층이 있는 상급자의 눈치를 보고 부르면 가고 시키면 해야하는 시집살이였다.

신병은 자기 물건이 내무반 안에서 분실해도 벙어리 냉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고참보다 특식을

덜 먹어도 더 낡은 옷을 입어도 보초근무를 더 많이 해도 불평할수가 없었다.

 

5

 

어느날 아침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다가 식기를 잔뜩 쌓아 놓고 씻고 있는 신병을 보았다. 그

신병이 벗어 논 철모의 얼룩무늬 커버에 <세월아, 구보로> <目水一世月: 눈물로 보내는 한

세월>이라 써진 것을 보았다. 우숩기도 하고 측은 마음이 들어 그 신병의 그릇 씻기를 거들어

주었다.

 

12,

졸병의 임무중 중요한 것의 하나가 경계이다.

자지 않고 교대로 내무반 불침번을 서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하고 정문이나 중요한 위치에

외곽 보초를 서는 것도 졸병의 몫이다. 내무반 불침번은 주로 고참들이 맡고 외곽 보초는

졸병들에게 주어졌다.

낮에 종일 작업을 하고 고단한 몸으로 깊은 잠에 떨어져 있을 때 새벽 3시, 보초 교대를

하라고 깨우면 정말 짜증이 난다. 일어나야 되겠다 생각하며 꾸물대다 보면 다시 잠에 빠진다.

불침번을 서는 고참으로 부터 머리를 호되게 얻어 맞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철모 탄띠 소총등 군장을 갖추어 밖에 나서면 이른 봄의 차거운 밤 공기가 잠을 쫓는다.

막사 뒤 초소가 있는 산 비탈을 오른다.어두운 그림자를 안고있는 큰 나무들이 거인처럼

보인다. 밤하늘에는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말똥거리고 있다. 먼저 근무자로 부터 이상유무와

실탄을 확인하여 인계 받는다. 근무용 ‘파카’를 받아 입는다. 옷에서 케케한 냄새가 고약하지만

따뜻해서 좋다.

“수고 해” “그래 수고 했어”

먼저 근무자는 내려 간다. 다음 근무자가 교대하려 올 때까지 한 시간 반동안 경계를

서야한다. 초소 근무 중에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 담배불은 멀리서도 잘 보이고 냄새도

멀리까지 퍼진다. 불필요한 동작이나 소리를 내서도 안되며 졸아서는 더욱 안된다. 모든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 주변을 살피며 호속에 가만히 앉아 참고 견디어야 한다.

초소 근처에는 시야가 방해되는 잡목은 다 베어 버리고 상당히 떨어져 나무숲이 늘어 서

있다. 들쥐가 지나며 부스럭 대는 소리도 긴장을 시킨다.

북두칠성이 기울고 동편하늘이 밝아오면 먼데 산들의 윤곽이 뚜렷해 진다. 근무시간이

지난든한 느낌이 든다. 동편의 작은 별들이 흐미해지고 서쪽의 샛별이 유난히 반짝인다. 주위의

숲들이 어두운 그림자를 조금씩 벗는다. 다음 근무자가 나처럼 일어 나려다가 다시 잠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새벽의 단잠을 손해 본듯한 화를 억누르며 초조하게 교대자를 더

기다린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떠 오르고 고향의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며 하나 씩

스러지는 별을 바라본다.

 

13,

 

간밤에 배낭을 꾸리고 양말속에 양초를 바르는 등 법석을 떨고 잠을 설친 탓인지 아침기상

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하늘에는 아직 별들이 총총 했다. 개울로 내려가 세수를 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입이 깔깔해서 입맛이 없었으나 억지로 한 그릇을 비웠다. 특별부식으로

멸치볶음과 보리밥을 반합에 채우고 배낭을 다시 정돈했다. 연병장에 전 부대원이 집합 할 무렵

동이 밝아 왔다.

55km, 110리를 하루에 행군하는 날이였다. 낙오되지 않고 이것을 해 낼수 있다면 군생활의

자랑스런 추억이 될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집결지로 행군하는 도중 부대원들은 내가 제일 먼저

낙오 될것이라고 염려해 주었다.

