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속
1. 제이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오래전 제이가 내게 해준 것이다. 저녁을 먹고 편안한 자리에서 술잔이 몇 번 돌았는데, 그가 지나가듯, 자네는 소설을 쓰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 이야기를 소재 로 소설을 써주지 않겠나? 하고 말했다. 나는 평소 말이 없고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 주던 제이가 자기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니 의외라 생각했다. 나는 그러지, 라고 했지만 사실 제이의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흔한 중년의 남자 이야기일 거라 미리 단정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고, 불현듯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아 깝게 느껴졌고, 그래서 늦게나마 자기 인생을 찾아가야겠다는, 그런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 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 미로웠다. 무엇보다도 무색무취한 친구가 그런 것들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고 그 여운 때문이었는지, 나는 시간이 지나 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소설로 옮기겠다는 약속을 오랫동안 지키지 못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출판사로부터 친구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단편 소설을 청탁받았다.
나는 제이의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고 그날 내게 전해준 그대로 옮기려 했지만, 때로는 소 설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이나 수사를 썼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된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는 점 미리 밝혀둔다.
제이는 사십대 후반이다. 제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인상 좋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제이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다. 특색이 없는 얼굴을 좋게 표현하다 보니 인 상 좋다는 말 외에 달리 할 이야기가 없었다. 물론 제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말 대신 환한 미소를 보냈다. 제이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미 소였다. 입이 ‘헤’ 하고 벌어진 상태에서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촘촘히 잡히고, 눈꼬리가 아 래로 쳐진 천진한 미소를 보면 저 사람 정말 인상 좋군,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 다. 평범하고 특색이 없는 얼굴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놀라움이었다.
토요일 오전, 제이는 뉴저지 주 프린스톤에 소재한 R사의 반도체 실험실에 장비 트러블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이는 스테퍼(Stepper)라고 하는 반도체 제조용 노광(露光) 장비를 수리하는 용역업체의 수석 엔지니어였다. R사의 장비 담당 엔지니어인 샘이 다급한 목소리 로 제이에게 그날 저녁 비행기로 프린스톤에 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때 그는 아내와 함 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제이는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샘에게 곧 준 비해 가겠다는 말을 했다. 샘은 고맙다며 이번에 오면 정말로 근사한 저녁을 사겠다고 했 다. 제이는 녀석 또 입에 발린 소릴 하고 있군, 생각했지만, 자신도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토요일 저녁 10시경, 제이는 뉴저지 주 뉴악 공항에 도착했다. 거리는 이미 어둠에 덥혀 있었고, 사람들은 공항을 나와 각자의 집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불 러 프린스톤으로 향했다. 고속도로의 차들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그는 어둠 속으로 빠르 게 사라지는 차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제이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을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했다. 자그마한 실수에 당황한 신입 엔지니어가 이것저것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고 해서 생긴 일종의 소프트웨어 엉킴 현상이었는데, 까다로운 일은 아니지만, 정상화 시키는데 시간 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거대한 노광 장비와 레이저 부분을 리셋하고, 장비의 중요 부 분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초기화만 해야 했다. 초기화 작업이 완료되었고, 마지막으로 장비 를 최적의 상태를 유지했던 그 시점으로 돌리는 작업을 했다.
제이는 그날 저녁 늦게 수리를 완료했다. 시험 운행을 마치고 나서 장비와 최종 보고서를 샘에게 넘겼다.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시카고에 돌아갈 예정이었 다.
*
제이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카고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탑승 시간이 다 되 었을 무렵이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오전 열 시 오 분 출발 예정인 뉴악(Newark)발 델타 항공 보잉 737호는 도착 예정지인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내린 폭설로 탑승 시간이 두 시 삼십 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승무원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번갈아 가며 비행기 연착을 알리는 방송을 십 분마다 계속 하고 있었다. 연착에 익숙한 승객들은 방송을 들으며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책을 꺼내기 시작했고, 시간이 급하거나 연착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승무원 옆에서 돌아가 는 상황을 살피며 분주히 움직였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어 깨에 들쳐 메고 잠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커피점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평균 칠만여 명의 이용객을 수용한다는 뉴저지 주 뉴악 공항은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거렸다. 이들이 표출하는 각양각색의 에너지는 혼잡스러운 공항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 었다. 제이는 커피를 받아들고 공항 한편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하얗게 센 머리와 넓어진 이마 …… 낯선 중년의 모습이었다. 특히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들은 그의 지난날들을 속속들이 이야 기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는 자기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 삶에 정답은 있는 것일까? 유리창에 비친 초라한 제이가 물었다. 제이는 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초라한 제이가 비웃듯 말했다. -
자의건 타의건 끝없이 만들어지는 의식적인 목표와 무의식적인 본능 사이에 보이지 않은 정답이 숨어있어. 그 차이를 안다면 삶의 정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장담하 지. 자네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거야.
의식적인 목표와 무의식적인 본능……,무슨 말이지? 제이는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다. 결 국, 서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유리창에 비친 초라한 제이는 사람들이 표출하는 다양한 표정 속에 묻혀 버렸고, 그는 다시 평범한 중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계속된 연착 방송을 다급하게 알리던 스피커에서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캐럴 송을 따라 부르며 제이는 그날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노련한 여행자의 예감 이랄까, 그는 머뭇거림 없이 프런트에 있는 승무원에게 비행기 표를 내일 같은 시간으로 변 경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이스 초이스, 선생님. 선견지명이 있으신 것 같아요.”
승무원 역시 경험상 사태가 그렇게 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는지, 제이의 결정을 지지하 는 듯 말했다. 제이 자신도 프린스톤에서 하루를 더 보내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 했다. 사람들이 그가 비행기 시간을 내일로 바꾸는 것을 보고는 삼삼오오 승무원에게 다가 와 사태의 심각성에 감을 잡으려 더듬이를 세우듯 눈과 귀를 움직였다. 제이는 아내에게 프 린스톤에 하루 더 있겠다고 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제이는 샘에게 전화를 했다. 비행기 연착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려 하니 방 하나만 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고친 장비가 잘 돌아가는지 물었다. 샘은 장비는 아무 문제없다고 했다. 그는 방 걱정은 하지 말라며 연착으로 하루를 벌었으니 무엇 을 할 것인지 제이에게 물었다. 제이는 별다른 계획은 없고 그냥 쇼핑이나 하면서 하루를 보낼까 한다고 하니, 샘은 지나가는 투로 애틀랜틱시티가 근처에 있는데 거기나 한번 놀러 갔다 오세요. 아, 그리고 제가 근사한 저녁 산다는 거 잊지 않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제이 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장비에 이상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호텔로 돌아온 제이 는 비행기 연착으로 갑자기 남아 버린 하루라는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기 시작했 다. 텔레비전을 켜고 옷을 벗으며 콧노래를 흥흥거렸다. 그냥 기분을 돋우기 위해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기타를 치기 시작할 무렵에 생긴 버릇이었다.
