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아일랜드

웹관리자 2023.06.19 21:32 조회 수 : 29

엔젤 아일랜드

 

 

 

 

 

 

   

 

                                                                                                                                                                                           전준성

 

 

선상에서 본 엔젤 아일랜드는 작고 깊었으며 아늑해 보였다. 바다 바람은 서늘했지만, 향기로웠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새들이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오롯한 빛이 모여 포구를 환하게 감쌌다. 섬은 말 그대로 천사들이 사는 섬처럼 한가해 평화로워 보였다. 섬 전체가 두 팔 벌려 우리 모두를 환영하는 듯했다.

 

한인 이민사 백 년 기념 책자를 출간하기 위해 자료 수집 차 미국을 떠돈 지 이 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엔젤 아일랜드에 소재한 1900년도 초기 이민국 건물을 찾아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살피고 있었다. 대니 킴이라는 한인 2세 자원 봉사자는 한인들의 이민사를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이곳 엔젤 아일랜드 이민국을 안내하겠다고 제안했다. 사십 대 중반의 대니는 샌프란시스코 한인회를 통해 내가 한인들의 이민 역사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서 이곳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이민국 건물은 철거 예정이었습니다. 낡고 허름해 위험하기도 하고, 또 미관상 좋지 않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요. 그런데 숨겨진 진짜 이유는 거기다 리조트를 건립할 예정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이익만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접근방법이었지요. 그리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부끄러웠던 이민 역사를 지우고 싶어 하는 심리도 깔려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던, 그 사실을 알게 된 지역 사학자와 중국인들이 역사적 건물을 살려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지요. 오랫동안 치열한 법정 공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들이 자주 있지요? 아파트 공사하다 옛날 유적이 나와 공사를 중단하는 그런 일들이요. 이 기자님은 여기에 얼마나 머무를 계획이신가요?” 대니가 물었다.

 

, 일 주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그 다음은 동부 쪽으로 갈 계획입니다만…….” 내가 말했다.

 

그러시군요. 동부에 가면 엘리스 아일랜드는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곳 엔젤 아일랜드와는 좋은 비교가 될 것입니다. 가보셨나요?”

 

, 취재 때문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습니다만…….” 나는 말꼬리를 내렸다.

 

잘 아시겠지만, 이민이라는 것이 입국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니, 들어오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이민국의 태도와 대접이 달랐습니다. 동부는 유럽인들이, 이곳 서부는 주로 동양인들이 이용했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시죠?”

 

한인들의 이민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엔젤 아일랜드를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대니는 여러 번 강조했다. 거기에 가면 재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하고 그가 힘주어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티뷰론 선착장에서 만나 함께 페리에 올랐다. 페리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는데, 이들 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수천 년 동안 함께 어울려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백인이 보면 서로 비슷한 느낌이겠지만, 중국인이 훨씬 외향적이며 일본인은 조용한 편이고 한국인은 이들의 중간 정도였는데, 지정학적으로 보아도 그럴듯한 이론이 되는 듯했다. 섬에 상륙하자, 대니는 노련한 조교처럼 내가 느끼고 있던 엔젤 아일랜드의 환상을 깨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백 년 전에도 여기 보이는 세 민족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 엔젤 아일랜드에 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같이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민자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민국 직원들의 강압적인 통제 속에서 이 길을 따라 저기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걸었습니다.”

 

대니가 손을 들어 언덕 넘어서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은 해를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손차양을 만들어 건물을 보려 했지만 그리 도움은 되지 않았다. 대니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길은 미국 입국을 위한 행군로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내가 코를 찌를 듯 달려들었다. 건물 내부는 거미줄로 덮여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 하나 없는 유령의 집과 같았다. 찬란하던 영화를 뒤로 한 채 몰락한 오래된 왕국의 잔해처럼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깨질 것만 같았다. 우리는 거미줄을 털어내며 힘들게 앞으로 나아갔다. 대니가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하던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무실에는 그 당시 사무 처리를 하던 서류 더미와 타자기 등이 방치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앞으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있을 겁니다. 지금 시와 재정에 대한 협의가 진행 중입니다. 우리 커뮤니티가 앞장서서 우선 청소를 할 예정입니다. 아마 내년 정도에 다시 오시면 확 달라져 있을 겁니다.”