대대병력이 출발지점에 모두 집결하자 대대장은 이것이 인생행군이라 생각하여 낙오되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것은 고무적인 훈시였다.

늦가을 선선한 날씨는 행군을 하기는 아주 좋았다. 우리 본부중대 병력은 행군대열 맨 뒤를

따랐다. 선두의 행군 속도를 뒤따라 가야하니 좀 불리한 입장이였다. 들과 논 사이를 길게 뻗어

산으로 꾸불어 든 신작로에는 행군대열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서히 움지여 가고 있었다.

산을 하나 넘자 등은 땀에 젖고 군화속 양말이 꼬여서 발이 몹씨 아팠다. 아픔을 참고 계속

걸었으나 점점 뒤 처졌다. 산을 둘 넘었을 때 누구나 체력이 강하다고 인정 했던 ‘허병장’이

누렇게 되어 엠브런스에 실리어 갔다. 주저 않고 싶을 만큼 발이 몹시 아팠다. 소속부대는 점점

멀어 졌다. 마침 트럭 한 대가 뒤에서 왔다. 차를 세우고 사정을 해서 차에 올랐다. 반도 못 와서

낙오 되기는 싫었다. 트럭바닥에 배낭을 벗어 놓았다. 땀에 젖은 등이 시원하게 느껴젔다.

군화를 벗고 양말을 고쳐 신은 후 다시 군화끈을 적당히 조였다. 날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리는 차의 속도로 몰아치는 바람이 상쾌했다.

행군 대열 앞부분 쯤 와서 차를 멈추게 했다. 배낭을 다시 메고 소총을 들고 차에서 뛰어

내렸다. 발도 아프지 않고 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걸음을 천천히 조절하며 소속 부대를 찾았다.

부대원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 했다.

 

6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헸다. 본부중대 맨 앞에서 앞만보고 열심히 걸었다. 들을지나 산길을

돌고 신작로에 나서며 계속 걸었다. 옆 전우가 나누어 주는 사탕 맛이 꿀맛이였다.

빗발이 점점 굵어 지고 곁 옷이 젖었다. 총구를 밑으로 소총을 고쳐 메었다. 길이 미끄럽고

황토흙이 신발에 엉겨 붙어 걷기가 퍽 힘들었다. 부대원들은 피로의 기색이 보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니 힘을 내라고 지휘관들이 독려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비를 피하여 큰 교량 밑에 자리를 잡았다. 모래가 축축해서 철모를 벗어

거꾸로 깔고 앉았다. 배낭에서 점심 반합을 풀었다. 보리밥과 멸치 볶음이 적당히 비벼져

있었다.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수통의 찬물을 한모금 마시고 개울물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리는 동드라미를 바라보며 으스스 떨었다.

식사후 화랑담배를 피워 물고 피로를 잠시 잊고 대화의 꽃을 피웠다. 새벽에 출발하여 점심

때 까지 10분의 휴식 밖에 없는 강행군 이였다. 오후에 비가 계속 내리면 행군속도가 늦어

지므로 휴식이 없을것이라 하였다. 다시 출발 명령이 내렸다. 피우던 담배를 공중분해하여

던지고 재빠르게 배낭을 꾸러 메고 한길로 나가 대오를 정돈했다.

오늘 날이 궂고 피로하면 쉬었다가 내일 갈수 있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그러나 군인의 길은

목표한 것은 지금 해 내야 하는 것인가. 체력의 한계점에 도달한 이 행군을 통해 참고 견디는

군인정신을 닦는 또 다른 훈련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오후의 강행군으로 많은 전우들이 낙오 되었다. 어둑해 질 무렵 부대가

보이는 큰 길까지 왔다. 나는 안간 힘을 쓰며 선두 무리에 끼어가고 있었다. 다리는 자동으로

걸어지는 느낌이였다. 마중나온 전우들에게 배낭을 벗어 주었을 때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

거렸다.