이민 초기, 밤늦게까지 세탁소에 매달려야만 했던 부모들을 기다리며, 어린 제이는 어두 운 방에 웅크려 FM라디오를 들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맞추 어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음악 이론조차 알지 못하는 그는, 귀로 듣는 음을 그대로 기타에 맞추며 악기를 익혔다. 어느 저녁 무렵, 오렌지 빛 노을이 창가를 물들기 시작할 때, 라디오에서 산타나의 삼바파티가 흘러 나왔다. 짧고 심플했지만, 강렬한 기타 선율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나중에 삼바파티의 작곡가인 카를로스 산타나 역시 악보를 보지 못하며 단지 음 감각으로만 기타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이 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어느새 재즈 기타리스트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기타는 제이의 젊은 시절을 풍성하게 지탱해 주던 단단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그가 돌연 기타를 지하실 구 석에 처박아 버리고는 가족을 위해 반도체 회사에 취직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 정에 아쉬워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가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데 자극적인 멘트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왔다.
- 오늘,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행운을 잡을 수 있을지……. 애틀랜 틱시티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애틀랜틱시티는 카지노의 화려한 야경과 음악,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 그리고 쇼걸들의 야릇한 미소 등이 어우러져 상당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순간 제 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가슴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간지러운 이상한 느 낌이 들었다. 제이는 저 야경 속에 휩싸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제이는 호텔 프런트 에 전화해 애틀랜틱시티로 가는 방법에 대해 문의했다.
“오늘 오후 네 시에 애틀랜틱시티로 가는 셔틀이 호텔 정문에 있습니다. 고객님이 그것을 이용하면 편리하실 겁니다. 돌아오는 시간은 새벽 네 시에 있으니 그 시간 동안 마음껏 즐 기다 오시면 됩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알 수 없는 행운을 잡을지…….” 호텔 관계자는 마 치 암기라도 하고 있는 듯 제이에게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
야트막한 언덕을 넘고 완만한 커브 길을 돌자 빛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것은 극적인 반 전 같아서 잠시 그를 어리둥절케 했다. 셔틀버스 안에 있던 나이 먹은 여인들이 눈앞에 펼 쳐진 화려한 조명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이는 낯선 웅성거림 속에서 잠시 어색해 져 고개를 차창 쪽으로 돌렸다. 바다는 거대한 카지노 빌딩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려한 빛을 빨아들여 아름답고도 섬세한 양탄자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고 있었다. 양탄자 위에서 물결은 무수한 빛 가루를 뿌리며 춤을 추었고, 그 사이 사이로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출렁이며 자글 거렸다. 바다에서 빛은 작은 입자였고, 선이고 면이었으며 거대한 왕국이기도 했다. 모든 것 이 비현실적이었으며, 비현실적인 만큼 아름다웠다. 도로 위 차들은 꼬리가 빨간 불나방처 럼 통제력을 잃은 채 빛의 바다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아가리를 벌 린 괴물처럼 몰려드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자 삼삼오오 카지노를 향해 순식간에 흩어졌다. 거리에 제이만 혼 자 남았다. 그는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서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취객 하나 가 투덜거리며 제이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쳤다. 거리는 이미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다 너머 저편에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노을의 마지막 자락과 밀려드는 어둠이 어우러져 검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밤이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제이는 자리에 서서 어두워지 는 바다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작은 배 한 척이 검붉은 기운이 감도는 먼 바다 저편을 너울거리듯 가로질러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잔물결 속에서 붉은 빛이 부서질 듯 자 글거리며 흩어졌다. 언제나 같은 바다와 노을이 빗어 내는 빛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바다는 하릴없이 서성거리는 그 자신을 너무도 초라하게 만들었다. 제이는 바다가 더 많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바다를 끼고 시원하게 포장된 보드웍 주위에는 거대한 카지 노 빌딩들과 거기서 품어는 화려한 조명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바다 너 머로 달이 차오르며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트럼프 카지노를 지나자, 작은 카니발이 나타났다. 카니발의 정 중앙에는 회전목마가 있 었고, 흥겨운 음악이 홀 안을 가득 채워 화려한 축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회전목마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돈을 내고 총이나 석궁을 이용해 표적을 맞히는 놀이 가 있었다. 총으로 과녁의 정 중앙을 맞추면 큰 인형을 상품으로 받았다. 제이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남자를 앞세워 인형을 따라는 무언의 압 력을 행사하고 있는 귀여운 표정의 여자가 보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긴장한 표정으로 석궁을 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 니, 제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오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그러니까 공기총을 쏘는 사람들 뒤에 서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이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동양인이었는데, 챙 넓은 하얀 모자에 긴 생머리, 잘록한 허리가 아름다웠다. 고상하면서도 차갑지 않고, 정숙해 보이면서도 왠지 도발적인 성적 매력도 있는 묘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제이는 그녀에게 접근해 말을 걸고 싶어졌다.
“총 쏘는 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쏘아 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이는 한국 말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제이가 왜 한국말을 썼는지 명확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여자가 한국인이라는 이상한 확 신이 있었고, 만일 여자가 한국말을 몰라 제이를 무시한다면 덜 창피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여자는 제이를 보지 않고 미소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한국 사람이 틀림없었다. 제이는 더욱 용기나 났다. 여자의 웃음이 의미하는 것이 총을 쏜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 은 것인지 잘 몰랐지만, 더는 묻지 않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앞선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종업원에게 삼 불을 지불했고 총알 다섯 발을 받았다. 여자는 공기총 속으로 총알을 넣는 것이 서투른지 제이를 쳐다보며 도와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총알을 받아 공기 총 안에 장전시켜주었다. 종업원이 영어로 쏘는 방법과 규칙을 간단히 설명했다. 종업원은 제이와 여자가 연인 관계라 생각을 했는지 제이를 보며 여자에게 설명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종업원의 설명이 끝나자 여자는 제이에게 설명해 달라는 듯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간단하게 가늠자와 표적의 위치를 잡고 조준하는 법을 잠시 설명해 주었고, 한 번 시험 삼아 쏘라는 말을 했다. 여자는 신중하게 타깃을 보면서 한쪽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 겼다. 그러나 총알은 타깃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여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제이를 보았 다. 그러면서 공기총을 보고 제이를 다시 보았다. 제이더러 대신 총을 쏘아 달라는 부탁인 것 같았다. 그는 여자에게 제가 한번 쏴 볼까요, 라고 하니까 여자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 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환한 빛이 주위에 서린 것 같았다. 제이가 여자를 기쁘 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제이는 그럼 한번 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세요, 라고 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진지해졌다. 그는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정확하게 타깃의 정 중앙에 박혔다. 여자는 토 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등에서 전해오는 여자의 봉긋한 가슴의 감 촉을 느꼈다. 정중앙에 박힌 총알 덕분에 여자는 큼지막한 돼지 인형을 상품으로 받았다. 여자보다 한 뼘이나 더 큰 인형이었다. 제이가 인형을 받아 들자, 여자는 다시 행복한 표정 을 지었다.
