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스톤 블루스
전준성
그날도 나는 혼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깜빡 졸고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나는 잠의 문턱을 넘어 설까, 말까를 반복하고 있었다. 언뜻, 아득한 곳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눈을 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벨 소리는 내가 잠시 서있던 잠의 문턱에서 나를 떼어내 다시 일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시계는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낯선 머뭇거림이 있었다. 나는 다시 재촉하듯 말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김정우 씨…정우 씨?”
이번에는 길고 거친 숨소리에 비음이 묻어났다.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히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세한 떨림 속에서, 이상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희미한 안도의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예, 제가 김정웁니다. 말씀하세요.”
“……정우 씨, 저 수지예요. 이수지. 인철 씨가…인철 씨가… 죽었어요.”
처음, 이수지라는 여자가 신인철의 이름을 대면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하는 흐느낌을 들었을 때, 나는 누군가 지독한 장난 전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여자가 이수지라고 재차 말할 때, 나는 내 친구의 비극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편집장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천재 과학자 신인철의 죽음을 보고하며 취재를 하겠다는 요지의 계획서를 첨부해 보냈다.
*
뉴욕 JFK공항을 나와 벨트 파크웨이에 접어들며, 나는 십오 년 전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2005년 아인슈타인 박사 사망 오십 주년 특집기사를 위해 취재차 왔던 뉴저지주 프린스톤. 오래전 감각이 살아 있는지 프린스톤으로 가는 길은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가을 무렵 붉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들이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운지 움츠리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위대한 과학자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안이한 취재를 하고 있었다. 편집장이 내게 휴가 비슷한 취재 건을 맡기면서 한껏 생색을 낸 출장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봐, 적당히 때우라고. 내 특별히 자네에게 맡기는 거야. 잘 쉬다 오라고. 아이들이 캐나다에 있지 않은가. 취재 끝내고 아이들도 보고 오고…….”
나는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았던 집과 프린스톤 대학의 강의실 그리고 박물관 등을 선회하며 처음부터 계획했던 평이한 포맷에 진부한 내용으로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성장 과정과 학창 시절, 첫 부인 밀레바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미국 망명 비화, 프린스톤 대학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상대성 이론 그리고 핵폭탄 제조와 박사의 관련성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들이었다. 기존에 나와 있던 기사와 비교하면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옛날 기사를 그대로 카피해 새롭게 찍은 사진으로 도배한 기사였다. 표면적으로 다르게 보이도록 편집했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과거에 나왔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의 일정을 레스토랑에서 찻집에서 그리고 백화점에서 호텔 방에서 여행하듯 한가히 보냈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오래된 기사들을 뽑아 편집하는 일로 얼추 취재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취재 전 작성한 취재 목록과 취재한 내용을 비교했다. 대부분 완료되었지만, 목록의 맨 마지막에 써 놓은 ‘하비 박사’ 라는 이름을 보며 심한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취재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있는 캐나다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하비 박사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프린스톤을 떠나지 못했다.
그 사람, 아인슈타인 박사의 시신을 부검 한 사람이었지. 아인슈타인 박사의 뇌를 몰래 숨긴 그 사람……, 하고 하비 박사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의 안이한 취재는 버려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기자로서의 기본적인 직업의식 같은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나는 취재 방향을 하비 박사에게 맞추었다.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내용으로 기사를 써내려갔다. 결과는 예상외로 많은 호응을 얻었고, 취재 기자로서의 내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뉴욕 벨트웨이를 빠져나오자, 95번 프리웨이가 나왔다. 이 길을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프린스톤이 나오게 된다. 나는 이 길을 따라 십오 년 전 하비 박사를 만났고, 지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프리웨이를 나와 좁은 도로를 달리다 보니 프린스톤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나왔다. 프린스톤 대학과 아인슈타인으로 유명한 대학 도시인 프린스톤 시는 시내로 접어들자 도로의 폭은 점점 좁아졌고 차량은 많아져 교통은 혼잡했다. 전형적인 대학 도시인 프린스톤은 보수적인 기풍 때문인지 시내 전체는 오래된 유럽의 대학 도시 같았다.