 

14,

 

봄은 졸병의 부드러워 진 손등과 따사로운 양지쪽 볕으로 부터 온다. 야외 사격장에 나서면

들판에 돋아 난 새싹들의 인사가 반갑다. 먼데 산 응달 진 골짝기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

처럼 겨울은 꼼지락 거리고 겨울내복이나 야전 잠바를 벗어 던지기는 좀 이른 때 냇가의 버들

강아지에 물이 올랐다.

이른 아침 산 골짜기를 뒤덮은 안개, 아침햇살에 영롱하는 풀잎에 맺힌 이슬, 훈훈한

봄바람에 실어 오는 꽃내음, 밤에 보초근무를 나가 들판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우는 소리, 이 한

해를 봄에 다 살고 싶은 기분에 잠긴다.

겨울옷을 개울가에서 말끔이 세탁해서 따불백에 챙겨 넣고 나면 여름은 졸병의 이마에서

부터 다가 온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소매로 훔쳐도 계속 흐르는 행군의 길에서 옷은 흠뻑

땀에 젖는다. 그래도 마음대로 멱감고 세탁할수 있는 개울물이 넘치는 여름은 졸병들에게는

행복한 계절이다.

한 그릇 냉수의 맛, 녹음 짙은 나무 밑의 잠시 휴식, 여름을 노래하는 매미 소리, 저녁의 붉은

노을,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밤에 보초 서는것도 운치있는 계절이다.

달력의 가을은 구월 부터지만 졸병의 가을은 낙엽 쓸기부터 시작해서 월동 준비완료로

끝난다. 연병장에 떨어지는 낙엽은 쓸어도 쓸어도 계속 떨어 진다. 낙엽 쓸기는 싫어도 주위

산들이 곱게 물드는 단풍은 아름답다. 단풍사이로 바라보는 파란 가을하늘, 부대의 철조망 밖에

핀 들국화, 풀섶에서 우는 벌레소리, 달이 뜨고 고요한 정적이 뒤 덮힌 밤 보초를 서면 졸병은

잠시 시인이 된다.

새벽길 살얼음이 발에 밟히는 소리로 부터 겨울이 온다. 개울물이 꽁꽁 얼어 제대로 씻지

못해 졸병의 손등이 터 갈라 진다. 따스한 난로가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따뜻한 물로 얼굴을

씻고나면 겨울이 그렇게 지내기 어려운 계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산에 내린 눈은 겨울이

다 가도록 쌓여있다. 졸병의 겨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보초를 서야하는 계절이지만 머지않아

봄이 오리라는 기대속에 살게 한다.

이글거리는 난로가에 둘러 앉아 ‘국군 장병 아저씨께, 무더운 날씨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

십니까?’ 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읽고 있으면 밖에서 몰아치는 세찬 겨울바람을 잊고 웃어

볼수있는 겨울이다.

 

15,

 

군대생활에서 사병들에게 조금 편하거나 고달파 짐은 장소적인 것보다 좋은 지휘관이나

상급자를 만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었다.

군대생활을 통해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등 많은 지휘관이 바뀌었다. 장교로써의 인격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마음으로 부터 사병들이 따를수 있는 훌륭한 지휘관을 별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대대장 이였던 ‘김 중령’은 아침 부대에 나올 때 연로하신 모친께 언제나 인사를 드리는 효자

였다. 인사를 받은 모친께서는 “사병들을 잘 먹이고 잘 입혀라. 누구나 그들 부모에게는 귀한

자식들이다” 하고 당부 말씀을 하셨다는 대대장 당번의 말을 전해 듣고 그 대대장도 존경스럽게

 

7

 

느껴졌다.

지휘관의 업무 수행상 불편함을 덜기 위해 ‘당번’ 을 두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당번은

연락업무, 식사나 차 심부름, 신발 닦기, 잠자리 준비, 세탁 등 여러가지를 해야 했다. 대대

정보참모 한 장교는 당번에게 내복 빨래나 식사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고 소문이 자자 했다.

그 장교는 ‘육사’ 출신이라서 좀 다른 것이라고 사병들은 입을 모았다.

 

16,

 

가족이나 친지들이 서로 암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를 해 주기 위해 면회를 온다. 일 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일년이 되도록 한 사람도 찾아오는 이가 없는 사병은

상대적으로 기가 죽는다.