 

안내하던 대니 자신도 열악한 환경이 민망한 듯 앞으로의 계획을 두서없이 말했다. 우리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두운 지하실 통로를 따라 작은 방이 즐비하게 붙어있었고, 통로 옆으로 벤치가 방과 방 사이에 놓여있었다. 이민자들은 벤치에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 방들은 이민자들을 조사하거나 잠시 구금을 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습니다. 슬픈 사연들이 이 방들을 통해 많이 나왔지요. 혹시 이 방에서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은 여자 이야기를 아십니까? 책으로도 나왔는데 참 슬픈 이야기였어요.” 대니가 말했다.

 

벤치에 앉아 초조하게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이민자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이민자의 이야기가 이곳에 있을 것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벽에 빼곡하게 쓰인 낙서를 보았다. 대부분이 중국인들의 낙서였지만, 드문드문 일본인들의 낙서도 보였다. 내가 낙서에 관심을 보이자 대니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낙서 중에는 아름다운 시도 있고 대단히 철학적인 문구도 있지만, 대부분 신세를 한탄하는 슬픈 내용이지요. 영어로 번역한 책도 있습니다.” 대니가 말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고 싶군요.” 내가 말했다.

 

도서관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민자들은 적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을 이 통로에 앉아 낙서하며 심사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최장 기록이 이 년으로 나와 있습니다. 참 가혹한 시간이었을 거예요.”

 

나는 100년도 넘은 낙서를 보면서, 오래전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들은 이민국 직원들의 경멸 어린 눈총을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왔을 것이다.

 

, 그리고 낙서 중에 한국말로 쓰인 것도 더러 있습니다. 자 보시죠. “ 대니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한국어로 쓰인 짤막한 낙서를 가리켰다.

 

- 고향, 어머니, 김영범

 

혹시 이분 입국 기록을 볼 수 있나요?” 내가 물었다.

 

오래전 이곳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로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는데, 그때 이분 기록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로는, 김영범 씨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들과 섞여 유타 주에 있는 광산 등을 전전하다 콜로라도를 마지막으로 기록이 없어졌습니다.” 대니가 아쉬운 듯 말했다.

 

대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긴 여행을 준비해야 하는 가벼운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

 

 

*

 

 

일정이 변경되었다. 원래 일정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필라델피아와 프린스톤 그리고 뉴욕을 돌며 서재필과 이승만 등이 남긴 발자취를 기록하려 했었는데, 콜로라도 주 덴버시를 경유해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로 결정했다. 일정을 바꾸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 소재한 도서관에서 보낸 이메일 때문이었다. 대니의 도움을 받아 콜로라도 주립도서관에 공문을 띄워 초기 한국인들의 입국 경위나 기록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다는 취지의 부탁을 했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이 온 것이었다. 덴버 도서관 사서인 샌디라는 여자로부터 온 이메일에는 1900년도 초기 콜로라도에 정착한 한인들의 기록을 덴버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열람할 수도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일정을 바꿀 만큼 소중한 자료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니는 자발적으로 덴버 시에 소재한 한 한인 신문사 지사에 연락해 내 취재 일정을 통보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도 해 주었다. 신문사는 인근 대학 지질학과 교수인 성민규를 추천했다.

 

콜로라도 주 덴버공항을 나오자, 신문사 사장인 김정수가 피켓을 흔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글자의 크기가 환영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처럼 피켓에는 대한민국 이정식 기자 반갑습니다.’라는 환영의 글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김정수는 요란스럽게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김정수의 금테 안경과 듬성듬성 난 머리카락이 부조화를 이루며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지난번 전화 통화를 하며 그의 중후한 목소리 때문에 검은색 정장에 중절모를 쓴 부유한 사장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각인된 그의 모습과 실제 인상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좀 혼란스러우시죠. 헤헤헤. 자주 그럽니다.” 김정수가 내 표정을 읽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껄껄대고 웃었다.