혼자 오셨나요? 저는 프린스톤에 왔다가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하고 제이가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제이를 잠시 쳐다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 뜸 카지노에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제이는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고, 여자와 같이 시저스 팰리스 카지노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지독한 담배 냄새가 났지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냥 한번 해 보세요. 돈은 생각하지 말고…….” 제이가 말했다.
여자는 이내 결심이 섰는지 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이는 지갑에서 이십 불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기계에다 밀어 넣었다. 슬롯머신은 마치 뱀처럼 이십 불짜리 지폐 를 집어삼켰다. 베팅은 최고 칠십오 센트까지 할 수 있었는데, 여자는 이십오 센트를 최고 베팅을 잡고 한 번도 그 이상을 넘지 않았다. 손놀림을 보니 몇 번쯤은 해 본 것 같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제이는 그저 뒤에서 여자가 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여자의 뒷모습은 단아한 목각 인형 같았다. 잘 빗어 넘긴 칠흑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삼십 분이 지나자 여자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잃어서 그런지 제이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삼십 분 한 것도 아주 잘했어요. 다음에는 블랙잭이나 룰렛을 해 보세요. 훨씬 확률이 높습니다.”
“……, 답답한데 밖에 나가야겠어요. 그럼 즐거웠어요.” 여자의 말은 단호했다.
“저도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나가시지요.” 제이의 말에 여자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에요, 저 혼자 나가고 싶어요. 고마웠어요. 선생님.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여자는 제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제이는 여자를 이대로 보내기 싫었지만, 여자의 표정이 너무도 단호했다. 그는 멀어져가는 여자의 뒷모습만 쳐다보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제 이는 여자가 없어질 때까지 서성거리다 여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급하게 발길을 옮겼다. 그 는 카지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여자는 이미 인파 속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여자를 놓치고 말았다. 제이는 주위를 살펴보며 여자가 없어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제이는 어두운 바닷가 저편에서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제이의 발걸음은 그곳에 이끌리듯 무작정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바닷가에서 밀려드는 물결은 차가운 바람 소리 같았고, 거기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태고의 어둠이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볼 수 없는 바람과, 다가 갈 수 없는 어둠을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제이는 계속해서 어두운 백사장을 걷다가 바위에 잠시 걸터앉았다. 그는 백 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포말을 보았다. 포말은 밀려오는 파도에 상쇄되고 다시 태어 나기를 반복하는 생명체 같았다.
잠시 후,제이는 여자가 그를 보며 오는 것을 보았다. 달빛에 여자의 얼굴이 아름답게 빛 났다.여자는 제이를 보더니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다시 어둠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제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저녁같이 할까요, 라고했다. 여자는 제이를 보더니, 아니 제이가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한 말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왜 우는 것인지 제 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많은 여자로군, 제이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의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제이는 여자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제이를 보았다. 어느새 여 자가 그의 가슴 안에 성큼 들어왔다. 제이는 여자와 함께 손을 잡고 시저스 팰리스 호텔 안 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통로 옆으로 시저를 비롯한 로마 시대 원로 위원들의 동상이 위압스러운 모습으로 카지노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통로 전체는 말끔한 아이보리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화려했다. 여자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는 지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제이는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한 느 낌이 들었다. 이때,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멜로디는 제이의 귀를 울렸고 그 의 가슴을 쿵쿵쿵 울리게 했다. 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이는 잠시 생각하다, 콜트레인의 오직 당신뿐, 이라는 것을 금방 기억해 냈다. 기억의 곳간 어딘가에 잠재적으로 남아 있다가 갑자기 터져 밀려드는 메모리……. 그 순간 제이의 눈앞으로 이십여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접혀져 다가왔다. 감각적인 재즈 기타와 테너 색소 폰의 애절한 선율이 제이의 가슴을 휘감기 시작했다. 가슴이 더욱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 다. 제이는 그 고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제이는 음악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이의 가슴이 쿵쿵쿵 고동칠 때, 그가 그 옛날 꿈꾸 었던 기타의 선율과 감촉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와 도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었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고, 그냥 소리라도 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이때, 여자가 제이의 손을 잡으며 진정해요, 라고 말했다.
“예……, 아 괜찮아요. 잠시 정신이 없었어요.” 제이가 말했다.
“진정된 거 같지 않아요. 무엇이 아저씨를 정신없게 만들었나요?” 여자가 차분하게 제이 에게 물었다.
“음악이 그런 거 같아요. 저 음악이…… 저 기타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거 같 아요. 왜 그러지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제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단 한 번도요?“ 여자가 말했다.
“예…… 아니…… 젊었을 때는 많이 그랬는데……. 직장을 잡고 난 다음부터는 단 한 번 도 없었어요.” 제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직장이 그렇게 만들었나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아…… 아니에요. 처음에는 직장 때문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그건……, 내 자신의 마음인 거 같아요.
내 마음이 스스로 음악을 닫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게 다 시 열리고 있는 거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하지요? 잘 모르겠어요.” 제이가 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그 마음이 가는 데로, 그 열린 곳으로 들어가요. 더 이상 복잡한 계산하지 마세요.”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여자는 제이의 팔짱을 끼고 멜로디를 따라 홀 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여자의 가슴이 제이 의 팔에 닿았다. 제이는 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대 위에서 콜트레인의 곡을 연주하던 밴 드를 유심히 보았다. 밴드는 오인조로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트럼펫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 중 기타를 잡은 젊은 친구가 제이의 마음에 들었다. 검은 중절모를 쓰고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친구였는데 베이스 기타와 무언의 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기타 가 질문을 던져주면 베이스가 답을 하는 그런 식이었다. 제이는 그런 대화를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연주가 끝났다. 음 악이 끝나고 멤버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맥주를 마시거나 여자들과 장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타는 점잖게 앉아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아저씨도 저랬나요?” 여자가 물었다.