부대에 전입하여 신병생활을 한참 할 무렵, 부대원 식사를 배급 받아 왔을 때 동생이 면회

왔다고 알려 왔다. 집안 소식도 궁금했던 차라 기뻤다. 다른 전우의 깨끗한 군복을 빌어입고

면회실로 갔다. 아우는 초췌해 보이는 내 모습에 금새 눈물이 글썽해 졌다. 감정을 억누르고

아우를 달랬다. 면회는 병사의 최선의 위로책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로도

친구들이나 아우들이 계속 면회를 왔다. 고참들은 부러움에서 미움의 눈으로 달라졌다. 무언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우나 친구들을 오지못하게 사정을 했다. 외출이나

휴가를 가게 되자 면회는 자연 싱겁게 되었다.

일년에 한번 씩 사병들에게는 정기 휴가가 주어 진다. 근무 중에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

포상휴가를 받기도 한다. 연대에서 실시하는 암호경연 대회에서 우리 부대가 우승한 것으로

포상 휴가를 받았다. 이것은 매우 달콤한 것이였다.

처음 휴가를 받아 서울에 사는 누나네를 찾아 갔더니 누나가 맨발로 뛰어나와 반겼다. 그 뒤

두번 세번 찾아 갔더니 “왔니, 언제 제대하니?” 하고 물었다.

정기 휴가 때가 되어 부대사정으로 휴가가 연기 되거나 같이 전입한 동료들이 다 가는데

군번이 조금 늦은 탓으로 자기만 못가게 되면 꿍하니 말도 없고 별로 웃지도 않고 막사

뒤편으로 가서 한숨을 몰아 쉬는 사병도 있다.

휴가나 외출을 가는 사병들은 친정 나들이가는 새댁마냥 얼굴이 환해 지고 날개를 단듯이

발걸음 가볍게 떠나갔다. 그러나 귀대 날짜가 가까워 오면 마음이 초조해 지고 남은 날들이

아쉽고 돌아오는 걸음은 천근 무게를 진것 처럼 느리고 무거웠다. 결혼한 사람들이나 연인을 둔

사병들은 돌아오기가 더 힘들어 가끔 씩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외출을 나갔던 한 사병이 귀대하기가 싫어져 꾸물대다가 늦게 마음을 고쳐 먹고 역으로 갔다.

마지막 열차가 떠난 뒤였고 급히 고속버스장으로 갔더니 막차시간도 지난 뒤였다.자기 가진

돈과 친구것 까지 다 털어서 장거리 택시여행을 해서 부대에 도착했으나 귀대시간이 지났다고

기합을 받고 한달간 외출 금지 명령을 받았다고 투털 댔다.

16,

 

유격훈련은 군대생활 전체를 통해 가장 힘들고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 훈련이였다.

훈련소의 유격훈련장은 적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처음 대하는 훈련병들에게 겁나는 대상

이였다. 신병으로 전입하여 몇개월 만에 유격훈련을 받으려 가야 했다. 훈련을 받고 온

선배들이 한결같이 혀를 내두르며 어렵다고 떠들어 대니 떠나기 전날밤은 걱정이 되었다.

유격훈련장에서는 모든 군인이 계급과 명찰을 떼고 몇번 ‘올빼미’가 되었다. 훈련은 ‘피티

체조’로 부터 시작됐다. 체조는 한 동작마다 힘이 들었다. 한 사람만이라도 동작을 잘못 하거나

호각소리 구령을 맟추지 못하면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반복 시켰다. 그야말로 ‘피가 나는 체조’

였다. 웬만한 체력은 이 체조만으로도 지치기에 충분 했다.

유격훈련장이 먼데 설치 되어서 무더운 날씨에 앞에 총하고 달려가면 한 수통의 물도

부족했다.그래서 수통에 소금을 넣도록 검사를 했다.