프린스톤 시, 나소 스트리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생가가 있으며 거리를 따라 즐비하게 들어선 고풍스러운 프린스톤 대학 건물들, 대학생들 그리고 그들 머리 위에 반짝이던 햇빛과 가을바람, 그리고 낙엽들……. 이러한 것들로부터 형성된 무형의 에너지가 거리로 무수히 퍼져 나가, 나소는 오래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십여 년 전 기억을 더듬다 하비박사의 급작스러운 기침 소리가 생각났고, 그와 잠시 함께했던 작은 방으로 시간이 접혀졌다.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집어넣으며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가래 끓는 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그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그것은 명백한 오만이었어, 라고 내게 고백하듯 말했다. 공허한 웃음 속에 그의 입술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의대 졸업장과 개업의 라이선스가 둔중한 금속 사진틀에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사진틀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내게 이보게, 내 인생이, 내 이 황금 같은 인생이……, 그 순간 통째로 날아가 버렸지, 하고 던지듯 말했다. 나는 순간, 그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말로 들렸다. 내가 박사님, 그럼 그 일을 사전 계획 없이 혼자 하신 일이란 말씀이십니까? 라고 묻자, 그는 흠, 혼자 저지른 일이다……, 혼자 저지른 일이다……,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눈을 감고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되풀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지, 결국 그건 나 혼자 한 일이었어. 그날 새벽 박사님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지.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네. 그의 죽음은 이미 며칠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지. 하지만 그의 아들이 부검을 의뢰한 것은 정말 놀랄 일이었네. 사인이 명확했으니 굳이 부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야. 부검은 원래 내 스승인 지머만 박사가 하기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날 그 분에게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겼어. 그는 내게 전화를 해 아인슈타인 박사의 부검을 맡으라고 지시를 내렸네.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알겠습니다, 라고 흔쾌히 말했지. 결국 내가 아인슈타인 박사를 부검하게 된 것이라네. 그러니 계획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던 것이지. 나는 지금도 상상한다네. 만약……, 하긴 만약이라는 말은 이성적인 말이 아니지. 이미 벌어진 과거의 시간에다 대고 만약이라는 소리는 가당치 않지. 그러나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일세. 만약……, 그 날 스승이 나를 지목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물론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테지. 이혼도 당하지 않았을 거고, 의사 라이선스도 취소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내 운이 나빴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는 다시 괴롭게 기침을 하면서 가슴을 잡고 가래를 뱉어냈다. 그가 사용한 손수건에 피가 섞인 가래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피 묻은 손수건을 보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나이가 먹어 생기는 폐 질환이라고 했다. 자기도 곧 아인슈타인 박사가 있는 그곳에 갈 거라 하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나는 부검을 해야만 하는 그때 그 상황을 일생일대의 행운이라 생각했지. 불세출의 위대한 과학자의 시신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리고 바로 생각했지. 이 위대한 사람의 뇌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꺼내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그것은 그날 부검을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생긴 일 이었어. 다시 말하지만, 결코 사전 계획 따위는 없었다네.”