“예, 그랬어요. 기타는 신중해야 해요. 감정에 치우치면 기타 소리가 잘 나오질 않아요. 아마 저 친구도 그래서 조용히 앉아 있는 거예요.” 제이가 말했다.
제이는 텅 비어있는 무대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의자 옆 스탠드에 괴어놓은 기타가 보 였다. 다시 손끝이 근질거리고, 가슴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여자가 다시 제이의 손을 잡 으며 한 번 해봐요,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제이는 아니요…아…저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 아요. 벌써 이십 년도 넘었어요, 하고 슬픈 표정으로 여자에게 말했지만 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무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한 걸음,한 걸음……. 내딛는 발 걸음에 이십여 년 동안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일 년이 무너졌고 이 년이 부서져 갔다. 제이는 계속 무겁게 발걸음을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무대에 올라 기타를 집었다. 밴드 멤버들이 그를 보았다. 드럼이 제이를 제지하려고 일어났 다. 앉아있던 기타가 드럼을 보며 그냥 둬, 한번 지켜봐. 재미있을 것 같아,하며 소리쳤다.
제이는 기타를 잡고 줄을 만지며 악기의 몸통을 쓰다듬었다. 짜릿한 전율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제이는 기타를 쓰다듬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잠시 멈칫했다. 그 전율은 제이 의 심장을 건드리고 피를 타고 온몸을 흘러 다녔다. 멍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 은 잠시, 제이와 기타가 다시 한 몸이 되는 일치의 순간이 되었다. 그는 기타를 힘차게 집 어 들었다. 멜빵을 메고, 기타를 몸에 밀착시켰다. 앞머리 가락을 쓸어 올리며 무대 위에서 좌석에 앉아 있던 청중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청중에 머무르자, 순간 젊은 제이의 모 습과 그 감동, 그리고 그 전율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제이는 기타를 조심조 심 만지며 연주할 곡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잠시 후, 그래, 산타나의 삼바파티…….
강렬한 기타의 선율에 대한 기억이 그를 움직였고, 더욱 강하게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제이는 바로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 연주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어떠한 준비도 필요없이, 몸이 스스로 반응해 손가락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연주가 계속되며 서서 히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제이는 기타를 치며 여자를 잊었다. 제이는 기타를 치며 여자로 부터 느낀 가슴의 감촉도 잊었다. 제이는 기타를 치며 직장을 잊었고, 가족을 잊었다. 제이는 기타를 치며 아무것 도……,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이는 계속 기타를 쳤다.
여자는 제이가 기타를 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여자는 제이를 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시 후,결심이 섰는지 명함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 뒷면에다 뭔 가를 메모한 다음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이를 다시 한 번 보고 바로 홀을 빠져 나갔 다. 연주에 열중한 제이는 여자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연주가 끝나고 제이가 테이블 에 돌아오니 여자는 없고 명함 한 장만 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는 명함을 집어 보았 다. 명함의 뒷면에 여자가 쓴 작은 메모가 있었다.
- 아저씨, 고마웠어요. 꼭 꿈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기타 치는 모습이 참 멋있었어요. 저는 이제 그만 갑니다. 서니.
제이는 아쉬운 마음에 여자를 찾으려 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샘에게서 전화가 왔 다. 처음에 제이는 장비에 다시 이상이 생겨 전화한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제이 재미있었나요? 서니가 방금 전화했어요. 제이는…… 정말로 재주가 좋은 거 같아요. 서니가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하네요. 어떻게 한 거지요……. 내게도 그 비법을 알 려 주세요……. 하하하.” 샘이 말했다.
“무……무슨 말이지……. 서니라니요. 그걸 샘이 어떻게……? “ 제이가 놀라 물었다. “내가 근사한 저녁 산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건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진짜 약속을 지킨 거라고요. 예쁜 여자와 데이트 좋았지요!……. 하하하. 여자가 혹시 명함 주지 않았나요?” 샘의 말에 제이는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 카지노 동행 전문. 리무진 서비스. 아틀란티스의 여인… 서니를 찾아주세요. 미인과 식사 그리고 카지노를 함께… 시간당 80불.”
“그럼 이 모든 것이 샘이 나를 위해 꾸민 일이란 말 이지요……. 하하하.” 제이는 명함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지나간 꿈과 같았고, 한 편의 유쾌한 코미디를 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고 제이는 여자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이별했던 연인 같 은 느낌이랄까, 제이는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는 설렘 때문에 여자는 이미 기억이 없었다.
“샘,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아주 중요한 것을 찾았어요. “ 제이가 말했다.
“마치 은퇴한 철학자가 하룻밤 사이 회춘이라도 한 것 같군요……. 하하하.”샘이 말했다.
“그래 맞아요. 나는 회춘하고 말았네요. 아……, 정말 기분 좋아요. 나도 샘에게 근사한 저녁 사고 싶어요.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하하하.”
*
초라한 제이가 물었다.
“그래 이제는 알았나. 삶의 정답이라는 것을?”
제이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초라한 제이가 웃음 지으며 사라졌다. 제 이도 공항 인파속으로 묻혔다.
2. 서니의 이야기
보드워크 주위로 어스름이 내릴 때, 뉴욕과 뉴저지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들이 승강장 에 밀려들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카지노 빌딩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조명 을 보며 환성을 지른다. 환성과 노을 그리고 조명 빛들이 뒤섞여 보드워크는 잠시 희망의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그날, 나는 지니와 함께 버스 승강장에서 필라델피아에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 다. 오전에 부사장 크리스로부터 필라델피아에서 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받았다. 항상 그랬 듯이, 전해 받은 이름을 하얀 도화지 위에 큼지막하게 써서 피켓을 만들었다.
- 복철규 사장님 환영합니다!
글자의 크기와 환영의 정도는 바로 정비례한다고 내가 들고 온 피켓을 보며 지니는 너스 레를 떨었다. 지니와 나는 전에도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의 지니는 아담한 키에 가슴과 엉덩이가 유난히 커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녀의 특징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도 크고 입술도 도드라져 관능 적이며 귀여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가씨였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 사람들은 다 사장이야. 그렇게 불러줘야 좋아한다고.”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핸드백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살짝 삐져나온 노란 코털을 손 가위로 자르며 말했다. 그날은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들로 승강장 은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피켓을 들고 버스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흔들고 있었다. 십 여분이 지나도 아무도 우리를 보며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만,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곧 사람의 물결이 멈추고, 승강장은 텅텅 비기 시작했는 데, 두 사람이 마지막 버스에서 급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반갑게 손 을 흔들며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이 오늘 우리와 만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전화 통화를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제일 나중에 버스를 나왔다.