훈련장은 강을 끼고 천연적인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설치되어 있었다. ‘두줄 타기’ ‘세줄

타기’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편 산등성이에 연결 되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찔했다. 조금 느리기는 했으나 침착하게 잘 넘겼다. ‘외줄 타기’는 균형을 못 잡고 도중에 실패

했다. 외줄 타기는 많은 올빼미들이 떨어졌다. 실패한 자들은 그 부대원이 다 끝나 다른데로

이동 할때까지 ‘쪼그려 뛰기’ 기합을 받아야 했다.

‘담력 배양대’는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서 자일을 잡고 오르는 데 귀바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요란 했다. 맨 위에 올라 서서 양팔을 벌렸을 때 아찔하여 현기증을 느꼈다.

산위에서 강 건너편 모래사장 까지 쇠줄을 설치하고 도르래를 붙잡고 내려가서 조교의

신호로 강물에 떨어지는 것이 ‘하강’ 이였다. 겁이 나서 미리 손을 놓으면 깊은 강물에 빠져

위험하고 너무 늦게 손을 놓으면 얕은 물이나 모래벌에 떨어지는 올빼미도 있었다. 실패하면

어김없이 기합을 받아야 했고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독려 했다.

훈련장을 긴장하여 뛰어 다니다 보면 여름의 긴 해가 짧았다. 얼굴은 검게 타고 눈만

 

8

 

초롱초롱하여 진짜 올빼미가 되어 돌아왔다.

17,

 

낮에는 햇빛이 비춰서 괜찮았다. 저녁무렵 부터 날씨가 돌변하여 바람이 불고 기온은 영화로

급강화 했다. 통신대 가설 차량이 산밑에 도착한것은 해질 무렵이였다.

00산 320 고지 명일 새벽 04시 부터, 대대 방어 훈련이 시작 된다. 그 훈련에 대비하여

밤세워 전화선을 가설해야 되었다. 훈련시에 적군이나 포 지원 같은 것은 대개 가상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유 무선 통신만은 가상이라는 것이 있을수 없었다. 그래서 야외 훈련하면

통신훈련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방 포진지에서 산 정상의 대대 ‘오피’까지 선을 깔고 거기서

가장 멀리 떨어 진 좌측 3중대 까지 선을 넣고 산 넘어 전차 주둔지 까지 장장 5마일을 부대원이

분담해서 유선을 깔아야 했다. 전화선을 깔아야 할 구간별로 조를 편성 하였다.

지상병에게 유선 1마일 통을 지게하고 포 진지 위치를 찾아 출발 할때 어금니를 지긋이

물었다. 유선을 절약하기 위해 지름길을 택해야 하고 길에서 보이지 않게 선을 가설하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을 뚫어 가야했다. 산 기슭은 가시 덤불로 뒤 덮혀 헤쳐나가기 힘들었다.

앞의 지상병이 지나며 꾸부린 나무가 펴지면서 내 얼굴을 때렸다.

골짜기에 남아 있는 눈이 얼어서 미끄러웠다. 이마와 등에서는 땀이 나도 손은 시리었다

먼 거리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어 졌다. 낮에 지형 정찰을 하여 익혀 두었지만 어느

봉우리가 우리 목표고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조그마한 후라쉬가 우리의 눈이 되었다. 산에

높이 오를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웠다. 산중턱 관목 사이에 바람을 피해 앉아 이마의 땀을

훔쳤다. 솔잎을 조금 뜯어 깨물며 갈증을 달랬다. 불빛이 가물거리는 먼데 산밑의 농가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선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확인하고 올라가야 할 고지를 확인하기 위해 어둠에 덮인 산을

둘러 보았다. 산의 정상 쪽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의 불빛이였다. 유선통을

다시 메게하고 불빛이 비추었던 방향으로 선을 깔았다. 후래쉬는 밧데리가 다 되어 반디불 처럼

되었다. 세찬 바람이 코끝을 때렸다. 나무그루에 넘어지고 비탈진 빙판에 넘어지며 고지를 향해

정신없이 선을 깔았다.

 

18,

 

어떤 집단이든지 자기들만 사용하는 은어나 속어가 있기마련이다. 그러한 언어를 통해서 그

집단의 내면 세계를 드러다 볼수도 있는 것이다.