 

김정수는 도서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계속 말을 건넸다. 그는 덴버시와 인근 위성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에게 국내 주류 신문과 광고지 등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는 젊어서 식료품 장사를 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하는데, 은퇴한 후에는 그동안 간절히 하고 싶었던 신문사를 맡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아무 욕심 없이 그동안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어쩐지 공허하게 들렸다. 김정수는 나를 덴버 도서관에 내려주면서, 두 시간 후 이곳으로 차를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샌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내가 찾으려고 하는 자료를 미리 열람해 내가 처음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시간과 수고를 덜어주었다. 샌디가 명단을 펼치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여기 오리지널 사망자 명단에는 한국 사람은 사실 없었습니다. 국적이 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이들 중 한국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키가 큰 금발의 샌디는 자기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들이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샌디는 아이들의 성이 김과 박이라고 했는데, 일본인들은 그런 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때 등록된 사람 중에는 서류상으로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이지만 이름만으로도 한국인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광산 폭발사고로 숨진 한국인들을 구분해 정리하면서 이들이 남긴 유품이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온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이들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대니라는 분이 이 기자께서 이런 취지의 일을 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냈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샌디는 그간 자기가 한 일을 설명하면서 도서관 지하에 가면 이들 사망자의 유품을 볼 수 있다며 나를 그리로 안내했다.

 

지금까지 국가별로 유품들을 정리했는데 일본인이나 중국인 중에는 가족이나 국가가 유품을 찾아 시신과 함께 본국으로 가져간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껏 한국인은 없었어요.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아요.”

 

나는 샌디가 정리한 한국인들의 100년 전 유품을 보고 있었다. 유품은 옷, 명찰, 도구 그리고 사진과 노트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영문으로 표기된 성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어 김 씨나 혹은 박 씨를 제외하고는 이름만 보고는 정말 한국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샌디가 낡은 노트를 가리키며 펴 보라고 말했다.

 

이름이 'Y. B. Kim'이라는 분인데 불행히도 풀네임은 없어요. 저는 그저 추측만 할 뿐이지요.”

 

샌디는 일기 같다고 하면서 자기는 잘 읽지 못하니 읽어보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노트를 펴니 종이 곰팡내가 올라왔다. 노트는 오랜 시간 동안 습도가 높은 곳에 방치된 듯 보였다. 습기가 노트 전체를 파고들어 변색되고 탈색되어 이미 종이로서의 수명을 다해 보였다. 첫 장을 넘기니 노트의 일부가 부서져 부스스 떨어져 나갔다. 이를 본 샌디가 황급히 내게 말했다.

 

노트를 덮는 것이 좋겠네요. 만지면 부서지니 이미 종이로서의 생명이 다했어요. 이것을 대비해 오래전에 사진 촬영을 해 놓았으니 그것을 보도록 하지요.”

 

샌디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안내해 미리 준비한 USB 카드를 그녀의 컴퓨터에 삽입했다. 많은 수의 파일이 카드에 저장되어 있었다. 샌디가 내게 마우스를 건네며 천천히 보세요, 하며 내게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마우스를 손에 쥔 나는 가벼운 설렘으로 호흡이 빨라짐을 느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파일을 오픈하려 했는데, 김정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아쉬운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샌디는 내게 USB 카드를 건네주며 나중에 돌려주세요. 굳럭, 이라 말했다. 나는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

 

 

김정수는 저녁 식사 때 인근 대학 지질학과 교수인 성민규를 소개했다. 성민규는 50대 중반에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두꺼운 입술은 다소 고집스러운 느낌을 받았지만, 안경 너머에 감춰진 날카로운 눈매가 매서웠다. 간간이 터지는 사교적인 언사 때문에 그가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떠버리에 사교적이며 푼수기까지 있는 김정수가 성민규 보다는 천진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는 김정수와 더불어 본국에 있는 여러 정치인과도 서로 연락을 하며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김정수가 나와 성민규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성 교수를 추천한 것은 성 교수가 그동안 해왔던 일이 이 기자님의 취재 방향과 잘 맞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 교수께서 그간에 벌어진 일을 요약하면, 우리 이야기가 아주 편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부탁합니다.”

 

성 교수는 뒷머리를 긁으며 나와 김정수를 번갈아 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창밖으로 석양이 넓게 퍼져 어느새 황량한 거리를 빨갛게 달구는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곳 콜로라도 지역은 1800년도 말부터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대륙 횡단 철로와 광산에 취업해 이주해 왔습니다. 조선인들은 주로 일본인 브로커들이 일본인으로 포함시켜 미국에 입국시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때 우리는……, 그러니까 조선이라는 나라가 대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미국인들은 조선인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구분하고 있었을 겁니다.“

 

김정수는 성민규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는데 과장된 행동 같아 눈에 거슬렸다. 지금까지 내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투가 과장되어 거북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것은 뭔가 수상한 일이 내부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였다. 김정수의 과장된 행동은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경계감을 불러일으켰다. 성민규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 연구 분야 중 하나가 이 근처 지질을 분석해 광맥을 찾는 일입니다. 얼마 전 저는 학생들과 근처 지질 조사를 나갔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철거 예정 중인 공동묘지에서 다 쓰러져가는 묘비를 발견했는데 그게 놀랍게도 한국말로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 저희가 찍은 사진을 한번 보시지요.” 성민규는 학생들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내게 내밀었다.