그는 그동안 살아온 삶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그 당시를 후회하는 나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나이가 들어 쇠락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강인한 얼굴과 넓은 어깨 그리고 깊고 강렬한 눈빛의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두개골을 절단해 뇌를 끄집어낸 다음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넣었지. 그리고 뇌가 나온 자리에는 솜을 집어넣었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나를 프랑켄슈타인 같은 패륜 의사라고 비난하지만, 뇌를 끄집어내는 일은 부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말들이야. 나는 뇌를 빼고 있는 그 순간, 다시 넣지 말고 따로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지금도 나는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네.”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기침을 여러 번 했다. 나는 잠시 답답한 마음이 들어 하비 박사의 기침 소리를 뒤로하고, 창가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들어 밖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거리에는 금발의 여학생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두웠던 실내가 환해졌다. 하비 박사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거듭하면서도 나와의 인터뷰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마치 마지막 유언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나에게 그동안의 일을 고백하듯이 힘겹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피곤한 듯 눈을 자주 감았다. 급작스런 기침을 많이 했고, 그럴 때 마다 가슴을 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물을 한 컵 따라 그에게 주었다. 그는 목이 마려운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하비 박사가 조금 더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심각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
신인철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는 내게 안부를 묻는 엽서를 보내곤 했다. 그가 출장을 다니면서 현지에서 구입한 그림엽서들이었다. 나 역시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이라 그에게 내가 방문했던 도시가 그려진 엽서를 보내곤 했다. 서로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내가 그를 미국에서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십오 년 전 아인슈타인 박물관에서였다. 사실 만났다는 것 보다는 ‘나는 그를 보았고,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가 맞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하비 박사를 취재하는 중이었고, 그는 프린스톤 대학교수로 임용되어 평소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박물관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초상화 앞에 서서 무언의 대화를 하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림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창문을 타고 은은한 햇빛이 그와 초상화 사이에 너울거렸다. 빛줄기는 그를 감싸며 아인슈타인 박사의 초상화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그와 초상화 사이에는 신비스런 빛 무리가 감돌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는 그는 아인슈타인 박사였고, 그가 바로 신인철이었다. 그는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박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먼발치에서 그와 아인슈타인 박사가 펼치는 신성한 의식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그가 최근에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그 편지는 그의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정우.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네. 고등학교 시절 자네를 처음 보았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 자네는 아주 잘 생긴 부잣집 도련님 같았지. 허여멀건 친구가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하는데 참 부러웠지. 자네는 항상 주위에 친구들로 넘쳐났지. 언제나 좋은 미소로 친구들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주위 사람들을 편하고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자네가 참 보기 좋았네. 반면, 나는 언제나 생각이 복잡했지. 머릿속에는 항상 수식과 아이디어가 가득 차 있어서, 그 나이 때 즐겨야 할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어. 심지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인생과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심각하게 생각했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구제불능이었어. 그런데 자네는 그런 나를 항상 옆에서 잘 대해주고, 많은 이야기 했지. 자네의 친절이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었네. 정말로 고마웠다네.
나는 자네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보다는 기자나 글을 쓰는 작가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네. 사교적이고 친화적이니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기자가 좋을 수 있고, 자네 글을 잘 쓰니 소설가도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로부터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기뻤다네. 어떤가, 이만하면 나도 꽤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보게 친구, 자네 인생 재미있게 살고 있나? 자네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하네. 이 편지를 보면 답장 부탁하네. 암튼 나는 자네를 보고 오랜 시간 같이 지낼 수 있는 친구라는 확신을 했지 (자네도 같은 생각이기를 바라네).
나는 이제 오랫동안 전력을 기울인 연구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지. 이것이 완성된다면, 아니 그럴 수 있다면, 인류 역사에 자그마하나마 공헌을 하리라 믿고 있다네. 하지만 그 성패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있을 것일세. 과학이라는 학문을 하다보면, 자네도 마찬가지지만 내 지식이 너무도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지. 시간이나 우주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 포용할 수 있는 이해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다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아주 오래 걸렸지.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을 했다네. 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고백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 출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나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계속 질문하라’ 라는 말을 평생 안고 산다네.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다는 것이 자기 인생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하지. 나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네. 이런 일이란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존경을 받고 그래서 움직이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 이번 연구가 잘 되어 세상에 알려지면, 자네를 꼭 초대해 특종 기사를 주고 싶네. 그때 꼭 와주기 바라네.
자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나를 그 많은 시간 동안 지켜봐 주고 좋은 친구로 대해주어서.
그럼…….
신인철
나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전에 느끼지 못했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편지는 마치 이별을 눈앞에 두고 감회에 젖어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글 중에 ‘이런 일이란’ 글귀에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이제 인터뷰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인슈타인 박사의 뇌를 볼 수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내말에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말했다 .