‘군발이’라는 말은 오히려 일반인들이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발에 군화를 신었다는

원래의 뜻이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한 군인을 욕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훈련소에 들어가면’나발

불지마’ 퉁소 부네’ 하는 말을 듣는다. 잔소리가 많다든가 변명하지 말라는 말로 쓰였다. ‘깡통

계급장’은 이등병에서 하사관 까지 계급장이 양철 제품이라는 뜻이고 ‘노랑 밥튀기’는 준사관,

‘하얀 밥튀기’는 위관급, ‘말똥’은 령관급을 말했다. 별은 함부로 건드릴수 없어 ‘스타’라고

불렀든것 같다.

‘말뚝’은 장기 복무자를 뜻한다. 장기 복무자는 주로 하사관들이 많아서 하사관들에 대한

경멸적인 언어로 쓰였다. 졸병 때 말뚝 박으면 기합도 안받고 보초도 안 선다는 말에 넘어가

말뚝 박는 도장을 찍고 나중에 자세히 내용을 알고 울면서 말뚝 빼달라고 조르던 사병이

있었다.

‘짬빵’은 밥과 국을 말은 졸병의 식사를 말하고 ‘딱까리’는 식사 당번을 뜻했다. 특히 장교들의

식사 시중을 드는 사병을 딱까리라 불렀다. 지휘관의 업무 수행상 불편을 덜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심부름은 있을수 있는 일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휘관의 사택 까지 가서 사모님과

식구들의 시중 까지 들어야 했던 어떤 ‘딱까리’는 완전 군장하고 연병장 구보하는 것이 정신

위생상 더 나을 것이라는 푸념을 했다.

좀 순진하고 약싹 빠르지 못하면 ‘고문관’ 딱지가 붙고 나이가 든 고령자는 ‘영감’이라 불렀다.

피복 보급계는 ‘걸레 장수’고 ‘통화중’은 교환병이고 ‘달구지’ 가 운전병, ‘핀셋트’는 의무병,

‘골병대’는 공병, ‘백 바가지’는 헌병, ‘일빵빵’은 보병을 뜻하고 어떤 업무의 선임자를 ‘아비’라

하고 그 조수를 ‘새끼’라고 불렀다. 면회 온 아가씨 더러 ‘깔판’이니 ‘깔치’니 하는 것은 좀

심하다 싶었다.

‘앙꼬 없는 빵’은 맛이 없거나 재미 없다는 뜻이고 고기국이 건데기가 없을 때는 돼지가 워카

신고 지났다고 떠들고 어쩌다 고기 덩이를 찾으면 ‘육군 대장’이라 좋아라 했다. ‘쇠발의 피’

개미 다리의 탄띠’나 ‘모기 다리 워카’는 걸 맞지 않고 상대가 안된다는 뜻으로 쓰였다.

‘개판’을 치다가 ‘구사리’ 먹으면 다행이나 ‘쪼인트(군화 발로 정강이 차기)’ 나 ‘빠다’ 맞으면

자기만 서럽다고 말했다. ‘헬레 헬레’ ‘빌빌’ 싸다가는 고문관 되기 쉽다고 했다. 신병생활이

고약한 ‘시집 살이’ 니까. 휴가는 ‘친정 나들이’가 되고 ‘엄호 사격’은 지원 협조의 뜻으로 사용

 

9

 

하였다. ‘은팔찌(수갑)’차고 ‘남한 산성( 군대 교도소)’ 가는 날은 ‘인생 종 친다’고 말했다.

개인 화기는 군인에게는 제이의 생명이라고 항시 닦고 기름 치고 수입(청소)해야 한다고 강조

했다. 총구를 닦는 ‘꽂을 대’는 남성을 뜻하고 실탄을 넣는 ‘약실’은 여성을 뜻했다. 사병들은

‘꽂을 대 수입 불량’ ‘약실 이상 무’ 하고 낄낄대며 웃었다.

 

19,

 

같이 자고 먹고 어려움을 함께 한 군대의 동료나 선후배들은 한 식구라 부를만 했다.

누구에게나 군 생활은 잊고 싶은 추억이였는지 제대하고 가면 영영 소식없는 이별이였다.