 

- 인천 김영범

 

다섯 글자 한글이 초라한 묘비명 속에서도 빛을 내듯 반짝였고, 김영범이라는 이름이 내 가슴을 치며 달려들었다. 김영범……김영범……, 나는 엔젤 아일랜드에서 보았던 한글 낙서 중에 내 머릿속에 각인된 김영범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혹시 이들이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성민규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어둠이 거리를 지우듯 넓게 퍼져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묘지 관리 업체를 만나 묘지의 주인인 김영범의 내력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자료를 보자고 해도 연락이 없고 직접 찾아가니 대꾸도 안 하고 해서 이들을 설득하는데 애 많이 먹었습니다.”

 

김정수가 그간 있었던 자료 찾기 작업에 대한 고충을 말했는데도 성민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얼마 전 지난 백 년간 이 지역에 일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명단과 그동안 광산 사고 피해자의 명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묘지의 주인인 김영범 씨가 1913131일 프리메로 광산 폭발 사고 사망자 명단에 올라온 것을 바로 며칠 전에 확인했습니다. , 보시죠.” 성민규가 말했다.

 

성민규가 내게 명단을 건네줄 때, 김정수가 다시 말을 이어 받았다. 이들이 서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사전에 입을 맞추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명단을 흟어보며 김정수의 말을 들었다. 명단에 있는 이름 모두는 샌디가 정리하고 있던 자료와 마찬가지로 풀네임 대신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말을 아꼈다. 김정수가 말을 계속했다.

 

그날 180여 명이 광산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한국 사람이 8명 더 있었다는 기록도 아울러 찾아냈습니다. 이분들 묘는 아직 찾을 수 없었습니다만……. 성 교수께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인근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져 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최근 불어 닥친 재개발 때문에 그쪽 일부가 주택 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분들이라 그냥 이런 식으로 폐기될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이참에 방송도 하고, 신문에도 내 이 절박한 사정을 본국에 알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래전에 이렇게 황량한 탄광에 와서 쓸쓸하게 돌아가셨고 이제는 철거될 운명이라고 하니 저는 눈물이 다 납니다.”김정수는 다시 과도한 몸짓으로 자신의 슬픔을 포장하는 듯했고, 나는 거북한 마음만 들었다. 성민규가 다시 김정수의 말을 가로막았다.

 

혹시 이분 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립투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성민규가 설득하듯 말했다.

 

독립투사요?” 나는 놀라 소리치듯 말했다.

 

, 그렇습니다. 옛날 미국에 이민 온 분 중에는 독립 자금을 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독립 자금을 냈다는 것은 독립투사들이나 매한가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그런 분들을 찾아내 본국에 알리고 싶습니다.” 나는 문득, 이들의 말을 들으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호텔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으며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긴 비행시간과 여러 차례 미팅 때문에 많이 피곤했다.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따면서 책상에 앉았다. 한 모금 들이키며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주머니 안에 넣은 USB 카드가 생각났다. 카드를 꺼내 컴퓨터에 삽입해 저장된 파일을 열어보았다. 가벼운 울림이 머릿속에 퍼졌다.

USB 카드에는 다수의 파일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샌디는 페이지 순서대로 사진을 찍어 망자의 이니셜과 넘버를 이어 파일 이름을 YBK01, 02, 03…… 식으로 붙여 정리했다. YBK01은 일기의 겉장이고, YBK02는 일기의 첫 장이었다. 마지막 파일 넘버가 198이니 적어도 190장 이상의 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샌디가 도서관에서 보여준 원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파일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해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일기의 앞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그의 입국 과정과 미국에서의 행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았다. 우선 쉽게 해독할 수 있는 부분만을 추려보았다.