“나는 이제 박사님의 뇌를 가지고 있지 않아. 오래 전부터 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증해 왔는데…. 아, 그것 역시 큰 실수였지. 그 나쁜 녀석들에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뇌를 전문가에게 보내 연구를 진척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인격과 대비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것이 실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전문가들에게 보내야 하지 않았는지요? 저는 그 것도 많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자네 아인슈타인 박사의 수입이 사후에 급격히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
“물론 내 말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겠지. 모든 것들이 다 비즈니스와 연결되어 있네. 비즈니스! 박사의 죽음으로 살판난 녀석들은 비즈니스 하는 놈들뿐이라네. 심지어 박사의 우스꽝스러운 사진 등을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싸게 구입해 상표 등록을 하고는 다시 비싼 값으로 팔아먹지. 아마 박사님이 이런 실상을 안다면 무덤 속에서도 울고 계실거야. 내가 박사님의 뇌를 적출할 때 만해도 세상은 단순하게 돌아가고 있었지.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돈으로만 연결되어 있고, 나는 시대에 뒤쳐져 사라져야만 하는 구닥다리 영감일 뿐이지.” 그는 우울하게 말했다.
하비 박사의 집을 나서자, 거리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간간이 비를 뿌렸던 잿빛 구름 조각들과 흰 구름 그리고 하늘색과 붉은 노을빛이 섞여 여러 가지 색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수줍은 듯 살며시 삐져나왔다. 나는 갑자기 그 햇살과 지평선이 잇닿은 곳에는 가여운 영혼이 묻혀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자 그 가여운 영혼이 아인슈타인 박사가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비 박사는 그로부터 이 년 후, 2007년 봄,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5세였다. 그는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그의 부고에는 프린스톤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1995년도에 프린스톤 병원에서 아인슈타인 박사의 시신을 부검했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인슈타인 박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같은 병원에서 그의 긴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
신인철의 집은 소박했다. 단출한 이 층 콜로니얼 스타일에 작은 정원에 나무들, 그리고 나무 그늘 속의 얌전히 앉아 있는 하얀색 벤치와 소박한 실내 장식……. 나는 잠시 뭉클해졌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감사합니다. 인철 씨는 항상 정우 씨를 그리워했어요.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라 하면서…….”
그녀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한 남자가 다가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성민규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성민규는 60대 초반에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는 반쯤 벗겨진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그는 인근 R대학 의대 교수로 인철 가족의 주치의라고 수지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성민규의 두꺼운 입술은 다소 고집스러운 느낌을 받았지만, 안경 너머에 감춰진 눈매가 매서웠다. 간간이 터지는 사교적인 언사 때문에 나는 그가 부단히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얼굴 표정이 초췌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성민규가 말했다.
“신 박사가 아주 좋은 친구를 두었군요. 기자님 이라고 들었는데…….” 성민규가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외국인 기자이기에 접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 제대로 취재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성민규가 말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신인철이 최근에 보낸 편지를 생각하며 수지에게 물었다.
“최근에 신 박사로부터 이상한 점을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우울해 하거나 혹은 평소와 다른 점이라도…….”
“아니요……, 그이는 언제나 같았어요. 그날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했어요. 아침식사를 하고는 연구실로 갔지요. 그리고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사고가 난 거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슬픔에 잠긴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뭐라고 하나요?” 내 두서없는 질문에 성민규가 바로 끼어들었다.
“신 박사 정도 되는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라 그들의 상급 부서에서 항상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신변 보호라는 명목이지만 사실 사찰이지요. 그의 머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디엔가는 다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다. 신 박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먼저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껏 아무런 수사 발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도 모르고 있거나,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성민규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미국 정보국이 관여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내가 물었다.
“그건 저희가 알 수 없지만, 신박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가 죽고 나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고가 난 다음 즉시 연구실 건물 전체가 폐쇄되었습니다. 수지 씨 역시 들어갈 수 없었지요. 그것은 정말이지 비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까지 있었던 장소를 아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는 않잖아요.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사무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조사를 끝나고 사건이 서둘러 종결되었습니다.” 성민규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인은 밝혀졌나요? 심장마비라고 들었는데, 부검 결과는 나왔습니까?” 내가 물었다.
