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 소리

nohryo 2022.10.12 18:27 조회 수 : 52

꽈리 소리

 

잘 익은 호박처럼 넉넉한 지인에게서 꽈리 한 다발을 선물 받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꽈리입니다. 어찌 이리 잘 키웠는지 열 두엇 가쟁이에 호롱불 같은

꽈리가 줄줄이 달렸습니다. 한 70~80 송이는 돼 보입니다. 주홍빛 붉은 꽃받침을 위로

부풀려 모아 조심스레 열매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속에 공주같이 고아한 주홍 구슬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내 진주 귀걸이만한 빛나는 붉은 구슬이 신비로움을 더 합니다. 마르면

부셔져버릴 잎들을 잘라내고 가쟁이를 보기좋게 추려 묶어서 거꾸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

꽈리로 인해 나는 한동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우리 자랄 때엔 집 주변에 꽈리나무가 흔했습니다. 별 가지고 놀 거리가 없던 시절, 여자

아이들은 꽈리가 익으면 꽈리를 감쌌던 꽃받침을 열고 꽈리를 떼어냈습니다. 손으로 살살

주물러 말랑해진 꽈리 속의 씨들을 바늘로 살살 끄집어 내고, 입 속에서 빈 꽈리에 공기를

넣어가며 뽀드득 뽀드득 부는 것은 아주 기술을 요하는 놀이였습니다. 물론 나는 잘 하지

못했지요. 꽃받침에서 꽈리를 떼어 낼 때부터 내게는 어려웠거든요. 잘못하면 꽈리구멍

입구가 찢어지기 쉽고, 잘 떼어냈어도 그 속을 깨끗이 파내는 일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사실 꽈리를 몇 번 못 불어 보았어요.

 

동의 보감에 ‘꽈리는 성질은 평하고 차며 맛이 시고 독이 없다’고 했습니다. 해열과 해독,

이뇨작용에 효능이 있고 인통, 황달, 이질, 부종, 정창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의원이

멀던시절, 집집마다 처마밑에 말린 꽈리 몇 가닥씩 매달아 놓는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여름 내 더위에 지쳤던 누런 풀잎사이에 빠알갛게 익은 꽈리 열매들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곤했지요. 꽈리 선물을 한 그 지인은 꽈리를 먹기도 한다는데 나는 꽈리를 가지고

놀 줄만 알았지 먹는것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뒤뜰엔 직접 담은 고추장, 된장, 간장이 담긴

장독대와 꽈리, 봉숭아, 맨드라미, 등이 우거져있고 담벽에는 연두빛 비릿한 물기 머금은

조선호박이나 조선오이도 매달려 튼실하게 크고 있습니다.

아들네, 딸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다 모인 어느 날, 나는 선물 받은 꽈리다발을 식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손주들뿐 아니라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1.5세인 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까지 모두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 꽈리를 가지고 놀던것을 시범으로 보여주려고 들떴습니다.

그러나 내 의욕이 무색하게 폼나게 꽈리소리를 내 보려던 할머니의 시도는 여지없이 ‘쉬~익,

쉭’ 바람빠지는 소리만 납니다.

“에~~이!…”

아이들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동요합니다.

 

“가만 있어봐!”

나는 급히, 달아나려는 아이들을 제지하며 입속의 꽈리에 바람을 집어넣고 앞 이로 지그시

누릅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납니다. 꺼내보니 꽈리의 입구가 이미 찢어져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꽈리 하나를 사알살 주물러 바늘로 속의 씨들을 빼냈습니다. 번쩍 번쩍한 옷에

검은 모자를 쓴 마술사의 신기한 마술을 기대하는 듯, 나를 주시하는 손주들의 초롱 초롱한

눈을 보며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부담까지 밀려옵니다.

“자, 분다!”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나의 입에 꼿힙니다. 이 번에도 ‘쉬~~익…’ 하고 실패라고 말합니다.

나는 손주들의 인내심을 더 이상 붙잡을 힘을 잃고 꼬리를 내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또

다른 꽈리의 주홍빛 너울을 떼어내고 그 속을 파내고 있습니다. 꼭 성공해서 손주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우리시대의 자연 장난감의 정겹고 신기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뽀드득, 꽈악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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