일기의 내용은 크게 하와이와 멕시코 유카탄 시절 그리고 미국 유타와 콜로라도 시절로 구분되었다. 하와이와 멕시코 부분은 훼손된 정도가 심해 해독할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적었지만, (YB Kim)가 콜로라도 탄광 사고 직전까지 쓴 내용은 다행히도 손상의 정도가 크지 않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1910년에 하와이에 입국해, 1911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거쳐 1912년 유타에서 그리고 1913년 일기의 마지막까지 콜로라도에서 보냈다. 훼손된 일기 속 조각난 시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와이와 멕시코 입국, 그리고 멕시코와 유타 입국 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기를 통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선을 바탕으로 몇 가지 추론은 할 수 있었다.

우선, 그가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통하지 않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거친 이유였다. 거리상 샌프란시스코가 훨씬 가까운데도 그는 먼 곳으로 돌아갔다. 그럴만한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그 당시 자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그때 엔젤 아일랜드 이민국에 대형 화재가 발생되어 건물 전체가 소실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민 업무가 장기간 중지되었는데, 그 시기가 묘하게 겹쳐있었다. 나는 그 화재가 그를 유카탄 반도로 방향을 틀게 했을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민국 벽에 낙서한 김영범과 일기의 YB Kim은 동일 인물이었을까?

조금 더 과장된 추론을 한다면, 그가 멕시코 유카탄을 통해야만 하는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당시 유카탄 반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혹시 그들 중 친지나 친구 등을 만나러 유카탄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아도 엔젤 아일랜드의 이민국 벽에 있는 낙서의 주인공인 김영범과 일기의 주인인 YB Kim은 동일인이거나, 아니면 이니셜만 같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덴버 묘지의 김영범 또한 이 일기의 주인과 동일인이거나 이니셜만 같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아가 이민국 김영범과 일기의 YB Kim 그리고 덴버 공동묘지의 김영범이 동일인 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일수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기술하는 내용은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훼손된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기도 했고, 일부 의미가 통하거나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지나치지 않게 임의로 조정해 문장을 만들었다. 일기에 나오는 단어가 고어인 경우에 현대적으로 교체했다는 점도 미리 밝혀둔다.

 

(YB Kim)가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에 소재한 염호 여관 (조선 사람이 운영한 최초의 여관으로 당시 미국 내 조선 사람들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을 나와 콜로라도를 향한 것은 19131월 초였다. 유타에서 콜로라도로 옮긴 이유는 광산 폭발 사고 때문이었다. 그 참담한 사고로 나와 가깝게 지내던 조선인 친구들이 여섯이 죽었고, 광산은 잠정폐쇄되었다.

우리는 인근 미국인 목사의 도움으로 조선인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렀다. 장례식은 인근 공동묘지에서 몇몇 조선인들과 교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아침나절 공동묘지는 안개에 싸여 장례식 내내 황량한 광산 풍경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었다. 나는 망자들이 떠나는 마지막 날이라도 지긋지긋한 광산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료들은 나무로 만든 묘비에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영어 이름과 그 옆에 한글 이름도 같이 새겨놓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을 발행한다는 한 조선 사람이 우연히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탄광 사고를 신문에 싣겠다고 사진을 찍었다. 기자는 망자들의 이름과 고향을 물으며 말해주는 대로 수첩에 열심히 적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기자가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장례가 끝난 후 식사를 대접했다. 기자는 식사를 하면서 대뜸 우울한 표정으로 자기가 운영하는 신문사가 재정이 부족하여 곧 망할 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그러면 우리가 돈을 좀 모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대꾸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식사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각자가 품에서 돈을 꺼내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기자는 돈을 정중히 받고는 이 돈은 조선 사람들을 위해 쓰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떠나면서 여기 유타주 광산에서 일하는 모두는 독립투사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생전 처음 듣는 독립투사라는 말에 뭉클하기도 하고 또 어색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우쭐함에 가볍게 떨리기는 했지만, 우리 모두는 그것이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YB Kim) 얼마 전 아는 사람으로부터 몇몇 조선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돌며 사기를 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기자도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조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편치 않아 그만두었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짐을 정리해 캘리포니아로 텍사스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그가 정 반대 방향인 콜로라도로 간 이유는 일기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이 손상되었는지 혹은 그저 직업을 찾아 것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콜로라도 주 프리메로 탄광에 도착한 것은 111일이었다. 며칠 동안 눈이 내려 광산 주위는 온통 하얬다. 흰 눈이 없었다면 석탄가루로 뒤덮인 흑산 이었을 것이다. 콜로라도를 덮친 지독한 한파와 폭설로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나 역시 발에 동상까지 걸리는 고생을 하며 탄광에 도착했다. 도착해 여관에 짐을 풀고 동상 치료를 하며 며칠 동안 하릴없이 빈둥거렸다. 춥고 몸이 아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을 생각하니 배가 고프고, 고향 읍내 장터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 먹고 싶다, 라고 나도 모르게 말이 새 나왔다. 실제로 어디선가 국밥 냄새가 나는 듯했고, 나는 그 냄새가 슬퍼서 펑펑 울고 말았다. 냄새 때문에 울다니 바보 같았다.