“심장마비라고 결론이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요즈음 이런 죽음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겠지요.”
나는 성민규의 말에 갑자기 신인철이 집중하던 연구가 생각났다. 그의 말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신 박사의 실험노트나 컴퓨터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내가 물었다.
내 질문에 수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연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잠시 할 말이 없어 침묵이 흘렀는데, 성민규가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신 박사는 외부로부터의 해킹이 불가능한 개인 컴퓨터가 있어서 거기다 모든 자료를 보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컴퓨터가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가 어떤 실험을 하다 변을 당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저도 답답한 마음입니다. 정보부에서 이미 모든 걸 수거해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문득 그가 인철이 하고 있던 연구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박사님은 인철이 그동안 해 왔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신 박사가 자기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워낙 신중한 성격이라 하고 있는 실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성민규는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어졌다. 나는 간단한 식사를 하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해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수지에게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 집을 나왔다.
나는 나소 스트리트를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오렌지색 깃발이 나부끼는 프린스톤 대학의 정문이 보이는 거리에 잠시 멈춰 섰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는 신인철을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다, 문득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오래전 같은 거리를 산책하던 아인슈타인 박사가 떠올랐다. 봉두난발 백발의 유명과학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거리를 걸으며 따분한 실험만을 생각했을까? 아인슈타인 박사는 그 당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아인슈타인 박사를 알아보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던 가상의 옛사람들을 생각하며, 신인철 사망을 다룬 이 지역 신문 기사를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푸드 트럭에서 파는 오 불짜리 핫도그를 사 들고 근처 프린스톤 도서관을 찾았다. 거기서 지역 신문과 인터넷을 뒤지며 신인철이 사망하던 당일 기사를 찾았다.
- 프린스톤 대학 물리학과 교수 사망
그에 대한 기사가 이상하리만치 간단히 처리 되어있었다. 나는 다른 신문들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날 모든 신문들이 똑같은 문구로 신인철의 죽음을 다루었다. 마치 각 신문의 담당 기자들이 사전에 모여 합의를 보고 만든 듯 똑같은 문구였다. 상식적이지 않은 동일한 신문 기사는 사고 경위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 없었다. 달랑 한 줄짜리 기사뿐이었다. 나는 황당한 내용의 기사를 보며, 자칭 기자라는 자가 당연히 했어야할 일을 못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프린스톤에 도착해 지내는 동안 지역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뉴스에서도 그의 사망 사고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작은 도난 사건조차도 자세히 보도하는 시골지역 언론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침묵은 기묘했다.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뭔가가 있다, 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잘 재단된 장막처럼 비집고 들어가 실체를 엿볼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수지를 찾았다.
*
수지의 안내로 이층 서재에 들어서는데, 한 아이가 서재 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첫 눈에 그 아이가 신인철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열 살 정도로 보였고, 굳게 다문 입술에 말 없는 표정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처음에 나는 아이의 슬픈 표정이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의 슬픔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우리가 들어오는 지도 모르고 혼자 무슨 생각에 잠겨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당황한 수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아이의 텅 빈 눈을 보았다. 그것은 슬픔을 말하는 눈이 아니라 무심한 눈이었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그런 공허한 눈동자. 나는 아이의 빈 눈동자를 보면서 그동안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한 가닥 풀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이상했지만, 확실한 기분이었다. 수지가 아이를 데리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나는 아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아래층으로 내려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서재를 둘러보았다. 낡은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작은 책꽂이…천재 과학자의 서재치고는 소박했다.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통해 아인슈타인 박사의 생가가 보였다. 나는 마치 신인철이 된 듯이 아인슈타인 박사의 집을 바라보았다. 뒷마당 나무 그늘 속에는 하얀 벤치가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늙은 개처럼 자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서너 명의 관광객들이 아인슈타인 박사의 집 주위를 선회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낡은 책상 한쪽 구석에 작은 씨디 플레이어가 눈에 띄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던 그가 최근에 즐겨 듣던 음악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구스타프 말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냥 한 잠 자고 난 것 같아.” 신인철은 말러의 음악에서 영원한 평화로움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거짓말처럼,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 중 4악장이 자그마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감미로운 하프의 선율이 마치 고요한 호숫가 위에 내리는 실눈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인철이 즐겨듣던 음악. 