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하盛夏의 뜨락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텃밭이 소란하다.
열볕 아래 늘어져있던 채소들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다. 다리도 쭈-욱 펴고 뿌리도 길게
내려뻗어본다. 깻잎도, 토마토 잎새도 풋풋하게 살아나고 있다. 늦게 심어 아직 어린 고추 모
잎새사이로 손가락만한 고추 몇개 매달려 있는것이 보인다. 젖은 고랑엔 길게 몸을 늘인
지렁이 밀고 지나간 자국 남기며 느리게 나아가고, 이리 저리 마른 땅 골라 내달리는 개미도
분주하다. 둥지를 들락이는 벌한 마리 윙- 윙 내 머리 위를 맴돈다. 묵언默言 속에서 삶의
치열함이 뜰에 가득하다.
진초록 가는 허리를 곧추세우려 서로 몸 부비고 기대어 선 손바닥만한 부추밭 언저리에
서면 그 특유의 알싸한 부추향기가 엷게 맡아진다. 제 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선 머윗대가
키 큰 풀 틈에서 깨꿈발을 하고 자신의 둥근잎을 한껏 치켜 올리고 있다. 초봄에 아이
손바닥만하게 삐죽삐죽 터져나오는 새 싹을 따서 삶아 나물로 무쳐먹으면 독특한 한약
냄새가 나던 가시오가피 나무가 하얗게 꽃피워내고 진 자리에 열매 송아리를 물고 익어가고
있다.
텃밭에 올 때마다 나는 자라고있는 작물들의 안위 부 터 살피게된다. 늦은 봄에 사다 심은
상추 모종이 이제야 자리를 잡았나싶게 연한 잎을 펴 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나와보니 상추밭이 몽땅 폐허가 되다시피 망가져 있었다. 한 포기밖에 없는 딸기나무가
무성히 자라 예쁘게 꽃을 피우더니 열매도 몇 개가 달렸다. 매일 핑크빛으로 부풀고있는
딸기열매를 한 이틀만 더 있으면 맛볼 수 있으리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죄다 이빨자국을
내어서 먹다 버린 것들이 밭고랑에 뒹굴고 있는것을 발견하고 나는 경악했다. 누구의
소위인지 심증은 있지만 밝혀봐야 신통한 대처방안도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토끼나
다람쥐는 여전히 텃밭을 들락이며 아무짓도 안 했다는 듯 주인인 내게 미안해 하지도 않고
뉘우치는 빛도 찾아 볼 수 없어 내 부아를 더 돋구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 땅에 나만 주인은 아니었다. 원래 그 땅을 터전으로 살고있는
토끼나 다람쥐를 비롯해 집 뒤 처마밑 둥지에 새끼를 키우며 활발히 먹이를 찾아다니는
벌이나 새의 터전도 된다는 생각에 미치니 슬며시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거 말고라도 내겐
먹을것이 많은데… 내가 너무 옹졸했나?
밤톨만 하던 토마토열매가 아이 주먹만하게 커지고 있다. 어떤 것은 한 쪽이 붉어지는
것도 보인다. 다 익을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려야 할텐데 또 뺏기기 전에 미리 따 둘까 내
마음에 또 다시 내 것이라는 욕심이 꿈틀댄다.
여름은 눈 가는 곳 어디에나 생명으로 가득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여름의긴
해 아래 나뭇잎의 색이 짙어지고 열매들은 그 몸집을 키운다. 모든 생명체가 성장하는 계절,
오늘도 자연은 나를 가르치고 나는 자연에게서 배운다.
바람이 흔들어야 흔들리는 가지 끝에 작은 흔들림이 묻어난다. 나뭇잎보다 작은 박새 한
마리 흰빛이 눈부시다. 성하의 뜨락엔 온갖 생명의 활기찬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모기떼의 극성스런 공격에 내 손등과 이마는 원치않은 보시의 자국으로 벌겋게 부어
오르고… .
여름이 뜨거운 계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