 

눈이 어느 정도 녹자, 탄광 사무실이 열렸다. 나는 거기서 기본적인 절차와 수속을 마치고 광산에서 제공하는 숙소를 배정받았다. 프리메로 광산은 주로 그리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이 많았고 동양인은 별로 없었다. 그 당시 힘 좋은 유럽의 백인들은 동양인들을 노예처럼 대했다. 그들은 동양인들에게는 말도 걸지 않았고, 어떨 때는 얼굴에 침도 뱉었다고 했다. 나는 오래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못된 일본 놈들을 여러 번 응징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아야 했다. 백인들을 보면 고향 양반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반들이 없는 곳에 살고 싶어 미국에 까지 왔는데……. 힘없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백인이나 일본인이나 양반은 매한가지였다.

 

첫날 나는 옷과 도구 그리고 카바이드램프 등 채광에 필요한 도구를 배급받았다. 그중에 카바이드램프는 최신식이라 아주 신기했다. 작동하는 연습을 해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불이 아주 잘 켜졌다. 회사는 인종 간에 불화를 염려해 백인과 동양인을 섞지 않았고, 나중에는 일본인과 조선 사람과도 섞지 않았다. 중국인과 조선 사람은 그런대로 잘 지내는 편이라 같은 조에 편성시키기도 했다.

나는 동료 조선 사람들과 한 조를 이루어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정선에서 왔다는 석 씨, 전라도 광주에서 온 나 씨 그리고 부산 출신인 오 씨 형제는 이쪽 일을 많이 해 든든한 형님들 같았다. 모두는 처음 온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석 씨는 나 보다 오 년 먼저 아메리카에 들어와 주로 상항에서 살았는데, 동양인들을 차별하는 백인들이 보기 싫어 이곳 탄광에 들어왔다고 했다. 석 씨는 힘이 좋고 머리도 비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와는 연배가 비슷해 서로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나 씨와 오 씨 형제들은 세 달 전 일본인 브로커를 통해 조선에서 바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 탄광 일과 사정이 밝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갱도를 내려가면서 어두워지자 랜턴을 켰다. 주위는 시커먼 석탄만이 우리들을 둘러싸 반기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모두 모여 밥을 먹고 술 한 잔 했다. 고된 작업을 해서인지 금방 취해 버렸다.

 

 

*

 

 

스산한 바람이 불어 흑토를 들어내자, 삽시간에 시계는 제로에 가까워졌다. 창가를 스쳐 지나간 검은색 바람은 벌떼처럼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했다. 오래전 폐광된 지역을 관통해 프리메로 공동묘지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지층 깊숙이 묻힌 고대 도시를 발굴하기 위해 떠나는 원정대의 일원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순간의 영화가 사라진 폐광 지역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풍광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성민규의 안내를 받으며 인근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한국인 묘지에 제사를 모시려 찾아가고 있었다. 백 년 전 죽은 망자에게 이런 형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만,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조촐한 제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오는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황량했던 공동묘지 언덕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동묘지 주변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온 기자들과 촬영기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는 운동장 같았다. 나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관심에 놀라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 그 묘지 앞에, 김정수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식 삼베 수의를 입고 있었고, 성민규와 함께 제사를 모시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정수와 성민규는 인근 신문 기자들과 지역 방송국에다 제사에 대한 정보를 흘려 사람들을 모이게 했던 것이었다. 미국인들도 흥미로운 눈으로 제사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방송 기자가 제사가 끝나자 김정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이고 왜 이런 제사를 드립니까?”

 

김정수는 미국인 기자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 그는 회한에 젖은 듯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오래전…… 그러니까 100여 년 전 나라를 뺏긴 한국인의 묘입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고, 이를 위해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 그리고 이곳 콜로라도 탄광까지 이역만리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는 1913년 프리메로 탄광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돌아가신 독립투사이자 애국지사의 묘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발굴해 내려고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세상에 알리고 이들이 행했던 애국심을 본국에 알리고 싶습니다.”