그는 아직도 말러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관악기를 철저히 배제한 채 현악기만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말러는 생전에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사후,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차가운 겨울날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이 생각났고, 그 위에 살포시 얹힌 자그마한 소녀의 발자국이 떠올랐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면서 아인슈타인 박사를 향해 무엇인가 한 마디씩 무언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위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회로를 그려 넣은 반도체 설계도와 작은 책자가 눈에 띄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그린 반도체 설계도의 한쪽 구석에 사람의 머리가 그려져 있었고 반도체 설계도의 한 선이 머리로 연결된 그림이었다. 그림 주위에는 한글과 영문이 혼용된 글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는 반도체와 뇌와 관련된 프로젝트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책자는 한국말로 되어 있었는데, 고려청자에 관한 것이었다. 책의 접혀진 부분을 잠시 보았다. 고려청자 특유의 신비로운 색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가 왜 고려청자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의 깊이를 알 수는 없지, 하며 나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책자와 실험 노트 속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가지고 수지를 찾았다.
“수지 씨, 얼마 전 신 박사가 제게 보낸 편지에서 막바지에 있는 연구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요.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제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그가 개발하고 있는 반도체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혹시, 신 박사가 무슨 말…… 하지 않았나요?”
나는 순간적으로 수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갑자기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표정의 변화인데,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의 놀라움 같은 것이었다.
“……지난번 그이가 밑도 끝도 없이 어쩌면 우리 아이 병 고칠 수 있을지 몰라, 라고 했어요. 그때는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이답지 않게 들떠 있었던 것 같았어요.”
나는 신인철의 서재에서 잠시 만난 아이의 텅 빈 눈동자가 생각났다. 신인철의 아이가 병이 있다는 이야기는 직접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인철의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고뇌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지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이가 정우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아이가 자폐증이 있어요. 그이는 아이가 그런 것이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곤 했어요. 방법이 없다면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언제나 괴로워했어요. 자폐증과 천재는 일란성 쌍둥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약간의 변화를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의 위치를 알아 흐름을 조절해 보낼 수 있다면, 아이를 정상인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요.”
“반도체가 아이의 자폐증 치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박사의 죽음과는 연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순간 나는 수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쉬움과 자책이 섞여있는 눈물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가 즐겨 앉았을 나무 그늘 속 하얀 벤치 위에 앉았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였다. 나뭇잎은 옅은 바람에도 흔들렸으며 그럴 때마다 내 발등 위에 오후의 햇빛은 커지고 작아졌다. 바람 소리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저녁이 조용히 내리며 긴 하루를 스스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득히 먼 곳 저편에서 황혼이 밀려왔다. 붉은 노을이 점점 커지면서 흩어진 먹구름과 옅은 햇빛 그리고 파란 하늘과 합쳐져 사위는 황금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일순간 모든 것들이 찬란해지고 고귀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황혼이 시작했던 저편에서 어둠이 다시 밀려왔으며, 순식간에 황금빛의 하늘은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찬란함과 고귀함이 어둠 속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어둠에 덥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빛의 바다는 아무 곳에서도 볼 수 없었고 어둠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
호텔로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물을 크게 틀어놓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정리가 되었다.
“쏴! 쏴!”
큼지막한 수도꼭지를 통해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활기차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같았고,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를 들으며 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뜨거운 김이 욕실을 뒤덮고 나는 그 속에서 눈을 감고 지금까지 접했던 정보와 내가 받은 느낌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내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뜨거운 김이 욕실에 퍼지며 시야를 하나 둘씩 지워나갔다. 욕실은 이미 하얀 김으로 가득 차 어느새 시계는 제로에 가까워졌다. 갑자기 피곤함이 쏟아지듯 밀려왔지만 깊은 한숨 속에서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경미한 경련이 온 몸에 일었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빈껍데기처럼 가벼워졌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를 작은 고무 튜브에 몸을 실어 둥둥 어디론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비우고 서서히 잠의 세계로 천천히 녹아들어갔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러를 좋아하던 천재 친구, 그가 상우의 손을 잡고 눈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친구의 입가에서 아름답고 편안한 미소가 서렸다. 장면이 바뀌어 십오 년 전 인철을 보았던 아인슈타인 박물관이 나타났다. 거기에 그는 그때처럼 아인슈타인 박사의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나 역시 그를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그를 방해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와는 달리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때 자네가 먼발치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네. 나는 그냥 멋있게 보이려고 계속 그러고 있었지.”