“저……저기 이봐요. 잠시만요. 제가 복철귭니다.”
나와 파트너가 될 사람인 복철규가 피켓을 가리키며 수줍게 말했다. 처음에 그는 사십 대 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곱슬머 리에 작은 키 그리고 가무잡잡한 피부와 두꺼운 안경 때문에 아주 소심해 보였다. 소심한 표정에 한국인 특유의 피곤함이 배어있어 어떻게 보면 초라한 오십 대 중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의 직장 생활은 어떨지 궁금했다. 벤치에 앉아 지니와 잡담을 하고 있는 남 자는 사십 대 초반의 과장쯤 보였는데, 눈이 날카로워 성질이 사나워 보였다. 복철규가 존 대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부서는 아닌 것 같았다. 제일 나중에 나온 남자는 깡마른 체격에 눈 주위로 주름이 깊게 파여 거칠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 고 계속 전화를 했다. 나와 복철규는 벤치에 앉아 남자가 전화 통화가 끝나기만을 서먹서먹 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니는 자기 파트너가 될 사람과 바싹 붙어 앉아 재미있게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전화 통화가 끝났는지 남자가 벤치에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계약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닥친 돌발 상황에 잠시 당황하고 있었는데, 마침 크리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들……아직도 같이……있나? 그 친구들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가 야 한데. 회사 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예,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죠?” 내가 물었다. 크리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듣고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돈은 미리 받았기 때문에 공쳤다는 생각은 말고. 오늘 받을 금액의 절반은 네 몫이야. 그리고 호텔 비는 그 친구들이 이미 지불했어. 사용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시저스 팰 리스 호텔이야. 바다가 보이는 꽤 좋은 방을 잡아 놨는데 말이야. 뭐 오랜만에 쉬면서 카지 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잖아. 행운을 잡을지. 히히히."
크리스는 기분 나쁜 웃음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크리스와의 전화 통화를 들은 지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황이 정리가 된 것을 알자, 그들은 우리에 게 손을 흔들며 필라델피아 행 기차가 기다리고 있는 애틀랜틱시티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은 오랜 시간 힘든 노동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처럼 의기소 침해 있었다. 지니도 승강장을 빠져나가며 내게 손바닥 키스를 보냈다.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피켓에 붙어있는 종이를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리며 갑자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까 잠시 생각했다. 필라델피아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조금 전에 헤어진 한국 사람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필라델피아의 춥고 어두운 방을 생각하니 갑자기 호텔에서 뜨 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시저스 팰리스 호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바다가 보이는 아 주 좋은 방입니다. 오늘 날씨가 좋으니 노을이 아주 잘 보일 겁니다. 아, 그리고 이렇게 좋 은 날이면 카지노에서도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하며 머리를 뒤로 넘긴 금 발의 잘 생긴 직원이 내게 키를 주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호텔방에 들어가 바로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으며 양치 질을 했다. 클린징액으로 화장을 지운 다음 욕조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큼지막한 수 도꼭지를 통해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활기차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숲에서 불어 오는 바람소리 같았고,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 를 들으며 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아!’ 나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안도감이랄까, 아무도 없 는 망망대해를 작은 고무 튜브에 몸을 실어 둥둥 어디론가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깊은 한숨 속에서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모두 몸 밖으로 빠져나가 빈껍데기가 된 것처럼 허전한 느낌 이 들었다.
욕실 밖으로 나와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맥주 생각이 났다. 냉장 고를 열어보았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프론트에 전화해 물과 맥주 그리고 가벼운 스낵을 주문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벗은 나를 보았다. 전체적 으로 마른 편이지만 살이 붙어야 할 곳에는 적당히 있어 풍만한 느낌이었다. 흠, 아직도 쓸 만한데. 이것을 보여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니 노곤해져 잠이 밀려왔다. 나는 침대로 파고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이 찾 아오길 기다렸지만 오히려 정신만 또렷해졌다. 나는 침대 밖으로 나와 커튼을 젖히고 창밖 을 보았다. 창밖에는 노을이 짖게 드리워 주위를 녹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환상적인 분위기로 카지노 빌딩에서 쏟아지는 불빛과 노을의 묘한 조화를 이루며 밤을 맞이하고 있었 다. 나가고 싶었다. 저 타오르는 노을 속에서 혼자라도 백사장을 거닐고 싶었다.
나는 보드워크를 따라 시원하게 펼쳐진 산책로를 걸었다. 바다는 붉은 노을에 물들어 활 활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 속을 걸으며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 다시는 돌 아오지 못하는 길로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주위 공기는 터질 듯 팽창해지고 있었다.
*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취업하지 못해 알바로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해야만 하 는 현실은 막막했다. 반복된 노동과 목표 없는 현실 그리고 어둡고 무거운 오늘만이 양 어 깨를 누르고 있었다. 나는 점점 어둠의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웃음이 없어지고 삶의 무게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다. 가끔씩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아무리 잘 생각해 보아도 별 볼 일 없는 청춘이었다.
그날도 나는 불행한 얼굴로 알바에 알바를 전전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피곤한 몸을 이 끌며 버스에 올랐다. 앉을자리를 찾아 더듬이를 올리며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번쩍이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 Life is too short!
어떤 상품을 선전하려고 그런 카피를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식료품 광고나 가 전제품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문구를 보며 내 삶의 기저가 바뀌리라는 알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터닝 포인트라고 할까. 어두운 현실에 희망 찬 미래의 메시지를 전달되었고, 하늘에 서는 새가 울고 머릿속에는 마치 ‘할렐루야’가 왱왱거렸다.
인생은 짧아요. 예쁜 아가씨, 라고 잘생긴 남자 배우가 나를 보고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의 미소를 보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알바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동안 일을 하며 모은 돈을 통통 털어 영어 회화 학원에 등록을 하고, 저 렴하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미국 소재 어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써니 쟁” “아니요. 선희 장입니다.”
“서니 장, 써니 아주 좋은 이름이에요. 어메리칸 네임인가요?”
“아닙니다. 한국 이름입니다. ‘선희’인데 세게 발음하면 ‘써니’가 됩니다.”