 

김정수는 인터뷰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연습한 듯 보였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방송 기자들에게 제사의 이유와 무덤의 주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연출된 행동과 말투가 왠지 거북했다. 제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곧 흩어졌다. 김정수와 성민규는 내게 아무 말로 남기지 않고 한국에서 온 방송국 관계자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제사를 드리고 바로 덴버 주립도서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카드를 반납하고 샌디에게 인사치레를 할 생각이었다. 공동묘지를 내려오면서 한때는 꽤 번화하던 광산촌이 이처럼 몰락한 유령 도시로 변화한 과정이 노을에 물들어 검붉게 퇴색 해 버린 황토처럼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풍화의 한 과정 같았다.

 

 

*

 

 

그 후, 그의 일기에는 탄광에서의 일상생활이 사고가 나기 전까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동료들 사이에 일어난 사소한 다툼이나 백인들과의 갈등 등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 지면에 옮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생략했다. 특이한 점은, 일기의 마지막 부분 (10페이지 이상)에 어머니, 고향, 꿈 이런 단어들만이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며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며 어머니와 고향을 그렸을 것이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한 손이 연필을 힘겹게 움켜쥐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노트 위에 마지막 숨이 다 할 때까지 거칠게 썼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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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김영범의 이야기는 인터넷을 통해 들불 번지듯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의 이름과 백 년 전의 이야기는 이제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각종 미디어는 오래전 그의 행적을 취재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이들은 김영범의 자취를 찾기 위해 오래된 신문과 각종 문서를 뒤졌다. 도둑을 잡아 훈계하고 방면한 일, 못된 일본인을 응징하다 일자리에서 쫓겨난 일, 독립운동 자금을 낸 일 등등 일부 신문과 문서에서 그의 행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김영범이 둘이 있었고, 어떤 김영범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김영범은 백 년 전 낙서 속에 미스터리와 같은 김영범이어야 했고, 슬픈 이야기를 남긴 아쉬운 김영범이어야 했다. 두 명의 김영범이 미스터리와 슬픈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김정수는 방송국에서 밀려드는 인터뷰로 바빴기 때문에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성민규 역시 출판사 관계자들과 만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대니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후 연락이 끊겼다.

얼마 전, 나는 성민규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김영범의 짧은 삶에 대한 자료를 한 방송국과 준비해 왔는데, 이를 엮어 책으로 출판했고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성민규는 김영범의 고향인 인천으로 찾아가 그의 후손들을 찾아내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결국, 그는 그의 후손을 콜로라도 주까지 데리고 가 그의 무덤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유골을 한국으로 이장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대니는 엔젤 아일랜드 낙서 속의 김영범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신문사와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로부터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일에 대해 상당한 평가를 받았고, 계속 일을 하라는 품의도 받은 상태였다.

 

나는 샌디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숙소로 돌아왔다. 창문 밖은 이제 어스름으로 덮여 주위는 붉은빛을 띠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도시의 하늘이 짙은 감색으로 변할 때, 어디서 바람이 불었는지 황토가 일어나 주위는 온통 검붉은 빛으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바람이 내리고 흩어졌던 먼지가 가라앉자, 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바람과 황토는 각자의 길을 따라 어디론가 숨어들었고, 낮 동안 숨어 있었던 도시의 네온사인들은 반딧불처럼 작은 횃불을 하나씩 들고 나와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주위를 밝혀주는 것 같았다. 희미한 빛들이 하나 둘 모여 명징한 선을 이루더니, 이윽고 온 도시를 환하게 비추었다. 황토와 바람과 노을 그리고 어둠이 빚어내는 변색의 과정이 어쩌면 일상에 내재하여 있는 삶과 죽음을 보는 듯해 처연했지만, 결국 영겁의 시간 동안 반복해 온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 또한 백 년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이 소설은 우연한 기회에 샌프란시스코 소재 엔젤 아일랜드를 방문해 거기에 방치되었던 이민국 건물을 보고 시작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창작되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 기록은 공식적으로 100년이 조금 넘었고, 비공식적으로는 200년도 훨씬 넘었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이민자들의 역사는 부실하나마 찾아 볼 수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미국에 오신 분들의 기록은 찾아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문득, 한 줌도 되지 않는 기록으로 작가적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소설은 그 상상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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