‘외팔이’ 별명을 가진 허병장은 나와 가까이 지낸 부산 친구 였다. 유선고장 수리를 나가

전신주에서 떨어져 한 팔을 싸매고 다닐 때 ‘외팔이’가 되었다. 고참들 앞에서도 할소리 다 하는

의리의 사나이 였다. ‘일팔육’이라 부르던 조병장은 평택 출신이였다. 키가 크고 말담 좋고 속도

좋았다. 조씨라는 성에 ㅅ받침이 붙어 ‘일팔육’ 되었다. 자기 스스로도 일팔육이라 했으니

어지간한 친구였다.

순하기 만 했던 대전의 ‘작은 명수’ 노래 잘 부르던 정읍의 ‘정병장’ ‘코주부’는 서울 아이

였다. 작은 체구에 코가 커서 내무반에 코부터 들어 온다고 놀려 주었다. ‘걸레’는 전주 토박인데

노래를 썩 잘 불렀다. 보급계에서 헌옷을 만지작 댄다는 이름이였다. 내 조수였던 ‘넙적이,

장일병’ 어려운 업무를 하필 자기에게 물러 주었다고 욕하지는 안했는지, 술 잘마시고 사내답든

‘국주사’ 자주 찾아 오든 그 아가씨와 결혼을 했을까. 자주 웃든 ‘지상병’은 태권도 유단자라도

횡포 부리는 일이 없었다.

‘꺽다리’ 김병장님 부산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 지, 부지런하고 마음씨 좋던 선산 출신

‘김병장;은 제대하고 편지도 없었다. ‘바리톤’ 김병장은 교환병 근무에 무척 충실했다. ‘막나니’

김병장은 의리를 곧잘 찾았다. 술을 마시면 나이를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정영감’ 술을

마시면 심술을 부리던 ‘심병장;등 모두 잊을수 없는 보병의 가족들이다.

안경잡이 오상병은 ‘오하라 일등병’라 불렀다. 인상파 ‘무라이 장’은 기발한 말을 자주 한다고

‘방통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레고리 팩’ 윤병장. ‘쌩 영감’ 전병장. 입담있게 말 잘하는

‘달구지 송일병. 대학 동문이였던 김병장, 이기적인 태도가 못 마땅 했지만 좋은 친구였다.

추운날 짬빵통을 옮기던 두 박일병 군대생활은 잘 마쳤는지, 따끈한 차 한잔으로 제대를 축하해

주던 딱까리 서일병, 말이 별로 없던 채일병은 사회에서 좀 달라 젔을지 궁금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들이 나를 기억 할지 모르나 나는 이 되새김으로 한번 더 그들의 얼굴을

떠 올려 본다.

 

20,

 

00년 0월 0일, 지급받은 피복을 지난 날의 추억과 함께 ‘따불빽’에 쑤셔 넣고 통일화가 너무

커서 발을 통일화에 맞추어 신고 수용연대에서 훈련소 까지 먼길을 발 뒷꿈치가 까져

절뚝거리며 팔려가는 날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 쭈그러 진 들통에 부대원의 식사를 타가지고 돌아오다가 미끄러져 밥을 다

엎지르고 어찌할줄 모르고 서 있을 때, 장마철 천막 막사가 세서 젖은 모포를 덮고 잠을 이루려

할 때, 폭풍우 몰아치는 심야에 ‘판초’우의를 걸치고 떨면서 보초를 설 때, 감기 몸살로 누워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워 할때, 백 십리 미끄러운 산길을 하루에 행군하며 낙오되지 않으려고

기를 쓸 때도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 더욱 어려웠는지, 비가 오는 날 어려운 고비가 겹친 것인지 알수 없으나 졸병의

마음에는 더욱 깊이 각인 되었다.

00년 0월 0일, 지루한 장마철 여행 승객에서 하차 하라는 ‘자유의 반환 티켓’을 쥐고 군문을

나올 때도 눈 섞인 비가 내렸다.

나의 졸병생활은 비 오는 날 시작해서 비 오는 날 끝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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