파란 눈의 키가 훤칠한 제임스는 나를 보며 한없이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의 첫 만 남이었다. 그는 펜실베니어주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유명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데, 지금은 휴학 중이며 아시아를 돌며 견문을 넓히는 중이라 했다. 여행 경비는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충당하고 있으며 몇 년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낼 계획이라 고 했다. 나는 그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영어 하나로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 부담 없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얼굴도 잘 생기고 매너도 좋아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 다. 완벽한 남자 제임스가 어느 날 내게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 일 만났다. 영어로 대화하고 영어로 속삭이고 영어로 사랑했다. 우리가 처음 관계를 가졌던 그날, 그는 내게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거기서 나랑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쌓은 사랑은 영어로 이루어진 단단한 성곽과도 같아 화 려하고 견고했기에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와 함께 필라델피아에 있다는 집에 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언젠가 그가 내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 그의 집은 크고 아름 다운 대저택이었는데,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골든 레트리버라는 개가 있었고, 그 는 가운데 서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나의 완벽한 왕자님이었다. 금발의 제임스 왕자 님과 나와 골든 레트리버가 정원을 거닐고 있는 달콤한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그를 사랑 했고, 마침내 그의 아기를 갖게 되었다. 나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 지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그에게 임신 사실을 이야기하고 축하받고 싶었다. 그에게 전 화를 했다.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를 여러 번 남겼다. 보고 싶다고, 만나 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사랑한다고, 스카이라운지에서 꼭 만나고 싶다고,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그곳, 스카이라운지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런 일 아주 흔합니다. 떠돌이들이라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지죠. 혹시 돈 빌려주셨나요? 그냥 재수 옴 붙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앞니가 툭 튀어나온 학원 서무가 퉁명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 는지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계속 찾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다시 알바를 시작했고, 영어 공부를 하며 바쁜 생활 속에서 그와 아이를 지웠다. 그러 던 어느 날 미국에서 어학원 초대장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뉴저지주 체리힐 소재 사설 어학 원이었는데, 이들이 보낸 초대장에는 학생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한 서류가 동봉되어 있었다.
한 달 후, 나는 학생 비자를 받고 뉴저지 뉴악 공항에 도착했다. 어학원에 그동안 벌어 둔 돈을 다 털어 넣었기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끼니때처럼 찾아왔다. 유학생 비자로 직장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민국에 적발이라도 된다면 그 자리에서 추방될 위험이 높 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욱 음성적인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한인 밀집지역인 필라델피 아 오번가에 위치한 한식점에서 주방이나 서빙 일을 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아 지속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날도 나는 휴식시간을 이용해 신문에 실린 구직광고를 보고 있었다. 식당에는 파리들이 붕붕거렸고, 냉방을 틀지 않아 땀은 비질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신문 한 장을 접어 부 채를 만들며 구인난 구석진 곳에 삼단짜리 큼직한 광고를 보았다. ‘카지노 동행’이라는 구인 광고였는데 자세히 보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이십 대 초반의 여자를 찾고 있는 광고였다. 광고는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카지노에 동행해 같이 식사하고 놀면서 돈을 버는 아주 쉬운 일이라 했다. 음성적인 일을 하거나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시간당 오십 달러 이상 받을 수 있는 고소득을 보장한다는 광고였다. 나는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카지노 동행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주소를 일러주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
저녁 해가 바다 너머로 돌아가 주위에 어둠이 가득해지면 보드워크 주위를 돌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카지노 빌딩 속으로 하나둘씩 빨려 들어갔다. 희망의 에너지가 다시 피어오르는 시간이었다. 나는 보드워크 벤치에 앉아 짙은 여운을 뿌리며 바다 너머로 돌아 가는 노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을을 보며 필라델피아에서 오는 버스와 승강장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며 피켓을 흔드는 내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손상시키며 살고 있고, 결코 그 굴레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의 말이 등에 박힌 화살 처럼 떨어지지 않고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애써 떨쳐 내려는데 크리스 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밝았다.
“헤이 서니, 호텔에 체크인 했다고 들었어. 잘 생각했어. 휴식은 정말 필요한 거라고. 그 런데 전화해서 미안해. 헤헤헤.“ 그가 머리를 긁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니 고, 내 친구 지인이 지금 애틀랜틱시티에 가고 있어.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지도 몰라. 서니 도 잘 알잖아 프린스톤에서 오는 여섯 시 마지막 버스. 거기서 친구가 의뢰한 사람을 찾아 보라고.” 크리스가 말했다.
뉴저지에서 오는 여섯 시 버스는 단 한 대 뿐이여서 혼동할 염려가 없었다. 버스는 뉴저 지 프린스톤 워커힐 호텔에서 네 시에 출발했다. 호텔에서 손님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 와 한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체리힐을 거쳐 애틀랜틱시티에 들어오는 마지막 버스였다. 나는 크리스가 말한 사람을 찾아 버스 승강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버스는 바다를 등지고 승강장 쪽으로 서서히 유영하고 있었다. 버스 뒤로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어서 버스는 마치 천상에서 방금 귀환한 환상의 마차처럼 기세가 등등해 보였다.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찾기 쉬울 거라 했어. 키가 작고, 굵고 검은 테 안경에 약간 대머리 기가 있는 동글동글 한 한국사람. 중요한 것은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거야. 그 친구 고지식해서 업 소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냥 거절할 거래. 그거 조심하고. 이건 내가 특별히 부탁하는 거야."
크리스는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친구를 위해 특별히 부탁을 하는 그를 보니 과히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는 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돈 많고 평판이 좋은 한국 사람을 우선적으로 내게 소개했고, 수당도 알아서 잘 챙겨주었 다. 이상한 요구를 하는 손님은 애초부터 배제했다.