“자넨 지금 어디에 있나?”
그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 어찌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가 내 의도를 알았는지, 내가 다가가자 그의 얼굴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새카맣게 변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잠에 들 수 없었다.
*
하루 평균 십 만여 명의 이용객을 수용한다는 뉴욕 JFK공항은 다양한 사람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로 활기 넘쳤다. 나는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델타 항공 부스에서 발권을 하고 보안 검색을 통과하기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수지와 아들 상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나를 배웅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상우는 정장차림이었는데, 반듯하고 의젓했다.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옷을 잘 입으면 상우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요, 하고 수지가 변명하듯이 내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들은 내가 검색대를 통과할 때 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게이트로 가기 전 이들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상우가 엄마를 흉내 내고 싶었는지, 내게 손을 흔들었으며, 입가에는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옆에 있던 수지도 아이의 행동이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을 생각했다. 아니, 아이들의 배우는 영어를 생각하면서, 좌뇌인지 우뇌인지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둥둥 떠다니던 아인슈타인 박사의 뇌 조각과 하비 박사 그리고 죽은 신인철의 머릿속에 그렸던 반도체를 생각하며 캐나다 행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잠이 들고 있었다.
에필로그
문득 나는, 텅 빈 식탁을 보며 그 위에 쏟아져 내리던 아침 햇살을 기억해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러한 사소한 기억들이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형의 입자로 변해 집안 곳곳을 떠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를 때면, 때마침 그 입자가 터져 가족들과 행복했던 기억의 불씨를 지피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입자는 더욱 많아졌고,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시선은 점점 불안해 졌고 외로움은 더욱 커졌다.
그날도 나는 혼자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언뜻 불명확한 소음 속에 “뉴스 속보 입니다” 가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색 깃발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겨우 눈을 떠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 속보는 나를 다시 텔레비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탁자위에 있던 맥주 캔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 미국 R대학 의대의 한국인 교수가 세계 최초로 최첨단 반도체가 탑재된 인공 뇌를 동물의 머리 안으로 삽입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상당한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반도체는 미국의 I 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생체 반도체라고 하는데, 이를 개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이번 연구의 총 책임자인 성민규 교수의 말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 현재 인류가 앓고 있는 질병 중에 뇌와 관계된 치매나 자폐증의 치료는 아직 불가능한 영역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제 치료법이 생겼습니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연구실에서는 다 년간의 동물 실험을 거쳐 안전하게 인공 뇌를 동물의 머릿속에 삽입해 임상실험을 계속해 왔습니다. 치매나 자폐증을 앓고 있는 동물들의 머릿속에 생체 반도체에 연결한 인공 뇌를 삽입했습니다. 인공 뇌 속에 있는 반도체는 뉴런을 통제해 전기적 신호의 흐름을 안정하게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거부반응이나 오작동이 없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인간에게 직접 응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동안의 자료와 임상실험을 바탕으로, 조만간 치매 환자에게 인공 뇌를 삽입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저희는 이 기술을 어떻게 인류를 위해 쓸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합니다. 끝으로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전폭적인 재정 지원과 연구 초석이 되어준 생체 반도체와 그를 운영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을 지휘한 I 사 인공 지능 연구소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던졌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에 금이 가고, 맥주가 그 깨진 틈 사이를 비집고 흘러 내렸다. 깨진 화면 속에 번들번들한 성민규의 대머리가 여러 개로 조각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깨지고 조각난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괴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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