뚱뚱한 할머니들이 우르르 내리며 주위에 펼쳐진 화려한 조명을 둘러보더니, 호들갑을 떨 며 카지노를 향해 몰려갔다. 제일 나중에 버스를 내린 키가 작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크 리스가 말한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나는 단번에 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크리 스가 말한 그대로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남자. 나는 벤치에 앉아 버스에서 내린 초라하고 작은 남자를 보며 아빠가 생각났다. 아마 아빠도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힘들어 지친 모습, 어딘가 약하고 불쌍해 보이지만 동정할 수 없는 강인함이 배어 있는 전 형적인 한국 남자. 그는 버스에서 내려 잠시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결심이 섰 는지 사람들이 가는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가는 쪽으로 노을이 길게 늘어져 마치 그가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바다가 많이 보이는 쪽으로 길 을 가다 한참을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서 있었다. 무슨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이곳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서성이다 무슨 생각 이 들었는지 시저스 팰리스 카지노 앞에 있는 카니발로 불쑥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를 따 라 안에 들어갔다. 사람들과 오면 항상 들리는 곳이기에 멀리서 그를 따라갔다. 그는 한참 을 둘러보더니 공기총을 쏘는 사람 뒤에서 뭐가 재미있는지 웃으며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그가 말을 걸어오리라 생각하지 않 았는데, 보기와는 달리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 당황했다. 그가 내게 다짜고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아마 그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쏘는 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쏘아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나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밝아진 그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총을 직접 쏘라고 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대신해 쏘아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엉터리로 한방을 쏘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총을 빼앗아 과녁의 정중앙을 쏘았다. 큰 인형이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그의 팔을 붙잡고 겅중겅중 뛰었다. 어느새 내 손이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가 카지노에 데려다주세요, 라고 했더니 그는 좋아요. 같이 가요, 라고 대답했다.
“여기 자주 오세요? 저는 시카고에 사는데 비행기가 연착이 되는 바람에 이곳에 오게 되 었어요. 어디 사세요? 아,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저는 제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살짝 웃음만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우 리는 시저스 팰리스 카지노에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지만 입구에서부터 곰팡내와 담배 연기 가 혼합된 퀴퀴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나는 사실 노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면 그저 지켜보고, 이들이 준 돈은 쓰지 않았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슬롯머신의 기 계음 속에서 무슨 흥분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삼십 분 정도 지나자 그가 넣어준 돈이 없어졌다. 괜히 했나 싶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담배연기 때문에 갑자기 답답해져 밖에 나간다고 하니, 그는 같이 나가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이 사람하고 같이 있으니 거북한 마음만 들었다. 나는 그에게 혼자 나가겠다고 하면서 가볍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
그들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보니 그곳은 ‘아틀란티스의 여인’이라는 이름의 리무진 대 여 업체였다. 번듯한 사무실도 있고,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정장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그들은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자기들은 절대 음성적이며 불법적 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 입구에는 아틀란티스의 여인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화려한 금색 장식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주차장을 가로질 러 사무실에 걸어 들어갔다. 사무실로 가는 길 양 옆 주차장에는 번쩍거리는 리무진이 대여 섯 대 정도 주차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빛을 튕겨내며 주위 공간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문 을 열고 들어가 어제 전화한 사람인데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자, 뚱뚱한 여자가 다가와 회 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지. 이름이……서니 쟁?”
“서니 장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 장, 장이 성인가? 서니 쟁. 이름 아주 좋은데. 서니.” 부사장인 크리스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사장은 크리스의 형이 맡고 있는데 이름은 지 미라고 했다. 크리스와 지미는 형제지간인데, 형인 지미는 일 때문에 출장을 가 있어서 오 늘은 만날 수 없고 다음에 오면 소개하겠다고 했다. 크리스는 지미와 자기는 엄마가 다른 배다른 형제지만 사이는 친형제보다도 더 좋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크리스는 백인과 동 양인의 얼굴을 합친 전형적인 혼혈의 미남형이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틀란티스의 여인이라는 리무진 대여 업체에서 카지노 동행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는 고객들에게 리무진을 대여해 주면서 같이 갈 아가씨들도 포함시키는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관광 가이드 역할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지노 동행을 시작하기 전에 관광 가이드로 시청에 정식 등록을 했고, 근처 전문대학에서 필수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관광 가이드가 되었다.
이들의 말처럼 카지노 동행은 아주 쉬웠다. 장시간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당히 놀면서 좋은 음식 먹고 동행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체류자 단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신분증을 요구한다 하더라도(그런 일은 없었지만) 관광 가이 드 자격증을 보여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음성적인 일이 아니었으며, 깔끔하게 돈이 지불되었다. 주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출장 온 사람들이나, 카지노에 빠진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같이 노름하고, 술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하고나면 하루 최소한 삼백 불 이상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이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카지노 동행 말고는 지금 내 비자로는 불 가능한 일이었다. 카지노 동행은 내 초기 미국 생활을 잘 지탱해 주었다. 사실 지금의 생활 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도 오히려 윤택하고 여유 있었다. 그동안 영어도 많이 늘었는데, ‘윌 리엄’을 ‘윌’이나 ‘빌’ 혹은 ‘윌리’나 ‘빌리’라고 부르며, ‘제임스’를 ‘짐’이나, ‘지미’라고 한 사 람이 가족이나 친구에 따라 여러 종류의 애칭으로 불린다고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
그와 헤어져 나는 카지노 밖으로 나왔다. 어둠은 이미 보드워크 주위에 내려앉아 가로등 을 부르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 둘 환하게 길을 비쳤다. 나는 바닷가 쪽으로 천천히 걸으 며 제이라는 아저씨를 생각했다. 그는 무척이나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뭐랄까, 삶에 대한 애절한 여운이 있어 보였다. 그것은 삶에 대한 질곡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지나간 시절 어떤 것에 대한 처연한 그리움이나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부 터 느끼던 것과 같은 종류의 여운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빠의 그 허전한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 시선은 어디에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 다. 다만 눈동자를 저 먼 곳에다 두고 심연을 향해 들어가는 고래처럼 가쁜 숨을 몰아가며 무엇인가를 연주했다. 아무런 악기도 없이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몇 시간이고 되풀이했 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술병을 끼고 밤새도록 울면서 술을 마셨다. 그의 눈에는 눈물 이 가득 고였고, 그의 시선은 술에 녹아 초점이 없었다.
아빠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피아노보 다는 작업 공구로 향하게 했고, 악보보다는 기계 매뉴얼을 보게 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절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월과 삶의 고통은 그의 사치스러운 꿈을 잠시 나마 잊게 했지만, 그 야릇한 희열의 소리는 거리를 지날 때마다 들려왔고, 그럴 때마다 그 는 지난날 그가 이룰 수 없었던 아쉬운 꿈에 대해 생각했다. 아빠는 그런 시선으로 죽음을 맞았다.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죽음의 문을 향해 가면서도 무엇인가 손으로 연주하고 있었 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자식들에게 남기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 며, 그저 자기 연주를 하며 세상을 살다 말없이 그렇게 떠났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자랐다.
제이라는 아저씨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시선이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 다. 나는 그를 더 알고 싶었다. 그는 무엇에 미련을 두고 있을까? 다시 카지노로 돌아가려 는데 나를 따라왔는지 아니면 바람을 쐬러 나왔는지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바닷가 쪽으 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따라가다 그가 올 만한 곳에서 기다렸다. 그가 다가왔다. 그 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음 지었고, 내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다. 우리는 다시 카지노 빌 딩 안으로 들어갔다.
*
사장과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동안 몇 번 사무실에 들렀지만, 그때마다 사장 은 없었고, 크리스만 사무실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일부러 사장을 만나려는 것은 아니었지 만, 갈 때마다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를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엉뚱한 생각 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장이 구태여 나를 만날 이유도, 더군 다나 그가 나를 피해야 하는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크리스에 의하면, 사장인 형 지미는 리 무진 대여업을 관장하고 자기는 관광 가이드로 구분된 아가씨들의 카지노 동행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지미는 대학원을 다니다 부모님 가업을 잇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 게 되었다고 했다. 크리스는 뉴저지주 프린스톤에 있는 반도체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일 주에 삼일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니 투 잡이 가능했다. 돈은 리무진 업체에서 많이 벌지만, 만일을 대비해 힘들어도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반도체 회사에서 야간에 엔지니어로 일하며 아가씨들은 관리하는 일을 하니 반도체 엔지니어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첨단 기술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두 일을 아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선천적으로 그는 여자를 좋아하는 면 이 있지만, 그렇다고 섹스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여자들과 이야기하고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기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언젠가 크리스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를 처음 본 순간 내 가슴이 뛰었지. 아, 그런데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너는 내 스타일 이 아니야. 너를 여자로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너는 오래전 사고로 죽은 엄마와 비슷하 게 생겼어. 눈치 챘겠지만 나는 혼혈이야. 그래서 한국말도 곧잘 한다고.”
그는 요즈음 한국에서 오는 여자들은 다 예쁘지만 매력적이며 특색 있는 여자는 없고 한 번 보고 잊어버리는 그런 여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나와 말할 때는 한국말만 사용했으 며, 필요 이상 치근대지 않았다. 친구처럼 나를 부담 없이 대하려 했다. 크리스는 카지노 동 행이 끝난 여자들에게 항상 현금으로 지불했다. 종업원을 배려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세금 추적을 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고 종업원들에게 크게 생색내는 방법이었다. 그 는 내가 한국 여자라는 것을 알고 나름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그가 내 게 부탁한 것이니 잘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
우리는 시저스 팰리스 카지노 이 층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왔다. 드럼과 기타 소리가 요란한 재즈음악이었다. 나는 시끄러워 인 상을 찌푸리며 제이 아저씨를 보았다. 그 역시 마음이 심란한 지 표정이 이상했다. 나는 그 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나는 그에게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가 져요,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알았다고 했지만,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고 시선이 풀어져 초점을 잃고 있었다. 내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는 음악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재즈 클럽은 레스토랑을 바로 지나 코너 옆에 붙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입구가 아 주 작아 소규모 카페정도로 보였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무대가 상당히 컸다. 홀 중앙에는 오 인조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무대와 그 무대를 중심으로 작은 테이블들이 둥그렇게 두르 고 있었다. 홀 안은 담배연기로 가득 차 답답했지만 재즈 클럽 특유의 끈적함이 녹아있어 흡연자들의 만행이 그리 잔인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위스키 한 잔 마시고 싶은 생 각이 들 정도였다.
제이 아저씨는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재즈를 연주하는 아마추어 밴드를 보았다. 그는 내 가 옆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고 밴드 멤버들이 각자의 자리에 돌 아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제이 아저씨의 뜨거운 시선은 작은 기타에 계속 고정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기타리스트들이 연주하기 전에 하는 워밍업처럼 보였다. 내가 그에게 나가서 연주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준비 가 되어있지 않다고 자신이 없어 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무대 쪽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그가 무대 위로 올라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출연에 잠시 동요하 는 듯했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치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거장의 귀환을 기 다리고 있던 열성적인 팬들처럼 모두의 시선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고정되었다.
그는 기타를 집어 어깨에 매고 무대를 보았다. 그는 앞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쓴 다음,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 기타를 튕기는 그의 손은 떨렸고, 그의 표정 또한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차츰 그는 자기 연주 속으로 녹아들었 다. 몰입해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잊고 그저 연주에만 몰두했다. 완벽한 몰입이었다.
나는 제이 아저씨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아버지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렇게 아쉬 움 속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연주가 점점 클라이막스로 오를 때, 나는 이제 내 신분을 밝히고 이만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게 눈길 도 주지 않았기에 내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내 명함을 테이블 위에 다 두고 클럽을 나서며 크리스에게 전화했다. 일이 끝나 호텔로 돌아간다 했고, 돈은 받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카지노 밖에 리무진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잘 알지? 회사 리무진. 그거 타고 기분 한 번 내라고. 아, 그리고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아주 오랜 친구라고 하 는데…….”
리무진이 도착한 곳은 고급 주택이 몰려있는 필라델피아 외곽지역이었다. 내가 살고 있 는 아파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볼 일이 끝나면 콜택시를 부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늦 은 시간이었는데도 가로등이 환하게 거리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 위에는 마치 만화동산에 온 듯 화려한 불빛이 번쩍였고, 그 불빛 위에 거대한 맨션들이 서로의 규모를 자랑하듯 줄지어 서 있었다. 거대한 맨션들 앞에는 산타가 사슴과 토끼 그리고 북극곰들과 함께 설원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휴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한가한 크리스마 스의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현관에는 크리스가 큰 개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크리스는 차 문을 열고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개는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내 앞에 수줍게 다가왔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내 손길을 받았다. 자세히 보니 개는 골든 리트리버였다. 우리는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서 로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크리스가 나를 집으로 안내했다. 밤이 이미 깊었기 때문에 대문에 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전체적인 집의 구조를 볼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 너머 멀리 집 전체는 아름다운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궁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 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 멀리 너머 환한 빛이 돌았다. 그리고 거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꽃을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의 키가 큰 남자가 정장 차 림으로 서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친숙하게 느껴졌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놀랍게도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내게 꽃을 건네며 말했다.
“서니, 오랜만이야.”
“…….”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반가움이라기보다는 거북함이었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분 노였다. 나는 그가 건네준 꽃을 바닥에 던지며 뒤를 돌아 나가고 있었다. 서니 잠시만 기다 려. 내게 설명할 시간을 줘, 라는 제임스, 아니 지미의 말을 뒤로 하고 돌아보지 않고 그 집 을 나왔다.
이 소설은 필라델피아 지역 신문에 게재된 카지노 동행이라는 광고가 모티브가 되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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